역설 하나. 고난 속에서 살맛을 찾아 나서다 “우리 국민들이 국가 부도위기로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저는 반대로 ‘재미’라는 책을 썼습니다.” 한양대 관광학부 손대현 교수는 ‘역설의 사나이’다. IMF 외환위기로 국민들이 위축되고 있던 때 그는 ‘살맛 나는 삶, 재미있는 삶’을 소개하는 책을 냈다. ‘돈이 없어 살맛을 잃고, 나라가 끝났다’고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역설이 전환을 가져올 수 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IMF 외환위기를 개인의 행복이 돈에 질질 끌려가고 있는 삶을 성찰하는 기회로 본 것이다. 그때부터 손 교수는 ‘삶의 속도계’에 관심을 가지고 느리게 살기 운동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느리게 살기를 실천하고 시민운동으로 전개를 모색할 무렵인 2005년, 그는 이탈리아로 들어간다. 11월 17일은 그가 이탈리아 땅을 밟은 날이자 한국 슬로시티의 창립일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갔더니 포도주 마을 주민들 느리지만 정말 행복하게 살아 “이런 마을을 한국에도 만들자” 결심 손 교수는 “이탈리아에서 포도 하나로 140개의 상품이 나오는 슬로시티를 방문했습니다. 시민들은 포도주에 취해서 항상 얼얼하지만, 돈도 잘 벌고 생활을 즐기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죠.” 이 경험을 계기로 손 교수는 ‘느리게 살기’를 시민운동으로 끌어올리기로 결심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손 교수는 한국슬로시티본부를 창설하며 본격적으로 느리게 사는 삶을 알리기 시작했다. 아시아 국가 중에는 유일하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된 슬로시티운동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세계화와 패스트푸드 문화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했다. 로마 시민들은 다국적 패스트푸드 업체가 무분별하게 확산되는 것을 반대해 슬로푸드 운동을 벌였다. 이에 자극받은 40여개 도시가 1999년, 고유한 자연환경과 전통문화를 지키는 슬로시티가 되기로 하고 ‘치따슬로’라는 국제슬로시티연맹을 구성했다. “치따슬로는 느리고 작은 것을 좋아합니다. 달팽이가 마을을 이고 가는 치따슬로의 로고는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업어서 키우듯, 달팽이로 상징되는 자연이 인간을 키운다는 의미를 담고 있죠”라고 손 교수는 설명했다. 작은 곳을 향해 느릿느릿 가는 달팽이처럼 사는 삶이 치따슬로의 정신인 것이다. 역설 둘. 관광객을 사절하는 관광전문가 “허허, 관광학 공부만 42년을 해온 제가 관광객을 유치하지 말라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손 교수는 슬로시티 도시 지정에 관심을 갖는 지방자치단체장을 만날 때마다 잔소리처럼 “관광객 유치는 꿈도 꾸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슬로시티의 핵심 정신이 바로 개발과 성장에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슬로시티는 지역 사회 주민의 삶의 질과 행복지수 향상을 목표로 하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방문자를 30~50%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슬로시티를 색다른 관광 상품으로 여기는 데에 선을 긋는 말이다. 그는 지자체가 주도해 급하게 만든 슬로시티는 지역 주민도, 찾는 사람도 불편하게 만들 것이라 생각한다. 사는 사람이 행복해야 방문자도 행복하지, 지자체가 방문자의 행복을 만들어줄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손 교수가 생각하는 슬로시티는 사는 사람들이 행복한 도시다. 행복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지켜 나가는 자세가 기본이다. 그래서 슬로시티연맹은 슬로시티를 지정할 때 음식·자연·문화유산과 예술 같은 종합적 측면을 평가 요소로 살펴본다. 손 교수는 “술·떡, 다방이나 마당 같은 옛 건물 등 삶에 밀착된 것이 바로 슬로시티 정신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슬로시티의 본원지인 유럽식 생활을 모방해서도 절대 안 됩니다”라고 강조했다. 역설 셋. 강남 한복판에 한국슬로시티본부 있다 한국에는 전남 담양·신안·장흥·완도 및 경남 하동, 충남 예산 등 총 6곳이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인구 5만 명 이내의 작은 지역이다. 최근에는 슬로시티 정신과 철학을 따르는 협력도시와 기업도 새로 만들어졌다. 현재 한국에선 6군데의 슬로시티에 이어 부산이 협력도시로, 태평염전이 협력기업으로 선정됐다. 손 교수는 전북 전주 한옥마을과 경기도 남양주 조안리는 슬로시티에, 매일유업이 협력기업에 지원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의 정체성·고유문화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 가운데 남양주가 슬로시티에 지원한 점이 눈길을 끈다. 한국 유기농의 본고장인 남양주는 최근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시작하면서 유기농 단지가 사라지고 있는 지역이다. 이에 대해 손 교수는 “남양주의 슬로시티 추진은 유기농 단지가 사라질 예정이어서 추진 명분이 약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린벨트로 지정된 조안면이 수도권 개발 억제 지구로 묶여 있기 때문에 수도권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어서 신청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빠름’의 속도감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느림’이 설 자리는 없었다. 손 교수는 한국 사회에 느림의 가치를 처음으로 소개하면서 조화도 강조했다. 느림과 빠름, 농촌과 도시, 삶의 질과 양의 조화가 그것이다. 그런 손 교수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세 가지 간(間)이 좋은 삶이 행복 아닐까요?” 그가 말하는 세 가지의 간이란 시간·인간·공간을 말한다.
시간은 사람을 부리지 않고 자유롭게 즐길 수 있어야 하고, 인간은 관계와 도리가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삶의 터전인 공간은 오염으로부터 파괴되지 않아야 비로소 인간이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느림의 전도사로 자처하고 있는 손 교수의 연구실이자 한국슬로시티본부는 역설적이게도 서울 강남 한복판 초고층 빌딩의 13층에 위치해 있다.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슬로시티의 정신에 반하는 거 아니냐고 기자가 농담 삼아 묻자, 손 교수는 껄껄 웃으며 “안 그래도 올해 안에 사무실을 옮길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 서울시 북촌 한옥마을과 슬로시티 지정을 신청한 남양주 중 한 곳으로 이전할 생각이다. 손 교수는 이왕이면 남양주가 슬로시티로 선정돼 본부를 이전했으면 좋겠단다. “한국의 여러 지역에서 슬로시티가 지정되면서면서부터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많은 분들이 낯설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인은 배우고 학습하는 게 빠르기 때문에 슬로시티도 빨리 자리 잡으리라 믿습니다.” 국제슬로시티연맹, 한옥마을-염전 방문 9월 26일을 ‘세계 치따슬로 선데이’로 정해 지난 6월 26일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2010 국제슬로시티 시장 총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이번 총회는 세계적 마케팅 연출자 크리스티안 미쿤다의 '제3의 공간'을 주제로 한 기조연설, 슬로시티 창안자인 파울로 사투르니니의 강연, 한국 기업의 슬로시티 협력사례 발표 등으로 진행됐다. 국제슬로시티연맹 관계자들은 총회 개최에 앞서 23일 슬로시티 가입을 신청한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을 찾아 현장 실사를 벌였다. 연맹의 기안 루카 마르코니 회장과 한국슬로시티본부 손대현 위원장 등 관계자 10여 명은 이날 한옥마을의 전통술박물관과 전통한지원·공예품전시관·경기전 등을 둘러봤다. 이들은 현장에서 막걸리와 합죽선·비빔밥 등을 직접 만들어보며 전주의 전통문화를 느끼는 시간도 가졌다. 실사단은 27일 전남 신안 증도도 방문했다. 이들은 신안 증도에서 국제 슬로시티 협력 다짐 손도장 찍기, 갯벌·명품 천일염 체험, 도립국악단 공연, 어울림 한마당(강강술래) 등을 둘러보며 마을 주민들과도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이어 28일에는 담양 창평 전통가옥에서 대통밥에 기순도 전통 장류로 만들어진 죽순회·버섯탕수육·장아찌 등 37가지의 다채로운 남도 슬로푸드를 맛본 뒤, 경남 하동으로 이동해 쌍계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번 행사는 ▲느림 여행 ▲행복포럼 ▲템플스테이 ▲제철 음식 ▲한방 ▲한옥 ▲한복 ▲국악 등 8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슬로시티의 현황과 전망을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손대현 교수는 “이번 한국 총회는 8가지 테마를 중심으로 창조적인 슬로시티 코리아를 알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며 “한국 전통문화의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대회의 가장 큰 수확 중 하나는 일본과 중국이 가입을 약속한 것”이라고 했다. 이번에 슬로시티 가입을 신청한 전주 한옥마을과 남양주 조안면의 가입 여부는 오는 11월에 발표된다. 한편, 국제슬로시티연맹은 오는 9월 26일을 ‘치따슬로 선데이’로 정하고 전 세계 슬로시티가 참여하는 축제를 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