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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시선]연평도 이후, 우리는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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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200-201호 편집팀⁄ 2010.12.20 14:37:22

글·윤영상 (ysangyn@naver.com) 지난 달 연평도에서 있었던 최악의 군사 도발사건은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합니다. 참으로 끔찍하고 경악할 만했던 이 사건의 직접적인 책임은 분명 북한 지도부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직접적 책임이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라고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방법이 어떻게 될지 미지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예견처럼 북한 붕괴, 혹은 통일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안보 문제와 더불어 생각해야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도덕과 통일 준비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행해야 할지 오랜 과거 역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지금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 이스라엘은 오래 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번 연평도 사건과 유사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뒤따르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 종교적인 부분을 떠나 사회적인 측면에서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당시 기브아, 라마, 벧아웬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경계에 위치한 곳, 한국의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5도와 비슷한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에 울린 뿔나팔은 전쟁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사이에 이처럼 전쟁과 영토 분쟁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묘사에서 실제로 영토를 침범한 것은 남유다였습니다. 그러나 전체적 맥락에서 보면 이 기록은 양 국가 모두가 스스로의 죄악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쓰인 것입니다. 양 국가 모두 도덕적 책임을 통감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율법은 지계표를 옮기는 행위가 타인의 땅을 불법적으로 취하려는 도둑질과 같다고 하여 그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기록의 남유다나 지금 우리나, 자신의 소유를 위해 다른 사람의 재산을 침해하고 법을 어기며, 질서를 업신여기고 있었습니다. 또한 기록의 북이스라엘처럼 북한은 지금도 우상을 쫓아 헛된 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위 기록은 죄를 지은 백성들에게 징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북한 붕괴, 혹은 통일이 되었을 때,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가 그곳에 정착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도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 역시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위 글이 기록된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도 개인적 쇄신과 더불어 사회적 쇄신이 요구됐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의 대규모 경제 체제 일부에 속해 경제 협력을 통한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경제 성장은 기형적인 사회 구조를 초래했습니다. '평등적 위기분산 방식'의 사회구조는 ‘부익부 빈익빈’의 불평등한 사회 구조로 변해갔습니다. 국가 관료들은 경제 성장 속에서 경제적 잉여분을 독차지해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했고 곤궁한 대다수의 농민들은 삶의 기반인 토지까지 몰수당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상황과 유사합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한, 회칠한 무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풍요는 죄악에 둔감하게 만드는 ‘위험한 달란트’라고 합니다. 상황이 낙관적이지만은 않습니다. 통일 뒤에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서툰, 비숙련-비전문 노동자들이 몰려들어 사회적 불평등이 더욱 심화될 것이 자명합니다. 특정 사회 체제나 경제 체제가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북한이 지난 수년간 시장 경제를 시범적으로 일부 혼용하면서 부의 불균형적 축적과 황금만능주의, 성적 타락을 초래했던 일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도는 무질서 견제하는 보조수단 될 수 있어도 인간의 근본적 이기심에 해결책은 아니다. 탐욕이 있는 한 체제는 건강히 유지될 수 없다. 다시 한 번 역사를 돌아봅니다. 중세 이전의 서구 사회는 교회와 매우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매우 부패했고, 종교의 이름을 팔아 백성들을 착취했고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이후에도 그 여파는 남아 있었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자유의지에 반하는 것이었고, 결국 이러한 일촉즉발의 상황이 프랑스혁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고, 경제적으로는 자유방임주의라는 경제 체제를 출현시켰습니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련의 과정들이 긍정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네덜란드의 수상이었던 아브라함 카이퍼는 프랑스 혁명이 사회의 유기적 결합을 방해해 사회관계를 깨뜨림으로써 개인의 만족을 추구하는 이기적이고 일차원적인 인간을 양성해내는 사건이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극단적 자유지향적 혁명은 ‘삶을 위한 투쟁’이 곧 ‘물질을 위한 투쟁’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켰다고 보았습니다. 표현이 과도하다는 측면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는 분명 오늘날 우리 사회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악습이자 악행입니다. 카이퍼는 이러한 병폐를 깨뜨릴 사회 개선을 위해 사회주의적 노선을 따를 것을 주장했지만, 오늘날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옹호할 수는 없습니다. 카이퍼가 말하는 ‘사회’란 ‘살아있는 유기체’였지만, 오늘날 사회주의 국가에서 이런 이상이 실현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세상 속에서 구성원 각자가 진리적 토대와 전문성 위에서 소명의식을 갖고 국가를 견제할 수 있어야 하지만, 사회주의 국가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경제사를 살펴보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결국 도태될 것이며 노동자 계급이 역사의 새로운 동력으로 떠오를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실제로는 구소련과 중국이 기존 사회주의 노선을 대폭 수정한 것을 보면, 사회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대안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제도가 인간의 근본적인 죄성으로 인한 무질서를 견제할 수 있는 보조수단이 될 수는 있어도 제도가 인간의 근본적인 이기심을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건데, 사회주의나 자본주의에서나 한계와 모순의 원인은 모두 인간의 탐욕에서 나왔습니다. 양 체제 모두에서 사람들은 적게 땀 흘리고 많은 부를 가져가고자 했으므로, 체제가 건강히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사회주의에서는 무임승차 현상이 일어나 먹을 빵이 부족해졌고, 자본주의에서는 빵을 되팔고 매점매석해서 빵을 독차지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위에 기록된 이스라엘은 자신의 기름진 배를 채우는 데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심판 앞에 놓인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번영할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그들은 무성한 포도나무처럼 많은 수확을 통해 인간의 탐욕을 채우려 했지만, 그것은 스스로 자멸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현실의 고통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죄악스런 이기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타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굶주린 이웃에 대한 사랑, 소외된 삶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사회 제도의 한계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번 연평도 사건으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통일 이후의 세대를 지혜롭게 준비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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