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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준희의 메디컬 40년 에세이]핏대 후배 잡아준 ‘멘토’ 교수

한번이라도 멘토 만났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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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26호 박현준⁄ 2011.06.13 13:59:59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 요즘 ‘멘토’란 말을 많이 쓰지만, 이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된 단어다. 오디세이가 트로이 전쟁에 나가면서 그의 친구 멘토에게 아들을 맡긴다. 오디세이가 돌아오기까지 10년 동안 멘토는 왕자의 스승으로, 아버지로, 때로는 친구도 돼 주며 왕자를 이끈다. 그 후 멘토는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사람들은 멘토 같은 사람을 진정한 스승이라고 말해 왔다. 지식만 전해주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나를 이끌어준 사람,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사람 특유의 체취를 항상 생각나게 하는 사람. 멘토 같은 사람이 지금 있거나 과거에 있었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내가 전공의를 지원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필자에 대한 의사로서의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학교 다닐 때 성적이 나쁜 것은 그렇다 쳐도 학생 때 폭력을 가끔 썼던 일까지 알려져 전공의로 진입하는 데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때 나를 맡아주신 교수님이 계셨다. 교수님의 환자를 돌보며 아침저녁으로 회진을 도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토요일은 낮 12시가 회진 시간이어서 대부분 전공의들은 회진을 돌고 나서 점심을 먹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나를 맡으신 교수님은 회진 도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때는 토요일 4시나 5시에 나오시기도 했다. 나는 점심을 먹지 못하고 기다리다가 회진을 보조했다. 평일 밤 9시경에 회진을 도는 날도 자주 있었다. 한 번은 교수님이 우리 병원 교수의 갓 태어난 아이를 나에게 맡기시면서 “전에 태어난 두 아이가 출산 뒤 2주경에 모두 사망했다”며 “이 아이는 반드시 살려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매일 저녁 아이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2주쯤 됐을 때 부정맥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한 대처를 했고, 운이 좋았는지 그 아이는 살아서 퇴원을 했다. 그 때가 내가 의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뿌듯하고 보람찬 순간이었다고 기억된다. 몇 달이 지나서 그 교수님 부서를 떠날 때 내게 저녁을 사주면서 하시던 말씀. “그렇게 하면 돼.” 내게 의사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멘토링 해주신 첫 번째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잊을 수 없는 분이 계신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홍필훈 교수님. 나는 전공의 4년차 때 홍 교수님을 처음 뵀다. 홍 교수님은 오랜 미국 생활을 마치시고 우리 병원 흉부 외과로 복귀하셨는데, 소아 심장학 담당 교수가 미국에 연수를 가 있어서 내가 소아 심장 진단을 전담하고 있을 때였다. 전문의 시험도 아랑곳 않고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신 홍 교수님의 도움으로 나는 교수직에 임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매주 한 번씩 열리는 소아심장 컨퍼런스에 참석할 일이 있었다. 우리 병원은 심장외과의 역사가 소아심장과 역사보다 길었는데 그 영향 때문인지 항상 주도권은 심장외과에 있었다. 그 날 컨퍼런스의 중요 의제는 수술 뒤 사망한 환자의 사망 원인 규명이었다. 홍 교수를 비롯한 집도의들은 소아심장과의 진단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며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이 때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다. “이 환자, 제가 심도자 검사를 하고 진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검은 해보셨습니까? 만일 부검을 해서 저의 진단이 잘못됐다면 제가 바로 사표를 내겠습니다. 항상 수술로 환자가 사망하면 진단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증거도 없이 몰아붙이시는데 이해가 안 됩니다. 이거 뭐 검사할 생각이나 나겠습니까?” 하고는 문을 박차고 나와 버렸다. 다음날 홍 교수님의 부름을 받았다. 나는 지금도 그 분의 말씀을 잊지 못한다. 대선배이시면서 유명한 외과 의사이자 호랑이 별명을 가진 교수님이 내게 “증거 없이 소아심장과의 진단을 의심했던 사실에 대해 미안하고 부끄럽게 생각하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연배가 아버님 같은 분이라는 점을 떠나 의료계의 대원로이신 분이 한낱 조교수에게…. 그러고 나서 하시는 말씀. “그렇다고 문을 박차고 나가면 안 되지. 그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토의해 해결할 문제 아닌가?” 내 인생의 멘토이신 홍 교수님이 퇴직하시고 하와이에 정착하신 뒤에 하와이군도의 카와이 섬으로 가족들과 함께 찾아뵀을 때 반가워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폭력 오리엔테이션 부활시킬까 의대 선후배 사이, 서슬 퍼랬는데… 대학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대한 기사를 본 일이 있다. 술판을 벌이다가 술을 못하는 학생이 술을 억지로 마신 뒤 사망한 이야기였다. 군대나 경찰이나 학교나 미리 들어온 선배들이 기득권을 행사하며 규율을 잡는 방법이라고나 할까? 필자가 의대에 다니던 시절에 우리 의대에도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는데 그야말로 호된 신고식이라고 표현할 만 했다.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으로,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아 매를 치곤하는 것이 오리엔테이션의 내용이었다. 대개 두 학년 위의 선배가 주도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우리가 본과 1학년 때는 당연히 3학년이 담당을 했다. 1학년 전원을 강당에 모이게 한 뒤 일장 연설이 시작된다. “이 의료원 안에서 가운 입은 사람들 중에서 너희가 가장 쫄짜니까 가운 입은 사람을 보면 무조건 인사를 해라”로 연설은 시작됐다. 그러고 나서 여학생들(우리 학년엔 4명)은 나가라고 한 뒤 본격적인 시비(?)가 시작됐다. 당시 연세대학교는 단과대학마다 학생 배지에 구분이 돼 있었다. 바탕은 같지만 예를 들면 이과대학은 ‘이’, 상대는 ‘상’, 의대는 ‘의’자가 가운데 새겨져 있었다. 의예과는 이과대 소속이여서 ‘이’ 자 배지를 달고 다녔다. 그런데 의예과생들 많은 숫자가 ‘이’자 대신 ‘의’자 배지를 달고 다녔다. “이 중에서 작년에 ‘의’ 자 배지 달고 지나가다가 주의 받은 놈들 나와.” 누가 선뜻 나서겠는가? 그러자 한 친구를 지목하며 “너 아니야? 이리 나와!” 그리고 야구 배트를 엉덩이에 두드린다. “다음은 너! 우리가 규율을 잡는 게 못마땅하냐?”라고 묻고는 그 학생이 “아닙니다. 당연하신 처사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자 이어 “야! 너 아부하냐?”며 또 몽둥이질. “다음.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네. 잘못이 확실히 있는 경우에만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 이놈이 반발하네.” 그리고 몽둥이…. 이런 오리엔테이션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서너 번 계속된다. 그런데 이를 참지 못한 한 학생이 집에 가서 이야기했고 신문사 간부였던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와 항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잘 먹히지 않자 그 아버지는 “언론에 공개하고 고소까지 하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그러자 당시 학생지도를 맡던 교수님이 “마음대로 하시오. 우리는 이것이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의사 사회에서는 명령을 지키지 못하면 생명에 지장을 주는 일도 있으니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이보다 더 심한 제재도 있었는데 아무 불만도 없이 잘 돼 가고 있소. 학생들 일에 부모가 나서는 경우도 처음이요”라며 일축해버린 사건도 있었다. 그 뒤 몇 년간 지속되다가 없어졌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시절 이야기만 나오면 선후배 간에도 웃고 즐거운 안주거리가 된다. 요사이 젊은 의사들은 자신을 가르친 교수에게도 인사를 잘 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으니 어느 친구의 말대로 “그때 그 식의 오리엔테이션을 부활시켜야 할까봐”도 말이 되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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