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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준희 교수의 메디컬 40년 에세이]가족을 버리는 병, 가족이 떠나는 병

스스로에게 저주 내리는 마약부터 처절한 루게릭병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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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52호 박현준⁄ 2011.12.12 14:44:20

근래 우리나라에서도 연예인 등 일부가 마약 복용으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또 이들을 단속하는 전담기관과 공항을 비롯한 입국 지역에서는 마약 탐지견까지 동원해 마약밀수범을 색출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멕시코를 비롯한 남미에서 들어오는 마약을 마약 단속국(DEA)이 결사적으로 막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심지어 의사들도 “마약을 하다가 끊어버리면 그만이지 왜 야단들인지 모른다”고 한다. 의학 교과서에 마약은 악마가 인간에게 내린 최고의 저주라고 쓰여 있다. 그 이유로 마약에 중독된 사람은 그가 움직일 수 있는 한 마약을 끊을 수 없으며 마약을 시작하면 그 용량이 자꾸 증가하게 되고, 마침내는 뇌를 비롯한 전신에 이상이 오면서 사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마약을 할까? 마약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 중 최고의 편안함, 안락함, 심지어는 책에 쓰여 있듯이 구름에 떠서 ‘승천 입지’하는 기분이 들게 해준다는 것이다. 내가 전공의 시절 한 동료가 갑자기 심한 복통으로 입원했다. 의사가 입원하니 “빨리 진통제(데메롤 성분으로 마약의 일종)를 놔 주라”는 성화에 주사를 1대만 놔야 할 것을 3대를 놨다. 그 친구, 편안하게 잠이 들었는데 깨어났을 때 물어보니 데메롤 주사를 맞고 난 뒤 통증은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그렇게 기분이 편안하고 좋더라고 말한다.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마약을 구하기가 매우 쉬웠다. 의료용으로 쓰는 데메롤이나 모르핀 등은 신청하기만 하면 보건소에서 개인병원으로 지급이 됐다. 따라서 이 주사를 맞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 중 의사들이 이 주사를 맞고 중독된 경우가 꽤 있었다. 그 중 한 분의 예를 들어보자. 종합병원 마취과 의사였던 A씨는 고질적인 어깨 통증과 스트레스로 데메롤을 맞기 시작해 중독이 됐고 모르핀으로 옮겨 갔다. 이를 안 동료 의사가 그에게 모르핀을 끊을 것을 권유해 독방에 입원까지 시켜봤지만 끊겠다고 다짐하고는 다시 시작하는 일이 반복됐다. 결국 그는 당시 서대문 형무소 의사에 부탁해 수감까지 됐다. “다시는 마약을 하지 않겠다”고 울며 간청하는 그를 지방의 병원으로 전출시켜 근무하게 했지만 그는 끝내 자살로 인생의 막을 내렸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과거의 괴로웠던 심정을 새삼 느낀다. 나는 마약에 대해 많은 공부를 했으며, 심지어는 미국 마약국의 소식지까지도 읽은 적이 있다.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마약에 중독됐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쾌락을 준다는 마약. 한번 빠지면 점점 용량을 늘려나가야 하고, 약을 끊으면 ‘지옥에 간 사람‘처럼 돼. 마약에 대한 국민교육 필요하다 마약에 중독되면 마약을 제 시간에 못하는 경우 마약을 맞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중국의 예를 보면 양귀비에서 시작돼 더 큰 마약으로 옮겨가면 집도 팔고 심지어 부인까지도 팔아서 마약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로 병원에서 쓰는 마약의 예를 보자(병원에서 마약은 말기 암 환자 등의 통증을 없애는 데 주로 쓴다). 데메롤에서 모르핀으로 가게 되면 처음에는 하루 1대나 2대 정도 맞게 되지만 몇 차 그 횟수가 증가해 심한 경우는 30분마다 마약을 맞아야 하는 지경까지 간다. 영화에서 팔이나 다리에 주사를 하도 많이 맞아 주사를 놓을 곳이 없는 사람의 모습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 마약을 못하면 이성을 완전히 잃게 된다. 나도 마약을 끊자는 동의를 구하고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마약 주사를 맞지 않고 10여 시간이 지나자 근육이 튄다는 느낌이 온다며 당사자가 펄쩍 뛰기 시작했다. 진정시키려 했지만 벽에 부딪치고,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하고, 욕을 하고…. 그야말로 지옥에 있는 사람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24시간 후 잠이 들었는데 몸의 열이 40도까지 올라갔다. 4~5일 후 깨어나서 멍한 사람으로 변했다(우울증의 시기). 그러나 결국 몇 달 가지 않아 다시 약을 맞기 시작했고 2년 뒤 사망했다. 나는 살아가면서 이것을 안타깝지만 내가 받은 큰 교훈으로 느낀다. 왜 마약이 무서운지를 몸소 느끼고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매스컴이나 마약 단속국은 모든 사람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마약의 의미를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 미국 마약단속국의 부국장이 남미에서 오는 마약을 무섭게 단속하자 마약을 거래하는 사람들이 이 부국장을 잡아서 가두고 그에게 마약을 1개월 동안 주입한 뒤 풀어줬다. 마약의 무서움을 잘 아는 부국장은 단속국에 이야기해 창문이 없는 지하실에 다치지 않게 벽을 스펀지로 싸게 하고, 음식과 물은 호수 등으로 자동 공급받게 하면서 자신을 그 속에 가둔 뒤 3개월 뒤 풀어줄 것을 요청한다. 3개월 뒤 그는 밖으로 나왔으나 결국 자살을 택한다.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악마의 저주를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젊은이에게 왜 이런 시련을? 부인이 남편 버리고 떠나게 되는 루게릭병 세상에는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희귀한 병이 제법 많다. 암에 대해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라며 공포를 갖는다면, 어떤 질환들은 환자들이 차라리 죽었으면 싶은데도 모진 생명 스스로 끊기 힘들어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수하는 경우가 있다. 루게릭병. 1930년대 미국 야구의 명문 뉴욕 양키스의 선수였던 루게릭이 이 병에 걸리면서 그의 이름을 땄다. 이 병은 뇌간과 척수 사이에 있는 하운동 신경원 세포와 대뇌피질 상운동 신경계에 이상이 생기며, 점차 운동 신경이 마비되면서 대개 5년 전후로 사망한다. 그러나 감각 신경에 이상은 없으며, 의식도 명료하고, 안구 운동도 정상이며, 배변과 배뇨 장애도 없다. 의식은 명료한데 심해지면 누워서 꼼짝을 못한다. 감각 신경은 정상이어서 가려움이나 아픔, 결림 등을 수시로 느끼지만 표현을 못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니 그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내가 연세대학교 농구 부장 시절이 끝나갈 무렵 당시 최희암 감독이 프로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 코치로 임명된 사람 중에 몇 년간 미국에서 연수를 하고 돌아온 전 연세대 농구 선수가 있었다. 나는 자주 그 프로팀에 가곤 했는데 그 코치는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그의 부인은 자주 농구장에 나와서 남편과 함께 있곤 해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농구장을 정리하던 그가 힘없이 쓰러졌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동작이 느려지고 자주 물건을 떨어뜨리게 되자 대학병원을 찾았고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 부인이 부축을 해가면서 농구장에 매일 출근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움직이기 힘들어지자 그는 코치 직을 사임하고 집에 누워 있게 됐다. 그때까지도 부인이 옆에 붙어서 정성껏 간호해주고 있었다. 루게릭병 걸리면 정신은 멀쩡한데 사지를 움직일 수 없게 돼 도움이 필요하지만 한국에는 관련 시설이 없어. 종교기관이 돕기도 하지만… 마약 환자는 자신이 부인을 비롯한 가족을 버리지만 루게릭병은 가족이 환자를 버린다고 한다. 이전에도 다른 루게릭병 환자를 본 적이 있는데, 그의 부인이 약 3년 동안 간호를 하다가 집을 나갔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함께 해야 하는지 도저히 감당이 안 됐기 때문이란다. 이 코치의 부인도 결국 떠났다. 그래서 나는 루게릭병 환자를 돌보는 시설이 거의 없는 우리나라에서 그가 어떻게 남은 생을 살아갈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가 다니던 교회에서 젊은 여성이 부인도 마다한 일을 옆에서 정성껏 간호한다는 말을 듣고 신앙심이 얼마나 크나큰 희생 봉사 정신을 가져다주는지 새삼 느꼈다. 그러나 “하나님, 당신의 힘이 이 불쌍한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 있긴 하지만 왜 이런 시련을 하필 이 착하고 성실한 젊은이에게 주신 겁니까?”라고 묻고 싶다. -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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