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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세손과 애틋사랑 얽힌 화랑계 “산 역사”

영친왕 아들 이구가 직접 설계한 건물 등에서 40년 역사 이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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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58호 왕진오⁄ 2012.01.25 14:05:41

경복궁 돌담길 고즈넉한 도로에 단아한 빨간 벽돌 건물이 있다. 무심한 사람이라도 첫눈에 예사롭지 않은 문화공간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건물이 조선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가 직접 설계하고 지은 건물이라니…. 이곳은 한국 화랑계의 1세대 대모인 고 유위진(2010년 8월 작고) 회장이 1977년 자신의 진화랑을 기존의 사간동에서 이곳 통의동으로 옮기면서 지은 건물이다. 진화랑은 1972년 10월 서울에서 개관했다. 올해로 개관 40주년을 맞은 진화랑은 그간 김환기, 남관 등 대표적인 현대 미술가의 작품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아온 한국 화랑계의 저력있는 화랑이다. 고 유위진 회장은 1931년 경남 양산의 유복한 집안에 7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이화여대 음악학과에서 공부했고 시를 잘 쓴 문학소녀로 알려진 그녀는 “여자도 전문 분야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문화계 인사들과 교우하면서 다양한 분야로 진출을 모색했다. 그리고 마지막 선택한 길은 그림을 사고파는 화랑이었다.

유 회장에게는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 이구(李玖. 1931~2005년)와의 러브 스토리다. 이구는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서 태어난 비운의 황세손이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장성한 이구는 독일계 미국인 여성과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건축학을 공부했으나 자녀가 없었다. 해방 뒤 한국을 드나들던 이구 씨의 통역을 유위진 씨가 맡았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8년 정도 내연 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미술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구는 유위진을 ‘진’이라고 불렀고, 유 회장의 화랑 이름도 진화랑이 되었다. 진화랑의 설계와 유 회장의 청운동 자택을 설계한 이가 바로 이구였다. 당시 비원에 거주하던 이방자 여사는 두 사람의 실질 관계를 인정했고, 방한하는 일본 주요 인사들에게 진화랑을 소개했다고 한다. 진화랑이 많은 작품을 일본인에게 판매할 수 있었던 루트였다.

일본인 컬렉터와의 만남은 진화랑이 도약하는 발판이 됐다. 소장품 판매로 얻은 자금을 토대로 현재의 진아트센터가 1991년에 추가로 개관했다. 유 회장이 한창 활동하고 이방자 여사가 서울에 거주할 때 미국의 뱅크오브아메리카 회장과 삼성가를 포함해 많은 대기업 관계자들이 진화랑과 작품 거래를 했다는 것은 화랑가의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다. 황세손 이구가 ‘진’이라 부르는 그대로 그녀의 화랑은 진화랑이 됐고, 이방자 여사는 일본 컬렉터 등을 적극 소개해 한국 미술을 해외에 알리는 데 도움을 줘… 진화랑이 처음 자리잡은 곳은 1972년 10월 서울 사간동의 현재 금호미술관 옆 법련사 자리였다. 이 지역에서 화랑을 운영한 것은 진화랑이 유일했다. 유 회장은 처음 하는 문화 사업인지라 힘들었지만 매번 전시에 열정을 기울였다. 그러나 당시는 한국 정치사에 큰 혼란기이기도 했다. 미술 전시에도 공안 당국의 제제가 따라다니던 때라 유 회장은 박서보 작가를 통해 종로경찰서의 협조를 구하는 한편으로 당시 육영수 여사에게 초청장을 보내고 나서야 작가들이 함께 모이는 전시회를 열 수 있었다. 1973년에는 현대 한국 작가전을 일본에서 개최하면서 이방자 여사의 소개로 일본 일동화랑 대표를 만났고, 이는 일본 진출의 새로운 돌파구가 됐다. 이후 진화랑은 일본에서 대규모 전시를 개최하게 된다. 당시 진화랑의 전시에는 일본 정부 관계자와 도쿄대학-게이오대학 등 명문대 교수진이 대거 찾아올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화랑을 열기 이전부터 이들과 맺은 인연으로 유 회장은 김환기, 박수근, 청전, 운보 등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의 작품을 시가보다 10배 이상 비싼 값에 판매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일본 전시를 진행한 뒤 유 회장은 일본 후지TV 갤러리에서 진행되던 일본 작가 쿠사마의 전시회를 관람하면서 그의 작품 몇 점을 구입했고, 이 때 맺어진 쿠사마와의 인연은 그녀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어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최고 화가 중 하나인 이우환과의 인연은 프랑스의 아트페어 ‘Fiac 84’에 당시 한국 미술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이우환의 작품을 갖고 참가하면서부터였다. 당시 프랑스 퐁피두 미술관 주최의 ‘칸딘스키의 밤’ 행사에서 모든 음식에 칸딘스키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본 유 회장은 자신이 가지고 간 작품 중 단 하나라도 퐁피두가 소장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게 됐다. 이어 1986년 유 회장은 이우환의 집에서 구입한 작품을 프랑스 퐁피두 미술관에 팔았고, 국내 작가 중 최초로 이우환의 수채화 전시회가 퐁피두에서 열리는 계기를 만들었다. 1984년 프랑스 FIAC 아트페어에 참가하려는 진화랑에 주최측이 “참가비 탓에 힘들다”고 통보하자 유 회장은 바로 파리로 날아가 “더 크게 빌리겠다”며 담판을 짓고… FIAC 84에 참여를 할 당시 진화랑은 작가 월전의 매화, 장미, 일본 작가 미아나마 다케시코의 작품 등을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에게 팔아 마련한 대금을 갖고 어렵게 참가했다. 생전의 유 회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통신시설이 요즘처럼 발달하지 않았어요. 주최 측에서 보낸 텔렉스에 ‘한국의 참가가 어렵다’는 문구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바로 파리로 날아가 담판을 지었어요. 주최 측은 참가비를 이유로 난색을 표했지만 나는 ‘원래 예약한 공간보다 더 큰 공간을 임대할 수 있다’고 장담하며 8천 달러에 계약을 마쳤지요”라고 말했다. 당시 외국 미술계가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읽을 수 있는 일화다.

이처럼 어렵게 마련한 자리에 그녀는 이우환, 류경택, 남관, 황주리, 오세열 작가 등과 함께 참여했고, 전시 기간 중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과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 등과 인연을 맺었다. 한국 미술계가 해외 미술시장에 거의 눈을 돌리지 못했던 시기에 유 회장은 프랑스, 일본 등의 국제 아트페어에 단독으로 참가하면서 한국 미술의 입지를 구축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해외 활동에 힘입어 한국 작품들이 세계적으로 알려질 수 있었고, 퐁피두미술관이 한국 화가 작품을 구입하면서 한국 미술의 세계화가 시작됐다. 생전에 유 회장은 “화랑의 행보를 외부에 굳이 알리고 싶지는 않아요, 작가들이 자연스럽게 발전할 수 있도록 묵묵히 초석을 깔아주는 게 화랑의 역할 같아요. 작가를 발굴하면 나는 그들을 붙잡아 두기보다는 날개를 달아주고 싶었고, 더 좋은 환경에서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라고 술회했다. 유 회장은 40년간 화랑을 운영하면서 화랑에 들어오는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그 사람의 연륜과 컬렉션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정과 신의가 있으면 어려운 시기에도 성공의 계기가 될 수 있어요”라며 인간관계를 중시했다. 유 회장의 이런 자세는 지금의 진화랑에서도 확인된다. 진화랑이 21세기 한국 미술의 세계화를 선도하는 화랑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태프의 모습에서 유 회장의 발자취가 느껴지는 이유다. 2005년 7월 16일 일본 도쿄의 모텔에서 그녀의 영원한 연인이던 이구 씨가 숨진 채로 발견된 이후 유 회장은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2010년 8월 2일 오후 2시 55분 향년 79세의 나이로 ‘영원한 화랑가의 현역’ 생활을 마감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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