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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준희 교수의 메디컬 40년 에세이]호랑이 은사 고 홍필훈 교수님을 회고하며

학문·후배 아끼고 죽음에 초연했던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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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92호 박현준⁄ 2012.09.17 11:39:32

소아과 전공의 4년차 시절 심장 담당 교수님이 독일로 유학을 떠나시는 관계로 내가 직접 환자를 담당하고 심장 검사를 하게 됐다. 그런데 그 해에 미국에서 흉부외과학을 전공하신 홍필훈 교수님이 귀국해 우리 병원에 교수로 돌아오셨다. 소문이 무성했다. 학문적으로 매우 학식이 높으실 뿐 아니라, 잘못된 지식이나 의사로서의 지식을 못 갖춘 사람에겐 가차 없이 혼을 내는 무서운 분으로, 과거 우리 병원에 계셨을 때 내과 교수 한 분은 하도 혼이 나서 얼굴에 경련까지 생겼다는 것이었다. 홍 교수님은 응급환자가 내원해 수술방에 환자를 데리고 가셨는데 늦은 시간이라 수술방 문이 잠겨 있자 응급 환자 앞에서 “왜 문을 안 열어 놨느냐”며 발로 문을 차서 열고 들어가셨다는 일화도 유명했다. 그 해 12월 마침 일본 심장혈관센터의 외과 교수가 방한했는데 그 분과 함께 수술할 환자들에 대해 정확하게 심장검사를 준비해 놓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때가 전문의 시험 공부 과정이었지만 나는 병원에 나와 환자를 검사하고 회의에서 환자의 상태를 설명했다. 1월 초 수술을 잘 마치고 일본 의사는 돌아갔고 나는 전문의 시험이 끝나고 병원으로 일단 돌아왔다. 전공의가 끝나면 이제 떠나야 할 입장이었다. 당시는 소아과에서 교수 요원을 뽑을 수 있는 상황이 안 됐기 때문이다. 불가능했던 교수 자리에 오르게 된 사연 그런데 복도에서 우연히 홍 교수님을 뵙게 됐는데 교수님이 다음번에 수술할 환자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저는 이제 전공의를 마치고 나가야 한다”고 말씀드렸더니, “그래? 나는 자네가 전임강사인줄 알았어. 아니, 다른 4년차들은 전공의 시험공부 한다고 병원에 나오지 않았는데 자네는 끝까지 일을 해서 말이야” 하시면서 “왜 여기 교수 요원으로 남아야 하지 않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소아과의 사정을 말씀드렸고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냥 지나치셨다. 그리고 며칠 후 만나자는 연락이 홍 교수님으로부터 왔다. 교수님이 학장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셔 나는 전임강사가 될 수 있었다. 심장 컨퍼런스는 주로 심장수술을 위해 검사한 환자에 대해 수술 방법과 이미 수술한 환자들의 결과-예후 등을 토의하는 시간으로, 매주 한 번씩 소아과-심장외과 합동으로 열렸다. 홍 교수님이 오신 후에는 컨퍼런스 분위기가 더욱 살벌했다. 질문에 하나라도 대답을 못하면 “수술할 자격이 없다며 다른 교수가 수술하라”고 질책하셨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수술 후에 환자가 사망했는데, 그 원인이 소아심장과에서 진단을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질책이 나왔다. 홍 교수님을 비롯한 외과 교수들이 소아심장과를 질타했다. 나는 이에 대해 “그 환자의 진단을 제가 했습니다. 부검을 해보시고 진단 잘못을 지적하시는 겁니까? 만일 진단이 잘못되었다면 제가 사표를 내겠습니다. 왜 매번 수술이 잘못되면 진단 잘못 때문이라고 하는 겁니까, 확실한 증거도 없이” 하고 방을 나와 버렸다. 다음날 홍 교수님이 나를 부르셨다. “내가 큰 실수를 했어, 근거 없이 진단의 문제를 거론했으니 내가 사과하네.” 나의 아버님 같은 연세이시고 또 모든 의사들에게 존경 받는 분이 나 같은 제자에게 사과하는 말씀을 듣고, ‘학문 세계를 제대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라는 생각에 진심으로 존경심을 가지게 됐다.

홍 교수님은 그 후 의료원장에 취임하셨는데 내가 한 번도 찾아뵙지를 않자 나를 부르셨다. 그 자리에서 앞으로 새 세브란스 병원을 건립 추진하시겠다며 설계도를 보여 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교수님은 내게 “내가 의료원장이 됐는데 평이 어때?”하시고 물으셨다. 나는 “다 말씀드려도 됩니까? 다른 교수 분들의 평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저는 선생님이 의료원장을 안하셨으면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선생님이 영원한 학문을 중요시하는 교수님으로 남아 계셨으면 했기 때문입니다”하고 말씀을 드렸다. 그 분의 학문에 대한 열정 물려받아야 홍 교수님이 정년퇴임 하고 하와이에 정착하셨을 때 나는 가족과 함께 카와이 섬에 여행을 갔고, 홍 교수님 부부께 비행기 표와 호텔을 제공해 카와이로 오시게 한 뒤 함께 지낸 일이 있었다. 그때 홍 교수님 말씀. “자네 말대로 의료원장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어. 의료원장 할 때는 그렇게 찾아오던 사람들이 끝나니까 전화 한 통 없더라고. 학문에 전념하는 게 나을 뻔 했어. 그래도 하와이까지 나를 찾아준 자네는 정말 고맙네.” 홍 교수님이 돌아가시기 6개월 전 내가 전화를 드렸는데 “나 자네가 보고 싶어. 빨리 한 번 볼 수 있을까?”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돌아가시기 2개월 전 미국 학회에 가는 길에 홍 교수님을 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얼굴로 반갑게 맞아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홍 교수님의 대한 기억은 많은 의대 교수들 가슴 속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분이 의학을 대하던 그 모습이 후배들에게 그대로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가 미국 간다니 후배들 ‘만세파티’ 나 역시 ‘성질급한 호랑이 선배’였나? 전임강사가 돼 심장학을 본격적으로 전공하게 되자 나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학회 발표 자료도 내가 책임져야 하고, 다른 대학병원과 경쟁도 해야 했기에 평일에는 밤늦게 귀가하고 휴일에도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러니 힘든 건 전공의들이었다. 당시는 현재보다 중한 질환이 많아 응급실은 늘 중환자로 넘쳐났다. 어느 날 아침 응급실의 소아과 영역을 둘러보는데 살펴보니 환자는 많은데 돌보는 의사가 없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이미 전공의를 콜 했는데 회의(매일 아침 일찍 시작하며, 소아과 전체 교수와 전공의들이 모여 환자들의 방사선 사진을 보는 회의)가 끝나야 내려온다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회의실에 올라가서 문을 열자마자 전공의들에게 “여기서 방사선 사진 보고 있으면 환자는 자동으로 치료되냐?”고 소리쳤다. 놀라서 쳐다보는 전공의들에게 “빨리 안 내려가?” 하고 소리를 쳤다. 전공의들이 우르르 나가고 나자 갑작스런 큰 소리에 회의 중이던 소아과 교수들을 비롯한 20~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크게 놀란 건 물론이고 그곳에 계시던 주임교수는 “이 사람아, 나 애 떨어지는 줄 알았다”라시며 어이없다는 듯 웃으셨다. 의사가 환자를 볼 때 “대충”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조그만 실수가 환자의 목숨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거의 없어졌지만 80년대 초만 해도 세균성 뇌막염이 많았다. 이 경우 항생제를 쓰는데 항생제를 쓰면서 척수액 검사를 해 정상이 되면 퇴원시키는 것이 원칙이었다. 한 환자를 치료하고 척수액 검사를 시행한 후 그 날 오후 회진을 가서 그 결과를 물어봤다. 그런데 담당 전공의가 척수액 검사에 실패(잘못해서 척수액에 혈액이 섞이면 판정이 불가능)했는데 야단맞을 것을 우려해 이상이 없다고 내게 말했고 그에 따라 환자가 퇴원했는데 한 열흘이 지나 그 환자가 경련을 일으켜 다시 입원했다. 뇌종양이 생긴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주치의였으니 내 책임인데…(그 후로는 중요한 데이터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교수-전공의 회의 박차고 들어가 고함지르니 그 전공의에게도 책임을 물어 2주일간 당직을 시키고는 한 사나흘이 지나 확인차 휴일에 그 전공의를 불렀는데 나타나지를 않았다. 계속해서 찾았더니 2시간 정도 지나 나타나서는 변명을 하는 것이었다. 당직의사가 얼마나 중요한가? 응급실에 오는 환자, 병실 입원환자를 모두 돌봐야 하는데 이 친구, 벌로 당직을 서고 있음에도 고년차 전공의라고 저년차에게 모두 맡기고 밖으로 나갔던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앞으로 한 달간 더 계속해서 당직을 서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선배 교수가 나를 부르고는 어렵게 말을 꺼내는데, 그 친구에게 너무 과한 벌을 준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전공의는 그 교수와 사돈 관계에 있었다. 나는 그 전공의를 다시 불러서 “앞으로 3개월간 당직을 더 서라. 의사로서 너는 있을 수 없는 잘못을 했는데 전공의를 그만두게 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앞으로는 꾀부리지 말라”고 나무랐다. 내가 미국에 연수를 떠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공의들이 이제 살았다며 파티를 열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내 밑에서 교수를 하다 지금은 개원을 한 친구가 내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 자신이 내 파트의 전공의로 지명이 된 걸 알고는 ‘이제 나는 사망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나의 급한 성격이 전공의를 대하는 데 그대로 나타났고 따라서 내 밑에서 일한 사람들 모두가 숨차게 지냈으리라고 생각된다. 집 사람은 나에게 좀 편안하게 늙어 가라고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변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지금도 나는 생각과 행동이 남보다 한 발짝 빠르며, 맘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쏘는 건 여전하다. 나이가 들어 노년기를 보내는 사람들 중 느긋하고 남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부러운 건 나 혼자뿐일까? -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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