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온다. 요즈음 같이 날씨가 변덕스러운 날에는 봄을 기다리는 기대와 설렘이 가슴에 가득 쌓인다.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면 전시장에 들려 보는 건 어떨까. 갤러리는 영리를 추구하는 곳이지만, 돈이 없어도 눈치를 볼 일 없이 마음껏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다. 특히, 올해 4월은 놓치면 아까운 전시들이 즐비해 우리에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며칠 전 잠깐 시간이 허락되어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강요배 선생님의 전시를 보고 왔다. 제주도의 풍경…. 바닷바람과 거친 파도 그리고 구름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하늘이 두툼한 질감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고, 그림 속 쪽빛 바다, 부서지는 파도, 하늘을 보며 가슴이 뚫리는 시원한 기분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중 5미터가 넘는 대작(大作) ‘물돌’ 앞에 섰을 때 지난 제주도 여행에 대한 나의 소중한 추억이 떠올랐다.
붉은 동백꽃과 해국(海菊)으로 우려낸 차, 해안 길을 따라 검은 현무암이 차곡차곡 쌓인 돌담들 그리고 마을 중앙에 자리한 팽나무, 변덕스러운 날씨, 칠흑 같은 밤에 오로지 혼자가 되어본 시간…. 등 지난 기억들이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나는 제주도로 특별한 여행을 다녀왔다. 이 삼다도 여행은 제주도의 춤꾼 박경숙 선생님의 안내를 받을 수 있어서 내게는 큰 행운이었다. 처음 시작할 때 선생님은 이러한 제안을 해오셨다. "무일푼으로 어디로든 가자." 그리고 “제주도의 바람을 잡아봐라. 손으로 느껴질 것이다. 잘만하면 잡힌다.”는 제안을 받아들여 나는 제주도의 바람을 손안에 잡아보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그때는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춤꾼 박경숙 선생님과 함께하는 각설이 여행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발이 되어줄 선생님의 경차만을 의지한 채 제주도여행을 했다. 그리고 만나는 제주도 구석구석에 거주하는 예술가들을 찾아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밥을 얻어먹었지만, 공짜로 구걸하는 일은 아니었다. 박경숙 선생님은 춤을 추고 나는 그림을 그려서 그 성의에 보답했다. 이런 여행은 처음인지라 어색하고 민망하기까지 했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우리는 천지연폭포, 한라산, 용머리 해안, 촛대바위 등의 제주도 명소를 돌아다녔고 나는 틈틈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바람을 손에 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손에 바람이 잡힐 리 없었다. 오히려 이 숙제는 나에게 의무적인 일로 생각되기까지 이르렀다. 소중한 기억으로 인도하는 그림 문제없이 마무리되어 갈 것 같은 각설이여행은 종달리 해안도로를 달리는 도중에 자동차 휘발유가 떨어져 가면서 위기가 왔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안절부절못했지만, 선생님은 태연했다. 오히려 "풀고 갈 것이 있다." 하시며 차 밖으로 나가 춤추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끝을 가지런히 모으고 새끼손가락을 살짝 편 손을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천 조각을 살며시 잡고 한 발 한 발 옮기며 춤을 이어갔다. 그리고 손끝과 천에 변덕스러운 바닷바람을 온전히 느끼고 타듯이 그렇게 춤을 이어가는 모습에서 내가 보았던 풍경은 오롯이 당신과 바람과 파도 돌들이 하나가 되어 이 모든 것이 자연과 하나가 된 완전함이었다.
당시 나는 작은 것을 일깨울 수 있었는데,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의 소중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 내 모습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작은 깨달음을 추억으로만 간직한 채 잊고 살아가는 내 모습을 ‘물돌’이라는 그림 앞에서 나를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사소한 전시장 나들이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나에겐 가끔 삶의 의미를 찾는 여행이나 작품을 감상하며 생각하는 것이 다를 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완연한 봄이 느껴지는 4월, 인사동에서 삼청동으로 가는 길 곳곳에 열리는 전시장에 가보자. 당신을 당신의 소중한 추억으로 안내하는 작품을 감상할 기회가 열려있다. 선화랑에서는 "신들의 거주지"라는 주제로 히말라야 산맥을 생생한 현장에서 보고 그린 작품으로 최동열 작품전을 열었고, 그리움의 향기로 가득 찬 매화꽃과 물결을 그린 성영록 작가의 "그리움… 아름답게 기억되다." 전시가 곧 그림손 갤러리에서 열려 기대된다. 학고재 갤러리는 강요배 개인전과 갤러리 현대는 오치균의 "감" 전시 등 곳곳에 찾아보면 볼만한 전시들이 열려있으니 꼭 찾아 관람할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소중한 기억으로 인도해 줄 당신만의 그림을 전시장에서 꼭 만나길 바란다. - 김재훈 선화랑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