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긴 이름은 영국 여성 맥마누스(42세)다. 2012년 BBC 등 영국언론은 그녀가 세계기록의 긴 이름으로 개명했다고 보도했다. 그녀는 자선단체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개명했다고 한다. 그녀의 풀네임은 161단어에 이른다. 이름이 길다보니 여권이나 신분증에 다 기입하기도 어렵고, 남편도 아내의 긴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한다. 그런데 군주 중에서 세계최고 긴 이름은 조선에 있다. 문조황제(1809~1830년)다. 역사에 관심이 깊어야 알 수 있는 이름인 문조는 조선 23대 임금인 순조의 아들이다. 효명세자로 봉해진 문조는 스물두 살 청춘에 세상을 뜬다. 그래서 왕위에 오를 수 없었지만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익종으로 추존된다. 헌종 3년인 1837년에는 종묘에 신주가 모셔진다. 또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황제국으로 선언하면서 1899년 황제로 재추존 된다. 임금을 하지 못했지만 역사의 변천에 따라 사후 왕으로, 또 황제로 신분이 거듭 상승된 것이다. 사후 영광이 계속된 문조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의 군주 중에서 이름이 가장 길다. 문조의 자(字)는 덕인, 휘(諱)는 영이다.
사후에 받은 정식 시호는 ‘문조체 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다. 임금의 사후 이름은 시호, 묘호, 시호, 존호로 구성됐다. 시호는 명나라에서 전한 것과 조선에서 정한 것이 있다. 묘호와 존호는 신하들이 올린 것을 국왕이 낙점했다. 그러나 문조는 중국에서 전한 시호는 없다. 청나라에서 ‘강목왕(康穆王)’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쓰지 않았다. 조선의 군주는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썼으나 인조 이후 중국의 패자가 된 청나라가 내린 시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문조는 청나라가 준 ‘강목’이라는 시호를 쓰지 않았음에도 묘호(문조)와 시호, 존호만으로도 가장 긴 이름을 갖게 됐다.
조선의 대신들은 헌종이 즉위한 1863년, 임금의 아버지인 효명세자를 임금으로 추존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홍운성렬선광준상’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1868년에는 ‘요흠순공우근탕정’, 1875년에는 ‘계천건통신훈숙모’, 1876년에는 ‘건대곤후광업영조’라는 존호가 각각 더해졌다. 그 후에도 세 차례에 걸쳐 ‘장의창륜행건배녕’, ‘기태수유희범창희’, ‘입경형도성헌소장’의 존호가 더해졌다. 문조는 헌종 12년(1834년) 용마봉 천장, 고종 12년(1875년) 세실, 광무 3년(1899년) 황제 추존 등 16차례에 걸쳐 시호와 존호가 올려지면서 모두 117자의 긴 이름을 갖게 됐다. 그 이름은 신주에 2밀리미터의 정치한 글씨로 쓰였다. 현재 신주에는 10자만 기록돼 있다. 종묘제례나 왕릉제향 때 축관은 문조의 긴 이름을 독축하면서 무척 긴장하게 된다. 한 자라도 틀리게 읽어서도, 운율을 잃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2013년 4월21일 경기도 구리의 동구릉에서 봉행된 문조의 제향에서 해설자는 대축의 독축이 10여 분에 이를 것을 참반원에게 안내했다. 독축이 긴 것은 문조의 이름이 긴 게 이유다.
조부 정조의 문예성 빼닮아, 여섯 살 때 쓴 편지 화제 문조의 완전한 이름은 ‘문조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치중달화계력협기강수경목준혜연지굉유신휘징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이다. 스물 두 살의 짧은 생을 산 문조는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났다. 문조는 스물한 살 때 궁중무용의 으뜸으로 꼽히는 춘앵전을 창제했다. 어머니인 순조 숙황후의 보령 40세를 맞아 장수하기를 기원하는 춤이었다. 봄날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독무로 연행하는 정재(呈才)다. 대궐의 잔치 때 하던 춤과 노래의 연예(演藝)를 정재라고 한다. 문조가 창제한 이 춤은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색의 앵삼을 입고 화관을 쓰고 춘다. 또 오색한삼을 양손에 끼고 육자길이의 화문석위에서 한없이 느리고 우아한 춤사위 동작을 보인다.
문조는 할아버지인 정조의 문예성을 빼어 닮았다는 평을 들었지만 요절로 인해 재능을 꽃을 피우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인 문조는 외삼촌인 김유근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열일곱 살 무렵에는 우리나라 부채, 중국 부채, 좋은 향 등과 함께 담뱃대 등을 보내줄 것을 청했다. 여섯 살 때 쓴 편지에는 사탕을 달라는 아이의 순진함이 묻어나고 있다. 內舅承旨開坼(내구승지개탁) 卽承審夜間氣候萬重 不勝喜幸 二封唐果 食之甚美 後日又爲覓送 望望不備(즉승심야간기후만중 불승희행 이봉당과 식지심미 후일우위멱송 망망 불비) 편지를 받고 밤에 편안히 보내심을 아니 기쁨과 다행스러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당과(糖果) 두 봉은 아주 맛있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글쓴이 이상주 ‘세종의 공부’ 저자다. 조선왕실(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위원으로 종묘대제, 사직대제, 왕릉제향 전승자다. 세종왕자 밀성군종회 학술이사, 이상주글쓰기연구소(www.이상주글쓰기연구소.kr) 대표다. 지은 책으로는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공부열광’ 등이 있다. - 이상주 역사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