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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 큐레이터 다이어리]뮤지컬 <빨래> 치유능력

공감의 예술이야말로 진정한 힐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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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40호 박현준⁄ 2013.08.19 13:45:26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그런데 처음 그렸던 꿈의 채도가 탁해지지는 않았는지 점검해보는 경우는 드물다. 삶의 무게나 상처에 현실이 얼룩지다 보면 어느새 꿈은 희미해지고 더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점에 서 있을 때가 대다수다. 아마도 체념해버린 꿈을 묵혀두거나 변질한 모습을 회피하려는 방어 기제가 숨어있는 탓이다. 갤러리 큐레이터로서 관객들에게 미술로 치유하는 방법을 제시하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미술로 말미암아 치유가 필요해지곤 한다. 한동안은 미술에서 꿈과 치유를 동시에 얻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일에 나를 가두는 꼴이 돼 고단함만 쌓여갔다. 대안을 음악에서 찾았다. 그중 하나는 뮤지컬이다. 무대미술을 보는 재미도 쏠쏠할 뿐 아니라 자신의 역할에 온 힘을 다하는 배우들의 모습에 더욱 열정적으로 살고 싶은 자극을 받는 것도 한 몫 한다. 특히, 소극장 연출의 창작 뮤지컬은 수입뮤지컬과 비교했을 때 정서적 공감이 크고 무대 가까이에서 관람함으로써 몰입도도 있다. 일상을 잊고 집중할 수밖에 없는 공기가 충분하다. 얼마 전 관람한 뮤지컬 ‘빨래’는 기대 이상이었다. 다른 예술로 치유하러 갔지만, 그 예술은 순간의 최음제를 넘어 일상에서 치유를 느끼는 방법을 깨닫게 했다.

2005년 초연 이후 약 2000회 공연을 하며 장기간 명성을 유지해오고 있는 ‘빨래’는 가히 ‘힐링 뮤지컬’로 꼽힐 만했다. ‘빨래’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소시민의 삶을 처절하고도 희망 있게 풀어낸 작품이다.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해 비정규직,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처우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무리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도 억울한 일투성이에 꿈은커녕 나아지지 않는 삶, 가슴 먹먹함에 눈물짓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고향을 떠나 서울의 한 서점에서 근무하는 스물일곱의 나영이가 엄마의 김치를 그리워하는 장면에서 눈물 어린 공감이 시작됐다. 필자 역시 스무 살 이후로 제주에 계신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따끈한 엄마의 반찬이 가장 그립다. 빨래하며 인생을 토해내는 순간이 바로 예술 나영이가 직장에서 사장의 횡포로 겪는 부당한 일들과 자립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만 하는 고용인의 애환 역시 공감의 내용이다. 일하면서 자신이 사회적 약자라고 여겨질 때, 주인의식으로 아무리 열심히 한들 언제든 주인에 의해 운명이나 꿈이 좌우될 수 있음을 느꼈던 순간들이 떠올라 감정이입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불법 체류자 신세로 몇 개월째 월급을 체납당하는 이웃집 몽골청년 솔롱고, 연애하는 구씨와 연일 싸우느라 정신없는 희정 엄마, 40살 된 장애인 딸의 기저귀를 매일 빨며 늘 마음이 아픈 주인집 할머니. 모두 어려운 형편에 꿈은 저 멀리 있지만, 시련 속에서 애환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 간의 정과 사랑은 가장 큰 희망으로 작용한다. 바람에 날려 넘어간 빨래로 나영과 슬롱고는 가까워지고, 서로의 아픈 현실을 위로하며 사랑을 키워간다. 희정 엄마는 할머니의 기저귀 빨래를 도움으로써 할머니 인생 자체를 위로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얼룩지고 먼지 묻은 어제를 빨래로 털어낸다. 소박한 일상의 한 부분을 슬픔을 이겨내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 슬픔도 억울함도 같이 녹여서 빠는 거야 / 손으로 문지르고 발로 밟다 보면 힘이 생기지… / 살아갈 힘이 남아 있는 나를 돌아보지… / 깨끗해지고 잘 말라서 기분 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야.” - <슬플 땐 빨래를 해>中 필자는 빨래를 가장 비생산적인 일과 중 하나로 여겨 항상 마지못해 해왔다. 갤러리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고귀한 예술로 받들고 막상 내 생활환경은 찌든 때를 닦는 시간이 피곤하고 아까워 하찮게 대했다.

예술은 갤러리나 공연장에만 있지 않다. 빨래하며 인생을 토해내는 순간이야말로 노래가 되고 예술이 된다. 예술가가 작품을 위해 스스로 아픔을 파고드는 경우에서 알 수 있듯 삶의 처절한 밑바닥에서 진짜 예술이 만들어진다. 선천적 또는 후천적으로 이뤄진 환경에 의해 올라서 있는 위쪽의 궤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삶의 밑바닥, 그 시작은 누구나 같다. 그 지점이 바로 공감과 공유가 가장 활발하다. 나보다 더 아프고 어려운 삶을 봤을 때 위로받는 인간의 특성과도 결부된다. 독특한 것만이 가치 있는 예술이 아니라 평범한 것에서 공감의 폭을 넓게 가지는 예술이야말로 치유를 돕는다. 감성을 적시는 예술 앞에 감동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감성이 메말라 있다거나 아팠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나의 꿈이 어디까지 왔는지 혹은 방향을 잃은 것은 아닌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을 때 순수예술은 예상외로 큰 깨달음을 준다. 따스한 위로와 함께. “난 빨래를 하면서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잘 다려진 내일을 걸치고 오늘을 살아요.” - <빨래> 中 - 신민 진화랑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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