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애절한 사연 간직한 인도의 보석 타지마할
“자이푸르를 가지 못했다면 인도를 본 것이 아니야”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타이완 인도 여행<6/7>인천 - 타이베이 - 방콕 - 인도 콜카타 - (항공) - 첸나이 - (항공) - 뭄바이 - (항공) (델리 경유) - 아그라 - (열차) - 자이푸르 - (열차) - 델리 - (항공) - 바라나시 - (항공) (델리, 방콕, 홍콩 경유) - 인천』
9일차 (아그라 → 자이푸르)
호텔 조식 후 느긋하게 타지마할(Taj Mahal)로 향한다. 아그라는 무굴제국의 옛 수도답게 볼거리가 많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을 노리는 상혼이 기승을 부리기 때문에 그만큼 짜증날 일도 많다. 릭샤를 탈 때마다 매번 흥정해야 하고 심지어 호텔에서 문을 열어주거나 가방을 들어줄 때도 매번 팁이다. 큰돈은 아니지만 성가신 일이다.
애절한 사연의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5대 황제 샤 자한(Shah Jahan)의 아내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의 무덤이다. 하얀 돔과 첨탑(미나레트), 그리고 연못이 어우러진 풍경은 인도 무슬림 예술의 보석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죽은 아내에게 바치기 위해 22년 동안 엄청난 비용과 인원을 투입해 건설(1654년 완공)했다. 350년 된 건축물의 높이는 65m. 현장에 와서 자세히 살펴보니 2만명의 기술자와 인부들이 공을 들인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 깊숙한 구석에까지 숨겨져 있다.
완성된 뒤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모두 처형했다고 한다.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을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다시는 만들지 못하게 하겠다는 샤 자한의 광적인 집착을 말해 준다. 외국인 입장료는 인도 기준 뿐 아니라 세계 기준으로 봐도 무척 비싸다(750루피, 한화 1만8000원).
세계 7대 불가사의 하나인 타지마할을 지은 건축광 샤 자한은 이뿐만 아니라 델리 랄낄라(Lal Quila, 일명 레드 포드, Red Fort) 등 초대형 건축 사업을 벌여 국가 재정을 어렵게 했다는 이유로 야심 많은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Aurangzeb)에 의해 왕위를 유폐당하고 멀리 건너편 아그라포트(Agra Fort)에 갇혀 생을 마감했다. 다만 멀리서 타지마할을 바라보는 것은 허용됐다고 한다. 타지마할 지하에 먼저 죽은 그의 아내와 나란히 묻혀 있으니 그가 생전에 타지마할 건설에 들인 정성은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자신의 운명과 사후를 준비한 것이 돼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타지간즈 여행자 거리
마침 벵갈루루(Bengaluru, 일명 Bangalore)에서 온 한 무리의 컴퓨터 공학 전공 남녀 대학생들이 관심어린 눈으로 나를 주시하더니 함께 사진을 찍자고 달려든다. 인도에서 동아시아인을 만나는 일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사실 아시아 국가로 분류되지만 인도는 히말라야 산맥 너머에 있는 중국 등 동아시아와는 상대적으로 교류가 적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타지마할 남문 바로 앞은 왁자지껄한 저자거리 타지간즈(Taj Ganz) 여행자 거리이다. 우연히 찾아들어간 Joney’s Place 식당에는 한국어 메뉴가 반기고 벽에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남긴 낙서가 가득하다. 김치볶음밥은 제법 한국 맛을 내고 반찬으로 내준 김치도 제법이다.
타지간즈에서 오토릭샤를 내어 12km 떨어진 북쪽 시외곽 시칸드라(Sikandra)에 다녀왔다. 무굴제국 3대 악바르 황제의 무덤이다. 타지마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무굴왕국 초기 건축물이 진화하는 중간단계쯤 해당한다고 한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아그라포트로 돌아오는 길은 보행자를 비롯해 온갖 교통수단이 마구 뒤섞인 혼돈의 거리이다. 뜨거운 날씨에 건조한 대지에 날리는 모래먼지와 경적소리가 뒤섞여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다.
아그라 더위는 여행자를 정말 지치게 한다. 섭씨 40도에 습기까지 머금은 최악의 날씨에 악전고투한다. 등급이 높은 호텔을 제외하고는 아그라 도시 전체에 에어컨 시설이 된 실내를 찾아보기 어려우니 마땅히 더위를 식힐 곳도 없다. 이런 기후에서 수천 년 꿋꿋이 살아온 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아그라포트에서 타지마할을 조망
아그라포트는 샤 자한이 생애 마지막 8년을 갇혀 지낸 곳으로 1566년 무굴제국 3대 악바르 황제가 지었다. 붉은 사암으로 축조한 성벽은 바로 아래편 야무나(Yamuna)강을 접한다. 외국인 입장료는 250루피(6000원)로 여전히 과다하다 싶었지만 그 가치는 멀리 타지마할을 바라보는 망루에 이르러서 빛났다. 성벽 망루에서 그 옛날 샤 자한이 그랬듯이 나도 타지마할을 조망한다.
반사막 평원과 야무나강이 어우러진 풍경은 하루 종일 바라봐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움의 극치다. 그러나 샤 자한에게는 오로지 회한과 좌절이었을 뿐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순간 애절한 마음이 든다.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와 도시 전체가 뿌연 모래 안개에 휩싸인다. 무굴제국의 흩어진 영화처럼 보인다.
무굴제국의 영고성쇠
무굴(Mughul)이라는 말은 아프가니스탄 방언으로 몽골이라는 뜻이다. 무굴제국(1526~1761)의 6대 황제 아우랑제브는 인도의 이슬람화를 목표로 비이슬람에 대한 강력한 탄압정책을 편 결과 영토는 최대로 확장했으나 반발을 크게 사 제국의 몰락을 재촉했다. 무굴제국은 쇠퇴하고 북인도에서는 아프간이 패권을 쥐는 등 혼란한 틈에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Basco da Gama)가 캘리컷에 도착했다. 그동안 시기를 저울질하던 유럽의 열강들이 인도를 본격적으로 침탈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1857년 옛 무굴제국 출신 병사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세포이 반란(Sepoy Mutiny)을 영국은 1858년 완전히 진압함으로써 무굴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영국은 인도를 장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곧 무슬림에 대한 영국 식민정부의 (관직 발탁, 대학 진학 제한 등) 체계적 박해와 차별이 시작되면서 결국 이슬람은 수적으로나 사회경제적 지위로나 인도에서 하층민으로 전락하게 된다. 한 때는 제국을 경영했던 무슬림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오늘날까지 인도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캐세이패시픽 조종사의 일리 있는 주장
전쟁터 같은 아그라포트역의 혼란을 뚫고 무사히 저녁 6시 20분 자이푸르(Jaipur)행 열차에 올랐다. 내가 배정된 차실(compartment)에는 남아공 출신 백인남녀가 함께 탔다. 남자는 캐세이패시픽 항공 부기장이다. 항공사 직원에게 할당되는 저렴한 항공요금 덕분에 여러 지역 여행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항공 산업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나누던 중 조종사 세계에서 한국 국적 항공사의 평판은 어떠한지 물어보았다. 의외로 별로 좋을 것 없다는 대답이다.
모든 실행이 표준 매뉴얼화 돼 있어 기장이 자의적 결정을 하는 경우가 드문 캐세이패시픽항공과는 달리 많은 부분이 조종사에게 맡겨지는 한국식 운항시스템은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러시아 극지방이나, 아프리카 오지처럼 관제 정보가 부족하거나 지상 관제사들과 영어 교신이 어려운 지역을 비행할 때 해당 지역을 날고 있는 다른 영어권 출신 조종사들과 운항정보와 기상정보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영어가 부족한 한국 조종사들은 이러한 네트워크에 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과장된 부분을 감안하고 들어도 일리 있는 주장이다.
열차는 거의 정시에 출발해 라자스탄(Rajasthan)주 주도인 자이푸르를 향해 쾌속으로 달린다. 너무나 안락한 침대칸에 앉아 있자니 여기가 인도인지 유럽인지 알 수 없다. 철로변으로 이어지는 농촌 풍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인다. 밤 10시 35분 열차는 자이푸르역에 도착했다. 241Km의 거리를 4시간 15분에 주파했다. 자이푸르는 아그라보다 훨씬 깨끗해서(덜 지저분해서) 일단 상쾌하다.
10일차 (자이푸르 → 델리)
자이푸르의 아침 하늘에는 다행히 구름이 끼었다. 어제 아그라처럼 덥지 않았으면 좋겠다. 호텔을 나와 자이푸르역까지 간 후, 우연히 발견한 버스를 타고 시티팰리스(City Palace)로 향한다. 올드자이푸르(Old Jaipur)는 사방이 성으로 둘러싸인 성곽도시이다. 그 안에는 각종 가게와 유적들이 뒤섞여 북적거린다. “자이푸르를 가지 못했다면 인도를 본 것이 아니다”라며 버스에서 만난 현지 청년이 던진 말이 무슨 뜻일까 곰씹으며 호기심어린 발걸음을 재촉한다.
잔타르만타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잔타르만타르(Jantar Mantar)다. 고대 천문우주 점성 기술이 집약된 곳으로 천문 관측시설과 해시계 등이 즐비한, 말하자면 우리나라 첨성대 같은 곳이다. 잔타르만타르는 델리와 바라나시 등 인도 곳곳에 있지만 자이푸르에 있는 것이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잔타르만타르의 유적지 관리는 인상적이다. 인도 관광지 중에서 가장 관리 유지가 잘 되고 있는 듯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다. 관광을 주산업으로 내세우는 라자스탄주의 정성이 느껴진다. 세계 7대 불가사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방문객들을 불편하게 하는 아그라는 자이푸르와 크게 대비된다.
핑크시티
이어서 시티팰리스를 찾아 갔다. 왕세자 시절 자이푸르를 방문한 에드워드 7세를 환영하기 위해 온 도시를 핑크빛으로 칠했다고 해서 핑크시티(Pink City)라고도 불린다. 핑크빛 건물이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입장료 300루피에는 못 미치는 것 같다. 입구에는 마호싱(Maho Singh) 2세가 에드워드 7세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선편으로 영국에 갈 때 갠지스 강물을 담아 갔다는 은 항아리 두 개가 있어서 인상적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은제품이라고 한다.
바람의 궁전
1799년 지어진 하와마할(Hawa Mahal, 일명 바람의 궁전)은 당시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바깥출입이 제한됐던 왕실 여인들이 창문 틈으로 바깥 거리풍경을 구경했다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매우 포토제닉하다. 나도 작은 창문을 통해 거리를 내려다본다. 인도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듯 한 거리를 오랫동안 내려다봤다.
내부 통로를 굽이굽이 돌아 오른 망루에서는 자이푸르시 전체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인도 여행 중 보았던 가장 멋진 풍경 중 하나이다. 이슬람풍을 풍기는 아그라 유적과는 달리 여기 라자스탄의 유적은 독자적인 힌두풍이다. 무굴제국 시대였지만 라자스탄은 독자성을 지켰다는 얘기이다. 태양은 작열하지만 이 멋진 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땀이 흐르는 줄 모른다. 멀리 나하가르포트(Nahargarh Fort)와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싼 바위산들이 도시 외곽에서 위용을 부린다. 미국 남서부 뉴멕시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멋진 사막 풍경이다.
버스를 타고 시티팰리스 지역을 나왔다. 남문 근처에는 새로 생긴 몰이 있다. 4층 푸드코트를 찾아 들어가 중국음식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늘 저녁 열차로 델리 이동시 저녁이 부실할까 싶어서 억지로 많이 먹었다. 어설프지만 에어컨이 나오는 현대식 몰에서 식사를 하며 여기가 인도라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델리행 열차의 호사
델리행 오후 5시 50분 열차는 사바티니 특급 비즈니스 특실이다. 항공기보다 훨씬 화려한 풀세트 디너에 이어 입가심 수프가 나온다. 그러나 식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지금껏 나온 것은 애피타이저(appetizer)에 불과하다. 정식 풀코스 디너가 나오더니 아이스크림으로 입가심을 한다. 그 사이 열차는 델리까지 한 시간을 남겨 놓고 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열차 내 호사에 기분이 날아간다. 바람을 쐬러 열차 승강구에 나가니 열풍이 들이닥친다. 이국의 평원을 달리는 열차 차창에 기대어 무수한 상념에 잠긴다. 열차는 철로변 빈민가를 지나 밤 11시 뉴델리역에 도착했다. 309Km를 5시간에 주파했다. 뉴델리역 앞은 혼돈의 극치이다. 한꺼번에 열차가 도착하는 밤늦은 시간대는 더욱 그렇다. 오토릭샤를 겨우 수배해 호텔로 향하다.
11일차 (델리 → 바라나시)
뉴델리 탐방오늘은 오전에 짧게라도 델리 관광을 해야만 한다. 새벽같이 서둘러 호텔을 나서 오토릭샤로 인디아게이트(India Gate)로 향했다. 델리는 계획도시이다. 특히 관청과 고급호텔, 업무 시설이 모여 있는 뉴델리는 드넓은 녹지와 (런던을 닮아) 곳곳에 있는 로터리(circle), 그리고 넓고 곧은 도로를 자랑하는 매우 현대적인 도시이다. 날이 더워지기 전에 서둘러 업무를 처리하려는 사람들 때문인지 오전 7시 이전인데 거리는 이미 혼잡하다.
인디아게이트는 1차 대전에 참전해 희생된 8만5000명의 인도군 전몰자를 위한 위령탑으로서 42M에 이르는 높이가 압도한다. 1차 대전 참전과 희생의 대가로 독립을 약속한 영국이 전후 약속을 지키지 않자 이를 계기로 간디를 중심으로 인도독립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독립을 달성한다. 건너편 멀리 대통령궁이 보인다.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정리 = 이성호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