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⑱ 지중해·대서양 여행 3]역사가 첩첩이 쌓인 예루살렘
백인 유대인과 흑인 유대인 공존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5일차 (아카바 → 에일랏, 이스라엘 → 예루살렘)
요르단-이스라엘 육로 국경을 지나며
새벽 5시 어김없이 들려오는 코란 낭송 소리에 잠을 깼다. 여행을 시작한 지 닷새째이지만 2주일쯤 된 것 같다. 오늘은 국경을 건너 이스라엘 에일랏에서 예루살렘까지 5시간 버스를 타야 한다. 호텔을 나와 택시로 아라바(Araba) 국경에 도착, 출국세 8디나르(한화 1만4000원)를 내고 요르단 출국, 이스라엘 입국 절차를 거친다. 이스라엘에 들어오니 사람들 용모가 확연히 달라진다. 이스라엘 사람들 용모는 유럽인 모습에 훨씬 가깝다.
에일랏 국경 사무소에서 택시(35쉐켈, 1만5000원)로 버스터미널에 가니 10시에 예루살렘행 버스가 있다. 내일 자정 텔아비브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는 버스 승차권까지 예매한 뒤 출발을 기다리며 따뜻한 홍해의 햇볕을 만끽한다. 버스 터미널에서 남미 볼리비아와 아르헨티나에서 온 젊은 남녀를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눈다. 볼리비아 리튬 광산에 한국이 큰 투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 세계 어디를 가도 이야기를 풀어나갈 거리가 풍부하니 좋다.
에일랏에서 마주친 흑인 유대인
해안 휴양도시이자 국경도시인 에일랏 버스 터미널이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에일랏에는 흑인들이 눈에 많이 띈다. 하층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에 특히 많다. 사실 이곳은 예로부터 아시아(중동)와 아프리카를 잇는 무역과 교통의 요충 아닌가?
아프리카가 가깝다는 것 말고도 이스라엘 흑인들은 에티오피아나 소말리아, 수단, 우간다 등 동아프리카 각 지역에 흩어져 소수 유대교도로 살다가 기독교도 혹은 이슬람의 박해를 피해 나온 유대인이다. 이들의 조상은 BC 6세기 옛 유다 왕국 멸망 이후 이스라엘을 떠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살다가 AD 1세기 클레오파트라의 패전과 사망 이후 더 멀리 에티오피아 등 동아프리카까지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AD 4세기 에티오피아의 기독교 공인에도 불구하고 이후 수천 년 유대교를 신봉해 왔으니 그들이 겪은 박해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10만 명에 달하는 동아프리카 유대인들은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스라엘 정부의 유대인 본국 송환 정책에 따라 모세 작전, 솔로몬 작전 등의 이름으로 공수돼 현재 거의 모두 이스라엘에 정착했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계 유대인 또한 본국 송환 정책에 따라 1990년 구소련 해체 이후 이민 온 사람들이다.
▲요르단의 아쿠바만 건너에 보이는 이스라엘 국경도시 에일랏 풍경.
찬란한 코발트 빛 사해
오전 10시 정각에 에일랏을 떠난 버스는 바란 광야를 건너 네게브 사막을 북행한다. 군데군데 탱크와 벙커 등 버려진 장비와 군 시설들이 있어 이 지역을 놓고 이스라엘과 범아랍 세력(특히 이집트)이 벌인 각축의 세월을 일깨워준다. 풀 한포기 자라기 어려운 참혹한 땅이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소중한 곳이다.
버스 출발 후 2시간 30분이 지나자 사해(死海, Dead Sea)가 보이기 시작한다.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는 직선 코스를 이탈해 사해 리조트 지역 승객들을 위해 버스가 우회하는 덕분에 사해를 바로 옆에서 실컷 보게 된 것이다.
사해에서 채취한 광물을 실은 대형 트럭들이 분주히 오간다. 사해는 생각보다 넓고 빛깔은 파란 코발트색이다. 사해가 검붉거나 어두운 색일 것이라는 짐작은 완전히 틀려버렸다. 바란 광야, 마사다(Masada, 로마군에 대항해 유대인 전사들이 옥쇄한 고지), 예리코(Jericho, 여리고) 등 성경에 등장하는 지명이 계속 이어진다. 도로 표지판은 히브리어, 아랍어, 영어 세 언어로 병기돼 있다.
주인이 수없이 바뀐 예루살렘
예루살렘이 가까워질수록 요새화된 군사 시설이 자주 보인다. 언덕진 곳, 가파르고 척박한 땅에는 팔레스타인 난민촌 천막이 많이 보인다. 예루살렘 종합터미널에서 택시(1만5000원)로 올드 예루살렘 이슬람 지구 헤롯 게이트 근처에 예약해 놓은 호텔로 찾아 들어가 체크인 후 곧장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갔다.
수천 년 도시 역사를 점철했던 여러 문명들이 겹겹이 쌓인 올드 예루살렘 곳곳에서는 오늘도 고고학 발굴 작업이 한창이다. 예루살렘은 해발 900m 지점에 자리 잡은 도시라서 날씨는 오히려 쌀쌀하다. BC 1000년 다윗왕이 수도로 정한 이후 알렉산더 제국, 로마제국, 아랍, 오스만 제국, 영국으로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에일랏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던 도중 마사다를 마주했다. 로마군에 대항해 유대인 전사들이 죽음을 맞이한 고지다.
예루살렘 속살 보여준 이스라엘 남성 일란
야포 게이트 앞에 앉아 쉬던 중 일란이라는 이스라엘 남성을 만났다. 자기에게 마침 시간이 있으니 외부 방문자들은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의 속살을 보여주겠다면서 나를 안내한다. 그의 효율적인 가이드 덕분에 성 안 모든 지역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확실히 받을 수 있었다. 이슬람 지역, 통곡의 벽, 유대인 지역, 기독교 지역,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어지는 예루살렘의 공간 개념이 분명해진다. 예루살렘 성곽은 오스만 제국 시절 건설한 것으로 지금도 거의 온전히 보존돼 있다.
중국의 유대인
일란은 중국에도 유대인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냐고 한다. 지난 주 중국 허난성 카이펑(開封, 송나라 수도)에서 유대인임을 주장하는 중국인 가족이 뿌리를 찾으러 와서 도와줬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스탈린 박해를 피해 나온 러시아 유대인과 나치의 박해를 피해 나온 유럽 거주 유대인들이 2차 대전 중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 지역에 게토를 이루고 살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한때 3만 명에 달한 상하이 유대인 커뮤니티는 교당, 학교, 신문, 극장 등 많은 시설을 운영할 정도였다. 한민족도 유대인 못지않게 디아스포라(diaspora)가 많다고 설명해 줬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야드바셈’은 나치에 의해 희생당한 유대인의 불행했던 과거를 담고 있는 곳이다.
다양성의 극치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전 세계 관광객과 성내 거주 많은 민족들이 섞여서 다양성의 극치를 이룬다. 일란과 커피 한 잔씩 마시고 헤어져 호텔로 돌아오니 저녁 7시다. 아직 이른 저녁일 뿐이지만 호텔이 위치한 아랍 지역에는 가게들이 문을 닫기 시작해 살벌한 분위기까지 든다. 치킨 집을 겨우 찾아 들어가 후라이드 치킨과 음료, 감자튀김을 사들고 들어와 호텔 방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6일차 (예루살렘 → 텔아비브 → 에일랏)
역사를 배우고 생각하게 해준 홀로코스트 추모관
오전에는 우선 도시 외곽에 있는 야드바셈(Yad Vashem, Memory & Name, 일명 ‘홀로코스트 추모관’)을 찾았다. 본국과 세계 각지에서 성금이 답지함에 따라 계속 시설을 확충 중이다. 전시관과 나란히 있는 자료보관소와 도서관 기부자 명단에는 미국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이름도 있다.
방문자 센터에서 안내하는 노인과 대화를 나눴다. 2차 대전 종전 후 1949년 동유럽 크로아티아에서 무작정 이스라엘행 배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 전쟁 당시 유대인과 집시는 인간이 아니었다면서 서러운 시절을 기억한다. 에스토니아 유대인 집단을 학살한 충격적인 사진으로 시작한 전시관은 독일의 1차 대전 패배 후 히틀러의 등장, 히브리 서적과 공산주의 서적, 프로이트 서적 등을 소각한 분서 사건, 반유대주의 역사, 전쟁 중 반유대주의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통곡의 벽 가까이에 다가가면 저마다 간절한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다음과 같은 전시물이 숨 가쁘고 서글프게 이어진다. ▲나치의 인종분류 정책 ▲인종 측정도구와 인종이론 ▲아인슈타인·프로이트·아도르노·마르쿠제 등 망명 유대인 학자 ▲2차 대전 발발 당시 세계 유대인 분포도(폴란드 유대인이 330만 명으로 가장 많아 폴란드 전체 인구의 10%, 러시아 300만 등)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유대인 박해 ▲유대교당 방화 ▲게토 강제 수용 ▲독일군 인종청소 부대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집단 학살 ▲폴란드 학살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집단 저항 ▲수용소 강제 이송 ▲나치 학살에 대한 유럽 사회의 무관심(심지어 교황의 외면) ▲연합군의 승리와 해방 ▲종전과 이스라엘행 엑소더스(exodus, 그러나 당시 아랍 눈치를 보던 영국에 의해서 이민 쿼터가 엄격히 제한됨) 등.
전시관을 나오니 추모관이다. 사라져간 600만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나오니 높은 산언덕에 자리 잡은 야드바셈의 바람이 새삼 차게 느껴진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를 확인한 셈이지만 의외의 사실도 여럿 알게 됐다. 많은 것을 배웠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박물관이다.
순례객들의 기도가 담긴 통곡의 벽
야드바셈을 나와 버스로 야포 게이트에 도착했다. 어제 와봤지만 여전히 새롭다. 아르메니아 지구를 거쳐 로마 시대의 중심 거리였던 카르도에 가니 로마 시대 생활상을 재현한 대형 벽화가 여러 편 걸려 있다. 예루살렘은 수많은 선대 문명 위에 쌓고 또 쌓은 여러 층의 도시이다. 통곡의 벽에 닿으니 오늘도 수많은 순례객들이 진지하게 기도를 올린다. 저마다 소원을 적어 돌 틈에 끼워놓은 쪽지도 인상적이다.
통곡의 벽 광장 바로 건너편에 있는 유대교당은 이스라엘 근현대사의 상징처럼 보인다. 1948년 독립전쟁(이스라엘 독립 선언 1시간 후 이집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5개국 아랍 연합군의 침공으로 시작함) 당시 요르단군의 포격으로 부서진 것을 1967년 6일전쟁에서 탈환, 복구했다.
▲골고다 언덕은 각종 종교 의식이 벌어지는 장소다.
각종 종교 의식이 모인 골고다 언덕
아랍지구로 돌아오니 글자와 언어, 소리와 분위기까지 바뀐다. 이렇게 좁은 지역에 세계 양대 종교가 공존하는 곳은 여기뿐 아닐까 싶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고난의 길)를 따라 14지점까지 밟았다. 골고다 언덕, 바로 그 길이다. 예수가 묻힌 바로 그 지점에는 교회가 들어서 있고 그 안에서는 오늘도 각종 종교 의식이 벌어진다.
(정리 = 김금영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