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㉓]물의 도시 베네치아에서 길을 잃다
르네상스의 발원지 피렌체에서 ‘아드리아해의 여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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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4일차 (로마 → 피렌체)
한국인이 좋아하는 피렌체
토리노행 유로스타 열차는 테르미니 역을 아침 8시 33분 정시에 출발했다. 대학생들로 보이는 한국 젊은이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탈리아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관광지 중 하나다. 이탈리아의 역사와 풍광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사람들 특유의 다정다감함이 여행자들을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날렵한 유로스타 열차는 롬바르디아 평야를 북행한다.
피렌체 세레나 호텔은 역에서 불과 50m 떨어진 매우 편리한 위치에 있다. 체크인 뒤 곧장 시내 탐방에 나선다. 아직 아침 10시 반이라서 날씨가 차갑다. 작지만 피렌체는 농축미가 있다. 르네상스 발원지이자 중세 전통을 모두 가지고 있는 토스카나 주의 중심도시 아닌가? 게다가 플로렌스(Florence), 즉 ‘꽃의 도시’라서 기대가 크다.
우선 역 앞에 있는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갔다. 수백 년 된 르네상스 시대 성화(聖畵)가 가득하다. 성당 곳곳에는 예술가와 사제들의 무덤이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부터 예수의 온갖 행적을 묘사한 성화가 웅장하고 오묘하다. 성당 정면 십자가 예수상의 모자이크 배경은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의 솜씨에 또 한 번 감탄한다. 솜씨도 솜씨지만 얼마나 신앙심이 투철했으면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피렌체 두오모에서 만난 피렌체의 멋진 풍경
이어서 두오모(Basilica di Santa Maria del Fiore, 일명 Duomo)로 이동했다. 일단 거대함에 압도당하지만 섬세함에 다시 한 번 감탄한다. 150년(1292~1436년) 걸려 완성했을 만큼 크고 화려하다. 입장료는 좀 비싸지만(8유로) 두오모 꼭대기 입장료가 포함돼 있으니 괜찮다. 463개의 계단이 만만치 않았지만 성당 꼭대기에서는 피렌체의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어디서 많이 봤던 낯익은 풍경이다. 안개가 걷힐 때까지 한참 기다려 온전한 풍경을 내려다 본다.
두오모를 나와 얼마 안 가니 시뇨리아 광장이다. 베키오 궁전과 우피지 미술관이 여기 있다. 광장에는 갖가지 조각물이 즐비하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복제물이지만 정교하다. 골목을 걷다 보니 단테하우스 안내 표지가 나와 따라 들어갔다. 단테가 시련을 견디며 ‘신곡(神曲)’을 지은 사연이 소개됐다. ‘천국과 지옥(Paradiso vs. Inferno)’ 그림이 매우 리얼하다.
사랑의 밀어가 넘치는 피렌체
필라펠로 점심을 해결하고 산타크로체 성당으로 갔다. 이 도시 웬만한 광장 어디서든 사랑을 나누는 젊은이들을 많이 본다. 그것도 매우 적극적이어서 여행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두오모로 올라가는 계단 벽은 사랑의 낙서가 가득하다. 아름다운 피렌체는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어 도달한 베키오 다리는 그 명성만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난 이곳에 지금은 금은 보석상이 길 양쪽으로 즐비하다.
▲사랑의 밀어가 넘치는 피렌체 거리에 굳건한 사랑을 약속하는 자물쇠가 걸려있다.
겨울의 짧은 해가 기울 무렵 언덕 위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올라갔다. 도시 중심에서 아르노 강을 건너 언덕 끝에 도달하니 이제 막 어둠이 깔려 아름다운 도시 야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마침 어디선가 들려오는 성당 종소리가 사방에 퍼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렇게 예쁜 도시가 또 있을까?
언덕 위 광장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호텔로 돌아온다. 도시는 밤이 깊을수록 더 아름다워진다. 다른 도시가 아니라 왜 피렌체가 르네상스를 꽃피울 수 있었는지 깨닫는 하루였다. 도시에 깊게 쌓인 문명과 지식의 흔적을 더듬는 하루이기도 했다.
15일차 (피렌체 → 베네치아)
악명 높은 베네치아 미로
정시에 피렌체를 떠난 열차는 터널을 여러 개 통과하더니 눈 덮인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40분 뒤 볼로냐를 지난다. 볼로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있는 도시다. 열차는 정시에 베네치아 산타루시아 역에 닿는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베네치아의 악명 높은 미로 구조를 얕본 탓에 호텔 찾기에 애를 먹는다. 출력해서 가져간 구글 지도는 있으나마나다. 여러 사람들의 친절 덕분에 운하 골목 안 깊숙한 곳에 있는 호텔을 겨우 찾았다. 호텔은 소박한 2~3성급이지만 방이 예쁘고 기능적이다.
서민들의 삶, 물가, 대중교통
유럽을 좀 더 다녀봐야 알겠지만 최소한 이탈리아를 기준으로 보면 유럽은 물가가 비싸다. 우리나라보다 소득이 낮은 그리스의 경우도 물가는 오히려 우리보다 높다는 느낌도 받았다. 빅맥지수로 따지면 이탈리아 물가는 우리나라의 두 배가 조금 넘는 것 같다. 특히 서민들의 생활에 필수적인 대중교통 요금이 매우 비싸다. 피렌체 시내버스는 자주 오지도 않거니와 가까운 거리인데 요금이 1.5∼2 유로로 한국의 두세 배다.
비싼 물가는 시민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생산이나 사회적 활동에 영향을 끼친다. 높은 물가는 소비를 억제하고 소비 감소는 국가 생산력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이탈리아의 국가 경제력은 G-8 수준이지만 서민들의 삶은 각박하다. 방금 내가 타고 온 유로스타 요금은 서울-대구 정도 거리에 무려 42유로(약 7만원)다.
▲거대함과 동시에 섬세함을 갖추고 있는 피렌체 두오모 성당.
배로 떠난 바포레토 투어
호텔에 짐을 풀고 로마 광장에 나가 바포레토 12시간 무제한 승선권(16유로)을 구입했다. 이 도시는 배가 유일한 교통, 운반 수단이다. 여객은 물론이고 배달도, 쓰레기도, 경찰도 모두 배로 이동한다. 배가 적절히 느려 구경하고 사진 찍기에는 그만이다. 리알토에서 환승해 산마르코에 갔다. 그곳에서 마침 리도행 배가 떠나기에 올라탔다. 베니스 영화제가 열리는 리도섬은 예쁘고 깨끗하다. 점심은 리도섬에서 라자냐와 맥주로 했다. 값은 제법 나갔지만(13유로) 우아하게 먹고 맥주까지 곁들이니 기분이 좋다.
리도섬을 나와 호텔, 박물관, 갤러리가 연이어 나타나는 운하를 지나 도착한 곳은 아르세날레, 즉 병기창(兵器廠)이다. 인근 해사박물관은 이제 겨우 오후 2시인데 야속하게도 문을 닫았다. 걸어서 두칼레 궁전까지 갔다. 1000년 이상 된 궁전이다. 궁전과 산마르코 성당 사이에는 대종루가 있는데 오늘 공사 중이어서 오를 수 없다.
▲서양식과 동방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산 마르코 대성당의 웅장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엄숙하고 평화로운 산마르코 광장 풍경
산마르코 광장은 12세기에 운하를 메우고 확장 건설됐다. 비둘기 떼가 모이를 쪼는 평화로운 풍경은 사진에서 많이 봤던 모습이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서양식과 동방 비잔틴 양식의 혼합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베네치아의 수호성인 성(聖) 산 마르코의 무덤을 덮는 교회로 세워졌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예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마가(산 마르코)의 시신이 9세기말 알렉산드리아의 한 성당에서 발견되자 베네치아 상인 두 명이 돼지고기 밑에 시신을 숨겨 베네치아로 옮겨와 산 마르코 성당에 안치한 것이다.
성당 지붕에 얹은 다섯 개의 돔과 성당 내부의 모자이크가 찬란하다. 성당 입구에 세워진 네 마리의 청동 마상이 눈길을 끈다. 약탈과 파괴로 얼룩진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 시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것이다. 훗날 베네치아를 점령한 나폴레옹이 빼앗아 갔다가 돌려준 사연 많은 물건이다. 성당 박물관에는 신약 성경 이야기와 성인들을 묘사한 수백 개의 금빛 모자이크와 자수 공예물이 가득 들어차 있다.
▲두오모 성당 망루에서 본 피렌체 전경은 가슴까지 탁 트이게 만든다.
1000년 해상 왕국 베네치아의 매력
리알토 다리를 항해 바포레토를 타고 가다가 배가 살루테 성당 앞에 멈추기에 얼른 내렸다. 성당 안에서는 마침 미사를 드리고 있고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장엄하다. 파이프 오르간을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는 공간이기에 더욱 장엄하다. 이곳저곳에서 저녁 빛을 반사하는 여러 성당과 궁전은 마치 물 위에 떠있는 듯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방 교역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이기에 바닷물 위까지 도시를 건설해야만 했을까? 하기야 동방 무역 덕분에 작디작은 도시 베네치아는 1000년 동안 해상 왕국으로 동지중해에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마주한 리알토 다리. 주변에 시장이 있어 수많은 동서양 상인들을 만날 수 있다.
물의 도시, 아드리아해의 여왕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리알토 다리와 그 주변 시장 지역이다. 바로 이 시장이 지난 1000년 세월 동안 지중해 동방 무역을 지배했던 곳 아닌가? 이곳을 다녀갔을 수많은 동서양 상인들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 어시장은 오늘 폐장했지만 아직까지 짙은 비린내를 풍긴다. 시장 뒷골목 서민들이 사는 좁은 운하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관광객들이 하루 수만 명 씩 드나들지만 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일상을 엮어간다. 호텔로 돌아오는 바포레토는 매우 붐빈다. 퇴근 시민들이 바포레토를 타고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로마 광장에서 호텔을 찾아가느라고 다시 한 번 헤맸다. 이렇게 물의 도시, 아드리아해의 여왕이라 불리는 도시와 제법 친해졌다. 한국에 돌아가도 이 도시 풍경이 눈에 선할 것 같다.
(정리 = 김금영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