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베를린]히틀러판 분서갱유 현장의 빈 책상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2일차 (프라하 → 베를린)
구동독 드레스덴 통과
베를린행 버스는 아침 9시 정각 프라하 플로렌스 버스 터미널을 빠져나간다. 출발 2시간 후 긴 터널을 지나니 독일 국경, 그리고 곧 드레스덴이다. ‘엘베의 피렌체’라 불리는 아름다운 도시를 덤으로 들른다. 고등학교 독일어 시간에 배운 낯익은 단어가 연이어 보이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도시에는 고딕 성당이 산재한다. 2차 대전 중 영미 연합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곳이 아닌가? 버스는 드레스덴에서 베를린까지 계속해서 구동독 지역을 지나지만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20여 년이 지난 지금, 공산 통치 흔적은 박물관에나 가야 있을 것 같다. 널찍한 도심 공원, 관리가 잘 된 아파트, 훌륭한 도로 인프라 등 선진국 독일에 온 것이다. 인구 8300만 명, 면적은 남한의 3.7배쯤 되는 부국이고 또한 강국이다.
베를린 중앙 버스 터미널에는 독일 전역은 물론이고 유럽 전 지역으로 버스가 드나든다. 멀리 루마니아, 러시아, 크로아티아, 우크라이나, 발틱,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까지도 버스 노선이 있다. 베를린은 유럽 중북부의 중심이라는 것을 말해주듯 인종 또한 매우 다양하다. 호텔은 버스 터미널에서 걸어서 5분 걸리는 훌륭한 위치에 있다. 이번 여행의 중간을 넘기는 시점에서 내일 일정이 여유로워 더 무리하지 않고 호텔에서 휴식 시간을 맞는다.
▲베벨 광장에서 벌어진 히틀러의 분서 사건은 악명 높은 사건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광장 바닥 한 곳에 텅 빈 서고를 묘사해 놓은 모습. 사진 = 김현주
미디어 선진국답게 TV에 다양한 채널이 나온다. 한국 소식도 등장한다. 한국은 이제 중요한 국제 뉴스 대상이다. 함께 나오는 중국 관련 뉴스는 중국에 대한 서구의 냉소적인 시각을 엿보게 한다. 중국이 성장 속도와 안전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직 서구는 중국의 성취를 애써 평가 절하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과 손기정
호텔에서 두 걸음 앞에 지하철역이 있고 여기서 북서쪽으로 세 정거장 가면 올림픽 스타디움역이 있다. 1936년 11회 올림픽이 열린 역사의 현장에 서니 감개무량하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마라톤 우승을 한 손기정 선생 생각에 가슴이 뭉클하다. 100m 달리기 우승으로 히틀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미국 흑인 육상 선수 제시 오웬스에 관한 기록도 있다. 히틀러가 앉았던 귀빈석도 그대로 있다. 그렇게 이어진 한국 마라톤의 전통은 황영조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로 다시 꽃피우지 않았는가.
▲샤를로텐부르크 성은 17세기에 세워져 화재 등을 겪으며 복원을 거듭했다. 본관의 길이가 500m를 넘는 초대형 바로크 건축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진 = 김현주
한국과 독일의 인연
한국에 독일차가 많은 것만큼 독일에도 한국차가 많은 것 같다. 남의 나라 국기를 달고 올림픽에 참가했던 백성이 자동차 본 고장 독일에 자동차를 수천, 수만 대 수출한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인가? 독일에서 차관을 들여와 길을 닦고 공장을 지었던, 지독히 가난했던 한국이 독일 자동차의 가장 큰 해외 시장 중 하나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1960~70년대 이 나라에 광부로, 간호사로 취업해서 한국에 외화를 벌어다 준 분들의 희생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치매 노인의 온갖 성가신 수발 다 들어주고 시신을 닦았던 그분들 아닌가? 한국과 독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다문화 국가 독일
독일은 역시 선진국이다. 잘 가꿔진 도시 중심과 외곽은 물론이고 시스템이 편리해 나 같은 초행길 여행자도 다니기에 불편이 없다. 웬만한 안내판에 독어, 불어, 영어, 터키어 혹은 거기에 스페인어, 폴란드어까지 표기돼 있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임을 분명히 확인한다.
13일차 (종일 베를린 투어 뒤 심야 버스로 폴란드행)
표정이 적은 독일인
날이 선선하다 못해 추울 지경이다. 이런 날씨에 맞게 옷을 준비해 오지 못한 나는 이틀 전부터 감기로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비까지 내리니 오늘은 드디어 여행 가방 깊숙이 박혀 있던 우산이 제 몫을 하는 날이다. 지하철 승차권은 개인의 필요에 따라 1회권, 4회권, 1일권, 다일권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베를린 교통 카드 1일권을 6.8유로에 구입했다. 베를린 지하철 안내 시스템이 매우 편리하지만 서울 지하철만은 못하다. 독일인은 표정이 적지만 차가워 보이진 않는다. 남유럽인과 확연히 다른 데는 날씨도 관련 있을 것이다.
▲1936년 11회 올림픽이 열린 베를린의 올림픽 스타디움. 손기정이 마라톤 우승을 한 곳이기도 하다. 사진 = 김현주
분단의 아픔 느낀 베를린 장벽 박물관
멘델스존, 바그너 같은 낯익은 이름을 가진 역을 지나 샤를로텐부르크 성에 닿았다. 17세기에 세워져 화재 등을 겪으며 복원을 거듭했다. 본관의 길이가 500m를 넘는 초대형 바로크 건축물이다. 이어서 지하철로 체크포인트 찰리(Checkpoint Charlie)로 향했다. 궂은 날씨에도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곳 야외 거리에는 1960~1970년대 냉전 시대 기록부터 동구권 혁명, 월남전까지 관련 사진을 전시됐다. ‘미국 지역을 벗어난다(들어온다)’는 문구가 영어, 불어, 독어, 러시아어로 기록된 당시 안내판과 초소가 그때 그 모습으로 재현됐다.
프리드리히 거리 중간이 곧 동서 베를린의 경계였다. 베를린 장벽 박물관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관람객이 많다(입장료는 12.5유로로 좀 비싸다). 동베를린 탈주자들을 실어 나른 각종 탈것들(심지어 개인용 사제 항공기까지)과 분단 후 장벽 붕괴(1989)까지 기록이 연대별로 잘 정리됐다. 지구상 유일하게 남은 분단 국가 국민으로서 가슴 아프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다. 우리도 이런 종류의 박물관을 세울 날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냉전 심화로 동서 경계선이 한층 강화돼 감시탑과 자동기관총까지 생기게 된 사연이 빼곡히 전시됐다. 3층에는 간디,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세계의 인권 운동 기록이 있다. 동구 각국은 물론 러시아, 천안문, 그리고 이집트 혁명까지 자유를 갈구하는 인류의 투쟁 역사가 전시됐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도 수많은 관광객으로 붐빈다. 야외 거리엔 1960~1970년대 냉전 시대부터 동구권 혁명, 월남전 관련 사진들을 전시했다. 사진 = 김현주
베를린 장벽 붕괴와 공산주의 붕괴의 일등 공신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인가? 그의 1987년 브란덴부르크문 연설이 동영상으로 재생된다. “고르바초프 서기장, 저 문을 열고 장벽을 허무시오”라는 유명한 구절이 담긴 연설이다. 1979년 구소련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동독 공산당 창건 30주년을 기념해 친선 방문해 당시 동독 호네커 수상과 진하게 포옹을 나누는 유명한 사진을 오랜만에 다시 본다. 그 짙은 포옹 10년 후 동독은 해체됐다.
역사를 기록한 유대인 박물관
프리드리히 거리를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유대인 박물관이 나온다(입장료 5유로). 유대인의 전통을 소개하는 학습관에서 시작해 2차 대전 중 독일 유대인들의 생활, 독일로 이주한 동유럽 유대인들의 고단한 삶, 유럽과 남미, 심지어 중국 상하이로 이주해야 했던 사연을 소개한다.
유대인에 대한 나쁜 이미지, 즉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방조했다든지, 13세기 유럽에 흑사병이 돌았을 때 유대인이 우물을 오염시켰다든지, 고리대금업자로 악명이 높았다든지 등에 대한 설명이 전시된다. 1933년 히틀러 집권 시 독일 유대인은 56만 명이었고, 그중 20만 명이 홀로코스트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독일에서 발견한 한국차. 자동차 본 고장 독일에 자동차를 수천, 수만 대 수출하는 한국의 기적이 느껴졌다. 사진 = 김현주
성숙한 시민 의식과 엄중한 질서 유지 장치
다음 목적지로 가는 지하철 앞 케밥집의 음식이 맛있어 보인다. 오후 3시 반, 커피와 함께 늦은 점심을 먹는다. 오늘 아침 독일 가정식 요리로 차린 호텔 조식 뷔페가 아주 충실했기에 늦게까지 돌아다닐 수 있었다. 케밥이 없었다면 유럽 여행은 음식 때문에 단조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유럽 어디를 가도 대중교통 무인 시스템은 참 편리하다. 주요 역을 제외하면 당연히 역무원도 없다. 그래도 시민들은 착실히 표를 구입해서 다닌다. 동유럽에서는 가끔 표 검사를 하지만 여기서는 그마저도 전혀 없다. 그래도 표를 사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무표로 걸리면 벌금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성숙한 시민 의식의 이면에는 이처럼 엄중한 질서 유지 장치가 있다.
히틀러의 분서 사건과 베벨 광장
프란조이쉬 역에서 내려 한참 헤맨 끝에 베벨 광장을 찾았다. 관광객은 물론 웬만한 독일 시민도 이곳을 모르는 것이 이상하기까지 하다. 찾고 나면 별 것 아니지만 매번 물어볼 수도 없으니 초행 솔로 여행자에게 장소 찾기는 고역이다.
헤드빅 교회와 훔볼트 대학 건물로 둘러싸인 멋진 광장이지만 사실은 1933년 5월 히틀러의 분서(焚書, book burning)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공산주의 서적, 유대인(猶太人) 저자의 저서가 몽땅 불태워졌다. 베벨 광장에서뿐 아니라 독일 대학가에서 폭넓게 이뤄졌다고 한다. 베벨 광장은 과거 도서관이 있었고 훔볼트 대학 건물이 늘어선 곳이기에 분서 사건이 시작됐다.
▲베벨 광장에서 한두 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콘체르트 하우스(왼쪽)와 도이치 돔. 웅장하고 우람하면서도 기교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 사진 = 김현주
몽골 군이 바그다드 함락 후 장서를 티그리스강에 버린 사건,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로마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도서관을 불태운 사건과 함께 베벨 광장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악명 높은 분서 사건으로 꼽힌다. 광장 바닥 한 곳에는 유리판 아래 지하에 텅 빈 서고를 꾸며 분서 사건을 상징했다. 또한 광장 몇 군데에 분서 사건을 기록한 기념판을 새겨 박았다.
베벨 광장에서 한두 블록 떨어진 곳에는 도이치 돔과 프란츠 돔이 광장을 마주 보고 서 있다. 그 중간에는 웅장한 콘체르트 하우스가 있다. 우리나라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은 명함을 내밀기에 무척 쑥스럽다. 마주보는 두 돔은 아무리 봐도 꼭 닮은 쌍둥이 건물이다. 독일의 랜드마크 건물은 나라 크기에 걸맞게 웅장하고 우람한 대신 기교가 적은 것이 특징이다. 이 나라 국민성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정리 = 김금영 기자)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