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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베를린-폴란드]섬뜩 아우슈비츠 곁에 아름다운 옛수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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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44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5.08.20 08:53:54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지난 호에 이어 베를린 13일차 여행 여정을 소개한다.

베를린 돔과 알렉산더 광장

어렵게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며 베를린 돔을 찾아 갔다. 돔이라기보다는 성당이다. 주변에는 알테스 박물관, 그리고 조금 멀리 니콜라이 교회가 보인다. 돔에서는 오늘도 연주회가 열린다. 유럽 어디서든 그렇듯이 클래식 연주회는 교회 건물을 중심으로 열린다.

베를린 돔에서 10분 걸으니 알렉산더 광장이다. 가는 길 강변에 DDR(동독) 박물관이 있다. 구 사회주의 동독의 생활 체험관이다. 전시물 중 구동독의 국민차라고 불렸던 트라반트(Trabant, 일명 Trabi) 자동차가 인기 있다. 알렉산더 광장은 독일 통일 이전 동베를린 중심지였던 곳으로, 1805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베를린 방문을 기념해 이름 붙였다.

베를린 장벽 철거의 현장, 포츠담 광장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포츠담 광장으로 이동했다. 독일 최고의 현대 건축물이 즐비한 곳이지만 홍콩, 싱가포르, 상하이, 도쿄, 혹은 서울의 그것보다 나을 것은 없다. 포츠담 광장은 베를린 장벽이 처음으로 철거된 곳이다. 1989년 11월 11일 밤 수만, 수십만 동서 베를린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징적인 철거 작업이 이뤄진 곳이다. 이제 광장에는 동서를 갈랐던 흔적은 방죽으로만 조금 남아 있을 뿐, 도심 재개발이 한창이다.

포츠담 광장에서 브란덴부르크 문 방향으로 한참을 걸으니 유럽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이 나타난다. 도심의 넓은 면적을 아낌없이 할애해 2700여 개의 대리석 덩어리를 놓았고, 반 지하에는 전시관을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이렇게 도시 곳곳에 참회의 상징물을 조성해 놓았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삼엄한 철조망이 눈길을 끈다. 조명탑과 망루, 그리고 건물 28동으로 구성됐다. 사진 = 김현주

학문·예술 도시 여는 브란덴부르크 문

곧 브란덴부르크 문이 나타난다. 사진에서 봤던 것에 비해 규모는 작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입구를 본 따 1789년 건축했다. 베를린이 새로운 아테네, 즉 학문과 예술의 도시가 됐음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브란텐부르크 문은 베를린의 영광보다는 굴곡진 베를린 역사를 말해 준다. 2차 대전 폭격으로 부서졌고, 냉전 시대에는 동서 분할의 상징이었다. 그러면서도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Ich bin ein Berliner’, 즉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 연설과, 로날드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이 모두 여기서 이뤄진 것을 보면 세계 자유민주주의 승리의 현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베를린 돔에서 알렉산더 광장으로 가는 길 강변에 있는 DDR(동독) 박물관. 구 사회주의 동독의 생활 체험관이다. 전시물 중 구동독의 국민차라고 불렸던 트라반트(Trabant, 일명 Trabi) 자동차가 인기 있다. 사진 = 김현주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도시 탐방을 마치고 짐을 찾으러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버스가 전승 기념탑(Siegessaule) 로터리를 지나기에 얼른 내려 사진을 몇 장 찍었다. 프로이센이 덴마크(1864), 오스트리아(1866), 프랑스(1870, 1871)와 치룬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1873년 건립했다. 전승기념탑 로터리 주위에는 프로이센의 ‘철혈(鐵血) 수상’ 비스마르크의 동상이 있다. 동상 뒤에는 누군가 ‘역사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History is near dead)’라는 낙서를 뿌려 놓았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 왕국을 키워 독일을 통일하고 강국으로 성장시킨 인물 정도로 알고 있는 나로서는 낙서의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버스는 티어가르텐을 지나 동물원(Zoologische Garten)에 도착한다. 티어가르텐은 옛 왕실 사냥터로서 베를린 시내 중심에 길이 4km, 폭 1km로 조성해 놓은 거대한 공원이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찾아 베를린 중앙 버스터미널에 나와 저녁을 든든히 먹고 버스를 기다린다. 밤이 깊어갈수록 버스가 하나 둘 떠나니 터미널은 고요해진다. 이렇게 하루 종일 빗속을 뚫고 악전고투한 베를린 탐방이 끝난다. 분단을 마감하고 우뚝 솟은 독일과 그 수도 베를린을 느끼고 또 느낀 하루였다.

▲베를린 돔 주변에 알테스 박물관, 니콜라이 교회 등이 있다. 유럽 어디서든 그렇듯이 연주회는 교회 건물을 중심으로 열린다. 사진 = 김현주

폴란드행 국제버스

밤 11시 45분 떠나는 폴란드행 버스는 어디에서 왔는지 이미 거의 만석이다. 독일의 웬만한 지역을 다 들른 뒤 마지막으로 베를린을 지나는 국제 버스인 것이다. 오늘은 금요일 밤 아닌가? 그런 사정이라면 마지막 한 자리라도 좌석이 남아 있다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폴란드 크라쿠프까지 심야 버스 10시간…. 아마도 오늘 밤이 이번 여행 중 가장 힘든 시간이 될 것 같다.

유럽 버스 여행은 힘들지만 색다른 경험이다. 오늘 밤 베를린-크라쿠프 구간이 마지막 버스 여행이다. 그 이후는 모두 항공기 이동이다. 어디나 그렇듯 장거리 버스는 서민들의 이동 수단이다. 폴란드행 버스의 승객들은 생김새로 봐 의심할 바 없이 모두 폴란드인이다. 바로 옆 나라일 뿐인데 어쩌면 이렇게 생김새가 다를까? 독일 각지에서 힘든 타향 생활을 하는 폴란드인일 것이다. 버스 짐칸을 가득 채운 수하물 보따리를 보니 승객은 대부분 주말을 맞아 이런 저런 사연으로 고향 방문길에 오른 폴란드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전히 내리는 빗속을 뚫고 버스는 또 다른 낯선 여행지 폴란드를 향해 도시를 벗어난다.

14일차 (크라쿠프, 아우슈비츠)

폴란드 글리비체에 첫걸음

밤새도록 크고 작은 폴란드 도시를 들르며 달려온 버스는 오전 7시 45분, 베를린 출발 8시간 만에 폴란드 남서부 글리비체에 도착한다. 여기서 버스를 갈아타고 2시간 남짓 더 가면 크라쿠프다. 폴란드는 인구 3900만 명, 면적은 남한의 3배가 조금 넘는다.

▲베를린 돔에서 10분 걸으면 알렉산더 광장이 나온다. 독일 통일 이전 동베를린 중심지였던 곳이다. 1805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베를린 방문을 기념해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사진 = 김현주

아, 아우슈비츠

크라쿠프 버스 터미널 짐 보관함에 여행 가방을 넣고 12시 45분 아우슈비츠(폴란드 지명으로는 오슈비엥침, Oswiecim)행 버스에 오른다. 아우슈비츠 가는 도로는 한적한 전원 풍경으로 이어진다. 아우슈비츠는 800년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고도인데 도대체 어쩌다가 홀로코스트(Holocaust)의 상징이 됐단 말인가? 여기는 독일인이 혐오했던 폴란드 땅이고, 독일과 거리가 가깝고 또한 유럽 전역 나치 점령 지역으로부터 비교적 중심적인 위치여서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2차 대전 직전 폴란드 인구 3000만 명 중 330만 명이 유대인이었을 만큼 폴란드에 유대인이 많았던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박물관 입구 첫 안내판은 폴란드어, 영어, 히브리어로 적혀 있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 진입으로 해방되고 1947년 7월 2일 폴란드 의회가 박물관으로 지정했다는 내용이다. 나치는 제 1수용소의 인원이 넘치자 3km 떨어진 곳에 제 1수용소의 10배 규모로 제 2수용소를 지었다. 빨간 벽돌 건물들로 구성된 제 1수용소 입구 철문에는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를 얻는다)’라고 적혀 있다. 오늘따라 수용소 안은 바람이 스산해 기분이 이상하다. 밤엔 등골이 오싹할 수도 있겠다.

▲역사의 현장 브란덴부르크 문. 베를린이 새로운 아테네, 즉 학문과 예술의 도시가 됐음을 선언하는 의미에서 고대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입구를 본 따 1789년 건축됐다. 사진 = 김현주

수용소는 사방이 이중 철조망으로 둘러싸였고 중간 중간 조명탑과 망루, 그리고 건물 28동으로 구성됐다. 영화에서 많이 본 바로 그 풍경이다. 수용자 130만 명은 유대인 110만, 폴란드인 14만~15만 명, 집시(Romas) 2만 3000명, 소련군 포로 1만 5000명, 그리고 각국 전쟁포로 2만 5000명으로 구성됐고 그 중 110만 명이 가스실에서 살육당한 것으로 돼 있다.

멸종, Extermination

‘유대인은 멸종돼야 한다.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 집시, 폴란드인, 러시아인을 몰아내야 한다’는 등 나치 지도자의 광기 어린 문구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준다. 수용자는 전쟁 중 중립을 표방한 스위스, 스웨덴, 이베리아 반도, 그리고 국민 투표로 유대인 추방을 막은 불가리아를 제외한 나치 점령 지역과 나치 주축국(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유럽 전역에서 실려 왔다.

▲포츠담 광장에서 브란덴부르크 문 방향으로 걸으면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이 나온다. 2700여 개의 대리석 덩어리를 놓았고, 반지하에는 전시관을 만드는 등 도시 곳곳에 참회의 상징물을 조성했다. 사진 = 김현주

산더미처럼 쌓인 수용자들의 안경, 의수와 의족, 그릇과 주전자 등 개인 용품들이 이른바 ‘멸종(extermination)’의 광기를 말해준다. 여성의 머리카락을 수거해 만든 직물이나 망(網)이 전시돼 섬뜩하다. 한 통으로 400명을 죽였다는 가스통 또한 수백, 수천 개 쌓여 있다. 제1수용소에서 시작된 가스실과 시신 소각장이 굴뚝과 함께 재현됐다. 수용소 건물 뒤편 담장 가까운 곳에는 수용자를 총살한 콘크리트 벽이 탄흔을 그대로 품은 채 서 있고, 벽을 따라 오늘도 많은 꽃이 바쳐져 있다.

나치는 패전이 임박해 오자 많은 수의 수용자를 독일 지역으로 옮겼으나 미처 소개하지 못한 수용자는 소련군에 의해 해방을 맞는다. 인간이 원래 이렇게 잔인한 존재인가 의구심을 갖는 동안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에서 저지른 만행도 잔인함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포츠담 광장 인근에서 베를린 장벽 일부를 발견했다. 포츠담 광장은 1989년 11월 11일 수십만 동서 베를린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를린 장벽이 처음으로 철거된 곳이다. 사진 = 김현주

폴란드 옛 수도 크라쿠프

크라쿠프로 돌아와 예약해 둔 호텔을 찾아간다. 크라쿠프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다. 1596년 바르샤바로 수도가 옮아가기 전까지 폴란드의 수도였던 만큼 옛 정취가 물씬 풍긴다. 호텔방에 여행 가방을 던지고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도시를 보기 위해 나왔다.

우선 중앙시장 광장(Rynek Growny)으로 나간다. 구시가지 중앙에 자리 잡은 광장은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직물회관을 가운데 두고 넓게 펼쳐진다.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 다음으로 유럽에서 넓다고 한다. 광장 주변은 옛 귀족들의 저택이 둘러쌌다. 크라쿠프 건물들은 중후하고 기품이 있다. 유럽 도시마다 나름대로 특색 있는 건축물을 만들어 놓은 유럽인의 솜씨가 여기서도 빛난다. 광장에는 성마리아 교회(Bazylika Mariacka)가 아름다운 첨탑을 자랑하며 서 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건물 뒤 편 담장 가까운 곳에는 총살 장소로 쓰던 벽이 있다. 벽에는 탄흔이 그대로 남겨져 있고, 벽을 따라 많은 꽃이 바쳐져 있다. 사진 = 김현주

아름다운 폴란드 여성

광장은 주말 밤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하다. 고급 식당마다 작은 연주회가 열려 여행자를 유혹한다. 어디서나 그렇듯 시내 중앙엔 공원이 있고 그 가운데 분수가 있다. 공원 길을 천천히 걸어 호텔로 돌아오며 폴란드 옛 수도가 내뿜는 여름밤 정취를 맛본다. 주말을 맞아 한껏 멋을 내고 거리에 나온 폴란드 아가씨들이 참 아름답다. 러시아 여성 다음으로 용모가 빼어나다는 세간의 평가가 맞나 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보기 위해 지나가는 길에 하룻밤 우연히 들른 도시지만 크라쿠프는 숨겨놓은 진주처럼 영롱하게 빛난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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