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가] 하피첩, 10년 험로 끝 박물관 품에
국립민속박물관 “개인소장 되면 사라지므로 낙찰”
▲10월 13일 언론공개 설명회에 나온 하피첩. 사진 = 왕진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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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왕진오 기자) “삶을 넉넉히 하고 가난을 구제할 수 있기에 이제 너희들에게 주노니 너희는 소홀히 여기지 마라. 한 글자는 근(勤)이요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전답이나 비옥한 토지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하지 않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1810년 가을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부인 홍 씨가 보내온 치마를 잘라 작은 서첩을 만들고 두 아들 학연과 학유에게 전하고픈 당부의 말을 적은 보물 제1683-2호 ‘하피첩’의 글 중 하나다.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최대 실학자이자 개혁가인 정약용의 친필 서첩인 하피첩이 국가기관의 품으로 들어온 이후 보존과 향후 계획에 대해 관심이 커지고 있다.
하피첩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5년 수원에서 폐지를 수집하던 할머니의 수레에서 우연히 발견된 뒤 TV 프로그램 ‘진품명품’에 나오면서였다. 이후 10년 만인 올해 9월 14일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압류한 물품을 서울옥션이 공매하면서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작품의 가치를 알아본 국립민속박물관은 1년 유물 구입예산 28억 중 7억 5000만 원을 들여 구입에 나섰다. 서울옥션의 경매 현장을 찾아 최종낙찰을 받은 김인규 국립민속박물관 유물과학과 과장은 “한 가족의 삶, 가치관, 당시 시대의 모습이 담긴 유물로, 국민 모두가 누려야 할 공공자산임을 감안했습니다. 내부 회의를 거쳐 유물 구입 예산 중 최대 10억 원까지 집행할 수 있다는 의견을 모은 후 응찰했고 낙찰까지 받았다”고 그간의 과정을 설명했다.
국립민속박물관 구입예산의 40% “투척”
경매 종료 뒤 일부에서는 ‘하피첩’의 낙찰자가 경기도 남양주시 소재 실학박물관이나 개인 컬렉터일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지만 최종 낙찰자는 결국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밝혀졌다.
하피첩에 쏠린 시선 때문에 응찰에 나선 국립민속박물관 측은 일반 응찰자들이 참여하는 경매 객석이 아니라 경매사가 마련해준 별도 공간에서 중계 화면을 보며 전화로 응찰했다.
▲3개의 첩으로 구성된 하피첩. 사진 = 국립민속박물관
서울옥션 측은 “국보급 유물이나 고가 경매품의 경우 응찰자 중 다수가 기관들입니다. 현장에서 공개적으로 경매에 참여하는 걸 불편해하는 이들을 위해 경매현장 상황이 중계되는 모니터가 비치된 VIP 룸을 제공하곤 합니다”고 설명했다.
앞서 경매 주최 측은 고서화 경매에 일반 개인과 개인 재산으로 설립된 종교재단의 응찰을 제한했다. 반면 국공립 미술관 및 박물관, 문화체육관광부에 등록된 문화재단 및 문화재단 소속 미술관, 종교재단, 사립미술관 및 박물관, 공공성을 지닌 비영리 단체에 한해 응찰 자격을 부여했다.
서울옥션 측은 “보물급 유물이 18점이나 대거 출품된 경매에 여론이 집중됐고, 문화유산이 개인에게 낙찰되면 재판매되거나 수장고에 들어가 빛을 볼 수 없게 되기 십상이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어버이 자취 묻은 국민의 유물”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유물이 된 하피첩은 모두 3개 첩으로 구성됐다. 3첩의 하피첩 중 1첩의 표지는 박쥐문·구름문으로 장식된 푸른색 종이로 되어 있다. 나머지 2첩은 미색 종이로 장황(책의 표지 장식)되어 있다.
첩 내부에 쓰인 직물은 평직(옷감을 짜는 직조 중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방법)의 비단이며, 바느질했던 흔적도 발견된다. 갈변된(섬유 및 그 제품이 갈색을 띠는 것) 상태로 보이지만 미세하게 적갈색을 띄고 있어 하피첩 재료로 사용된 치마의 염색 흔적으로 추정된다.
▲9월 14일 서울옥션의 고서화 경매에서의 하피첩 낙찰 순간. 사진 = 왕진오 기자
이 첩은 제작 이후 한 번도 수정되지 않은 상태로 추정된다. 따라서 1810년 당시의 첩 장황 양식 및 사용됐던 장식 종이들을 짐작하게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은 그동안 개인 소장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던 하피첩을 인수받은 뒤 문화재 보존 팀이 유물의 보존 상태를 살피고 처리를 마친 뒤 내년 2월경 박물관에서 특별전을 개최해 국민에게 공개할 방침이다.
아울러 하피첩의 폭넓은 활용을 위해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복제를 실시할 계획도 전했다. 공공 목적을 위해 복제가 필요한 공공기관을 파악해 그 기관에서 복제할 수 있도록 협조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더 많은 국민이 볼 수 있어 명실상부한 국민의 공공자산으로 향유될 전망이다.
“앞으로 평가 더 높아질 것”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관장
“민속학적으로 중요한 사료라는 판단에 박물관 개관 이래 가장 높은 금액인 7억 5000만 원을 사용하게 됐습니다. 긍정적 평가가 미래에 더 높아질 것입니다.” 서울옥션 경매를 통해 하피첩을 구입한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관장의 소감이다.
10월 13일 진행된 하피첩 공개설명회에서 만난 천진기 관장은 “중요한 유물이 국가박물관에 들어왔고, 국민들이 언제든 볼 수 있을 때 볼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유물 구입의 가장 큰 장점이 될 듯 합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10월 13일 하피첩 공개설명회에 함께한 천진기 국립민속박물관 관장. 사진 = 왕진오 기자
국립민속박물관의 유물 구입 예산은 한 해 28억 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전체 가용예산의 40%를 집행할 만큼 가치를 두었다는 반증이다.
천 관장은 “다산 정약용 관련 유물이 희소한 상태에서 시장에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실학박물관이 구입할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는데, 그곳의 예산이 너무 적어 구입 계획을 철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하피첩 구입을 계기로 적은 비용의 유물만 구입한다는 대외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낸 것도 소득”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중요 유물의 수집과 연구를 충실히 한 쾌거입니다. 사립박물관이나 개인에게 돌아갔다면 영영 실체도 볼 수 없었을 유물의 운명을 우리가 돌려놨으니까요”라며 “유물 스스로도 이제 더 이상 팔자 험하게 떠돌아다니지 않았다며 안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고 소감을 밝혔다.
천 관장은 하피첩이 가진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2016년 2월부터 홈페이지를 비롯해 다양한 전시나 학술행사를 통해 다산 정약용의 사상과 삶의 모습을 킬러 콘텐츠로 육성할 계획도 전했다.
왕진오 기자 wangpd@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