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 졸업전시회 - 리뷰 ① 비물질 vs 물질] “새파란 아무개여, 청춘을 말해다오”
▲홍익대 조소과 이해림, ‘Dreaming Frog’, 90 × 90 × 120cm, 우레탄, 시멘트, 스티로폼, 물, 2015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김연수 기자) 기자가 미술 대학에 다니던 시절, 독립 큐레이터였던 한 강사가 첫 수업 인사가 끝난 직후 이야기했다. “여러분,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림은 30호 사이즈가 가장 잘 팔리고, 조각은 세단 자동차에 들어갈 정도로 만들어야지 팔릴까 말까 합니다.”
당시는 영국의 YBA(Young British Artists)의 전 세계적 열풍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였다. 한국 미술계 역시 트렌드에 맞춰 주변의 사소한 일상들로 자신을 표현하거나, 보기 꺼려지는 것들, 사회에서 금기시 되는 것들을 거르지 않고 내보이는 등의 시도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서 영상이나 장소특정성이 강조된 설치 혹은 큰 스케일의 작업이 필요했음은 물론이다.
학생들은 결국 예쁘고 작게 그리고 만들어 팔라는 강사의 말이 현실적이고 걱정에서 비롯된 조언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짐작하면서도 아직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표현해도 될 나이라는 것 또한 잘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술뿐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나 그렇듯, 사회에 내던져진 예비 작가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많은 수가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굽히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방식과 타협하며 작업 활동을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전 세계 경제의 저성장 국면은 미술 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괴리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은 작가들 스스로 창작의 범위에 한계를 두게 할 뿐 아니라, 현재의 대중문화에서 볼 수 있듯 다양하지 못하고 획일화된 한 두 개의 장르만 살아남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서울대 서양화과 남수빈, ‘무제’, 싱글 채널 비디오, 2015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미술계가 주목해야 할 곳은 더 젊은 작가들이다. 그 중에서도 아직 자신의 신념을 순수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학생들에게 그 답이 있다. 알다시피, 영국의 미술계가 2000년대 이후로 세계의 미술 판도를 바꿀 수 있었던 계기는 찰스 사치라는 컬렉터가 학생들의 작품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까지도 꾸준히 미술대학의 졸업전시를 돌아다니며 작품을 컬렉트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본지는 2015년 미술대학 졸업전시를 돌아보는 시리즈 기획을 마련했다. 시리즈는 총 3편으로, 미술 대학들의 졸업 전시를 돌아보며 눈에 띄는 작품을 골라 소개하고, 작품 경향의 특징을 살펴보는 방식이다. 시리즈 첫 회는 올해 졸업전시의 특징을 ‘비물질 vs 물질’로 잡아봤다.
비물질적 작업의 강세
미대생들이 졸업 이후 현실의 미술 시장에서 느끼는 괴리감만큼, 대중들이 현대미술을 감상하기 위해 전시장을 방문했을 때 느끼는 괴리감 역시 매우 크다. 흔히 알고 있는 미술은 물감으로 그린 그림 또는 나무나 돌, 흙 등 단단한 재료로 만든 조각이다. 그러나 현대 미술로 분류되는 작업일수록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 통념과 빗나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괴리감의 원인 중 하나는 ‘물질, 물성’의 유무라 할 수 있다. 관객은 보통 작가가 표현을 위해 사용한 물질(재료)을 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지금의 전시장에는 시간이 뒤죽박죽 뒤엉킨 분절된 영상들, 또는 자신의 집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이 어질러져 있는 경우가 많다.
▲홍익대 조소과 박선희, ‘보편적’, 흙, 유리, 합판, 알루미늄 프로파일, 2015
이러한 경향은 학생들의 작품전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런 작품들은 순간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관념들을 표현한다. 이런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 영상을 들여다보거나 설치된 작품 사이를 돌아다니는 노력이 필요하다.
주목할 점이 있다면, 회화 등의 평면 작업을 하는 학과는 영상작업의 비중이 높고, 조각 등의 입체조형을 하는 학과는 오브제 설치의 비중이 높았다는 점이다. 영상 매체 및 사진 또는 설치가 새로운 표현방법으로 제시되기 시작했을 때, 평면과 입체가 혼재돼 사용되던 것과는 달리, 최근 들어서는 ‘입체는 장소의 특성이 강조된 설치작업, 평면은 영상 및 사진’ 형태로 고착화 되는 양상이다.
▲국민대 회화과 서현지, ‘Cleavage Plane’, 싱글 채널 비디오, 2015
다른 한편에선 성질이 쉽게 파악되는 재료를 사용해 표현한 작업들이 있다. 관객들이 그나마 더 익숙하게 여기는 작품들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두 종류로 나뉘는데 흔히 ‘추상’과 ‘구상’이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추상은 그야말로 물질의 성질(물성)에 의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들이 작업을 하다보면 재료가 가진 성질에 종종 압도당하곤 한다. 재료 자체가 가지는 질감의 매력도 있지만. 그보다는 작가들의 행동에 따라 재료가 반응하는 결과가 속성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맞는 재료 선택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물질적 작업 - 추상과 구상
추상 작업의 특징은 행동의 결과물로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 행동은 하나의 주제를 그려서 표현하겠다는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주제에 어울리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다. 덧붙여, 그로부터 비롯된 결과는 우연적인 것이다.
추상회화는 모더니즘 이후로 계속된 스테디셀러 장르다. 각 대학의 평면작업 전시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인간의 육체가 존재하고 이 세상의 재료들이 다 소진되지 않는 이상, 독보적인 장르로서 계속 존재할 듯하다.
▲국민대 입체미술과, 장해미, ‘Beyond the Space’, 철. 각봉, 문, 가변 설치, 100 × 200 × 440cm, 2015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업군은 구상회화 및 조각이다. 이들에겐 구체적인 형상과 말로써 정의될 수 있는 구체적인 주제가 있다. 작가는 깔끔하게 정제된 하나의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가 보는 이에게 제대로 전달되도록 숙달된 기술을 사용해 표현한다. 작가의 감정과 생각이 잘 드러나는 구상회화는 은유와 상징, 색감, 구성 등에서 작가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엿보게 한다.
구상 조각의 경우, 90년대 말까지만 해도 돌과 나무 같은 자연재료를 사용하거나, 흙으로 모델링을 한 후 저렴하게 캐스팅할 수 있는 합성수지를 사용한 작품이 많았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와 합성수지 사용 시 보강재로서 사용하는 유리섬유의 유해성이 부각된 이후, 캐스팅의 주재료로서 저렴하게 쓸 수 있는 재료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더불어, 브론즈(동) 같은 비싼 재료를 쓸 수 없는 학생들 사이에서 구상 조각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 형편이다.
▲홍익대 서양화과 장지윤, ‘아빠10’, 91 × 91cm, 캔버스에 오일, 2015
▲국민대 회화과 이성미, ‘Eternity’, 130 × 97cm, 캔버스에 오일, 2015
전시를 돌아보면서 깔끔하게 정리된 상업 갤러리에 놓인 작품들과 비교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진을 찍으려면 어수선하게 작품 옆에 놓인 축하 꽃다발들을 치워야 했고, 다른 작품이 앵글에 걸리는 통에 그나마 괜찮은 각도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대학교 졸업전시에서 외부 갤러리 같은 세련됨을 바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래되고 한정된 크기의 건물 안에서 여러 명이 복닥거리며 작품 놓을 자리를 의논한 흔적이 보였다.
예비 작가들의 가능성
시리즈 첫 회에서 물질과 비물질로 분류해 학생들의 작품을 바라본 이유는, 그것이 그들 작품의 특성일 뿐 아니라, 졸업 후 그 방식 그대로 작가로 데뷔했을 때 미술계 안에서 활동 영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보통 ‘비물질’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흔히 개념, 설치미술 작가로서 교수 혹은 강사를 하거나 또는 각종 공모를 통해 지원금이나 작업실을 후원 받아 활동한다. 후자의 ‘물질’ 작업을 택하는 경우는 형체가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기에 판매를 할 수 있다. 어떤 경우가 더 최신 유행이고, 더 깊이가 있으며, 또는 윤택한 생활을 보장한다고는 절대 단정 지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들 스스로가 만족스런 방법으로 작업을 하느냐이며, 관객 역시 각자가 좋아하는 미술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의 입장에 선다면 학생들의 작업도 조금 더 관대하게 관람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김연수 기자 hohma00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