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던시展 탐방 ①] “응답하라, 미술관 옆 레지던시”
난지 9기 레지던시 vs OCI 5기 창작스튜디오
▲윤성필 개인전 ‘넓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전경. 2012. 사진 = OCI창작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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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윤하나 기자) 미술 작가가 작업실을 결정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첫째는 활용성 높은 빈 공간, 둘째는 바로 월세. 아니, 이 둘의 순서가 뒤바뀌어야 알맞다. 문제는 얼마의 월세든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작가에게 있느냐다. 작업만으로 작업실 운영이 가능한 소수의 작가들을 제외하고, 대개의 경우 생업 혹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작업한다. 따라서 생활비로도 충분치 않은 돈으로 월세를 감당하기에 운영이 어렵다. 어렵게 경비에 맞춰 구한 작업실은 또 고립될 위험이 있다. 싼 월세 때문에 중심지에서 멀어진 작업실은 방문하기 힘들어 작업을 쉬이 내보일 수조차 없다. 이 두 가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PART 1. 몸 누울 곳 아닌 작업할 곳 찾는 작가들
국·내외를 막론하고 각종 국·공립 기관, 학교 및 지역공동체가 이런 작가들을 유치해 공간을 내어준다. 지원으로 이뤄지는 예술가를 위한 창작 공간(이하 레지던시)을 대개 무상으로 제공하거나, 사용에 따른 관리비 등을 요구한다. 어떤 해외 레지던시들은 일정 규모의 숙박비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들의 운영 목적은 기본적으로 예술가의 지속적인 창작을 도모하는 데 있다. 주최하는 기관의 성격에 따라 주요 목적을 달리하기도 한다.
해외 박물관은 한두 명의 예술가를 초청해 박물관 안에 공간을 내어주고, 소장품 등의 형태로 작가가 박물관에 기여하길 바란다. 이런 경우 작가에게 일정 경비도 지원한다. 해외 유수의 미술학교들도 교육 및 전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작가를 초청해 학생들과 교류하며 좋은 영향을 미치도록 이끈다.
▲손혜민, ‘잠든 이웃을 깨우지 마시오’. 사진 = 난지창작레지던시
또는 지자체 및 지역 공동체가 자국은 물론 해외의 작가들을 초청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지역의 상징성 있는, 그렇지만 현재 이용되지 않는 공간 등을 작가에게 내어주는 식이다. 작가들 입주로 인한 지역문화 활성화를 기대하고, 버려진 공간의 생산적인 재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간혹 도시에서 먼 지역의 경우, 문화적 변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행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부수적 효과로 지역 공동체에겐 관광객을 유치하는 수단이 되거나, 마을 연계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민에게 문화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또한 작가들에겐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는 여행이 되는 동시에 새로운 환경에서의 작업적 환기를 가능케 한다.
작업할 공간과 실질적 교류 지원하는 레지던시
소장품 제공-지역문화 활성화 등 서로 윈윈 전략
대개는 미술 관련 기관, 즉 미술관, 국·공립 문화재단 및 갤러리가 적극적으로 레지던시를 운영하고, 작가들도 여기에 주목한다. 이는 작가에게 단순히 쾌적한 공간만 필요한 것이 아니란 걸 반증한다. 결국 작가에겐 작업할 공간과 ‘실질적 교류’가 절실하다. 미술 기관이 진행하는 레지던시는 대개 함께 선발된 다른 작가들과 기관 내부의 전문 인력, 그리고 기관이 초청하는 다양한 미술계 인사들에게 언제나 노출된다. 작가의 작업은 고독하게 이뤄질지언정, 작업과 작가 자신을 세상에 내보이기 위해서는 미술 세계의 생리 파악과 자기 홍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레지던시들은 각종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작가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려 한다.
이렇게 다양한 이점으로 유행처럼 번지던 레지던시 열풍은 최근 이전에 비해 열기가 식은 듯 보인다. 레지던시 운영 기금의 불안정성 뿐 아니라 몇몇 작가들은 겉으로 보이는 만큼의 메리트를 체감하지 못하는 등 예전만큼 절대적인 관심을 받고 있진 않다. 내부적으로 회자되는 레지던시의 문제점은 몇 가지로 추릴 수 있다. 첫째, 레지던시 간의 중복작가 선정(연도를 달리하며 같은 작가가 돌아가며 입주하는 등)으로 새로운 작가를 소개할 기회가 줄고, 입주 작가 라인업이 식상해지면서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커지고 있다.
둘째, 미대 졸업을 앞두고 입시처럼 레지던시 입주를 목적으로 하는 작가 입시생들의 등장이다. 이들은 입사 시험을 보듯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입주 달성을 위해 필사적으로 정보를 구한다.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여러 큐레이터들의 공통된 의견 중 하나는 “매년 입주 지원자들 중 작가로서의 진지한 작업 구상보다 작가 취준생으로서 스펙 쌓기를 위한 단기 완성 포트폴리오가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역량 있는 작가들이 추려지게 되고, 그 수가 한정돼 새로운 작가들을 선발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또한 처음 입주하는 신인 작가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저명한 작가를 (작가가 직접 입주 공모에 지원한 경우) 일부러 입주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는 여전히 작업실이 필요한 역량 있는 작가와, 모험심 넘치는 신진 작가 사이의 시너지를 기대하기 때문일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저명한 작가도 여전히 재정적, 공간적 제약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현실적인 추론도 가능하다. 이런 이슈들에도 불구하고 레지던시는 일회성 전시 공모보다 더욱 실질적으로 작가들을 위한 등용문 역할을 하기에, 꾸준히 작가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번 주에 함께 열린 두 레지던시의 2015년 입주 작가 보고전을 통해 현재의 레지던시와 그 현장에서 작업을 펼치는 작가들을 살펴봤다.
PART 2. 레지던시 리뷰전 현장
실험적 작업 구현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난지 9기 레지던시 리뷰전 : ‘구사구용(九思九容)’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는 2006년 개관한 서울시립미술관의 대표적인 예술가 창작 지원 프로그램이다. 2015년 한 해 동안 난지 레지던시에 입주했던 작가들이 그동안 제작한 작품을 선보이는 ‘구사구용’전은 2013년 개관한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렸다.
김은형, 노상호, 로와정, 박여주, 박정기, 박천욱, 서정희, 손혜민, 송수영, 심래정, 안정주, 유쥬쥬, 이보람, 이우성, 이윤이, 장민승, 장태원, 전소정, 정문경, 조재영, 주세균 총 21명의 입주 작가가 작품을 전시했다.
난지 레지던시 입주 작가들은 현재 미술계에서 전 방위적으로 활동하는 비교적 젊은 작가들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혁오밴드’와 ‘굿즈’전의 인기 작가 노상호부터 2014년 송은미술대상을 받은 작가 전소정, 2016 금호 영아티스트 전시에 참여한 작가 조재영, 2013 ‘젊은 모색’, 2014 ‘아트스펙트럼’에 참여한 작가 심래정 등 낯익은 작가들이 많다.
이들 중 입주 기간 동안 직접 전시를 기획해, 평소와 다른 작업을 실험한 작가들도 많았다. 입주 작가가 직접 전시를 기획, 수행하고 다른 작가의 전시에도 참여할 수 있는 전시 컨퍼런스 ‘난지아트쇼’를 통해서다. 2015년 입주 작가들의 경우 총 7번 전시를 진행했다. 그만큼 입주 작가들이 열의를 갖고 다양한 전시 실험에 참여했다.
전소정 작가의 ‘필사의 필사’도 이 작가 기획 전시를 통해 선보인 작품이다. 작가는 호프만의 소설 ‘악마의 묘약’을 인용해 반복적으로 필사하다가 원래의 문구를 전혀 새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변형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두툼한 캔버스 천 위에 글과 드로잉을 수놓아 책 형태로 제작했다.
한편, 이우성 작가의 작품은 움직이는 천막 그림으로, 쉽게 외부로 이동할 수 있어 밖에서 하는 전시가 가능하다. 정면 돌파를 외치던 작가는 그야말로 민낯의 캔버스 천을 틀에 짜지도 않은 채, 과감한 구도와 색감을 이용해 이미지를 수평적으로 구성한다. 청년의 불안과 불만 등을 그리면서도, 단순하기에 더 시선을 잡아끄는 그의 그림을 외부 어딘가에서 만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드넓은 한강물에 조그맣게 떠 있는 조각배와 멀리 보이는 아파트 전경은 또 어찌나 적막한지.
이번 난지 레지던시 리뷰전은 작가 21명의 개성이 저마다 뚜렷이 살아 있었다. 아마도 언젠가 어딘가 다른 전시장에서 작가의 이름 없이도 그들의 작품을 눈치 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런 기대감이야말로 레지던시 보고전이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성과가 아닐까 한다. 전시는 2월 28일까지.
난지창작레지던시에 대해 박순영 레지던시 담당 큐레이터에게 물었다.
- 입주 작가를 선발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실험 정신과 구체적인 작업 계획이다. 확고한 작업 구상 아래 1년간의 입주 기간을 제대로 활용할 작가를 선발한다.”
- 난지레지던시가 입주 작가에게 제공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창작 공간을 무료로 제공하고, ‘비평 워크숍’을 통해 비평가와 작가가 직접 논의하며 비평 글을 생산하도록 돕는다. 또 작가가 직접 기획해 운영하는 전시 프로그램 ‘난지아트쇼’ 경비를 지원하기도 한다. 미술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하는 전문가 강연 및 멘토링 프로그램과 국제 교류 프로그램, 그리고 후속 지원 프로그램인 ‘프로젝트 지원’ 등이 있다.”
- 입주 지원자에게 전할 말은?
“난지는 지원자에게 포트폴리오 제작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공개한다. 처음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이에게 꼭 필요한 정보로, 이 규격이 요구하는 정보는 다른 미술 기관이 요구하는 포트폴리오 규격에도 기본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므로 참고하길 바란다. 또한 레지던시 입주 준비를 시험대비 모범 답안 찾기처럼 생각하지 말길.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형식은 주목을 끌지 못한다.”
자유로운 공간 속 다양한 페인팅의 변용
OCI 5기 레지던시 입주 작가전 : ‘2016 Cre8tive report’
OCI 창작스튜디오는 인천시 황익동에 위치한 구 경인방송국을 개조한 공간으로, 2011년 처음 등장했다. 매년 8명의 작가가 입주해 자유롭게 작업하는 환경을 제공한다. 5기 입주 작가는 강상우, 권인경, 박경종, 반주영, 범진용, 윤성필, 조현익, 최수진 총 8인이다. 이들 입주작가 보고전 ‘2016 크리에잇티브 리포트(Cre8tive report)’전이 OCI미술관에서 최근 열렸다.
▲강상우, ‘몽실통통 1’. 판지에 유화와 컬러 차콜, 나무, 160 x 230 x 42cm. 2015. 사진 = OCI창작스튜디오
OCI 미술관의 공간적 특성 및 전시 성향과 맞물려 회화 작가의 강세가 엿보이는 가운데, 윤성필 작가의 대형 설치 작품과 강상우 작가의 익살스런 조각 작품이 눈길을 끈다. 윤성필 작가는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설치 조각가로, 동양 철학의 음양을 바탕으로 자력(磁力)을 이용해 작업한다. 아니쉬 카푸를 연상케 하는 비행접시 모양 금속 조각에 자성(磁性)을 띤 물감이나 철가루를 뿌리고, 가벽 뒤 미리 설치한 자석으로 원형의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강상우 작가는 80년대 자신이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장난감이나 TV광고, 만화 등을 소재로 기억을 환원시킨다. 커다란 프라모델 박스를 가상 재현하고 곳곳에 위트 있는 문구를 삽입하는 한편, 박스 겉면에 그려진 영웅 장난감의 조악한 버전이 박스와 같은 등신대로 서 있다. 누가 봐도 박스의 장난감이 조립되고 난 후의 모습이라 유추할 수 있지만, 환상을 배반한 초라한 모습이 자못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회화인 동시에 프로젝터를 이용한 영상 설치 작업을 선보인 박경종은, 페인팅을 기초로 한 다양한 시도를 실험하는 작가로서, 재기발랄함이 돋보인다. 여러 개의 캔버스와 프로젝터를 미리 제작한 비디오에 맞춰 설치했다. 비디오 한 편으로 어느 캔버스엔 조명을 비추고, 어느 캔버스엔 애니메이션 영상이 출력되는 작가의 회화 설치는 강박적인 회화 본능과 맞물려 묘한 설렘을 자아낸다.
▲박경종 작품 설치 전경. 사진 = 윤하나 기자
한편, 이 설치들 옆 칸에 ‘옐로우 페인트’란 작업도 숨어 있다. 노란색 물감과 노란 표지의 책, 그리고 물감에서 송출되는 기이한 퍼포먼스(노란 쫄쫄이를 입은 남자가 춤을 춘다) 영상이 벽에 나타난다. 노란색 삼박자는 작가가 가진 마술적 회화성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누구의 간섭 없이 작가들은 입주 기간 내내 OCI창작스튜디오라는 자유롭고 넓은 공간을 마음껏 누리며 자기 역량을 펼쳤음을 무엇보다 크게 느낄 수 있었던 리뷰 전이었다. 전시는 3월 15일까지.
이지현 부관장 “작가들끼리의 자율적 작업 활동 보장”
OCI미술관의 이지현 부관장에게 OCI 창작스튜디오에 대해 물었다.
- 어떤 작가들이 주로 지원하는가?
“OCI 미술관과 레지던시의 특성을 파악한 회화 작가들이 주로 지원한다.”
- 입주 작가들에게 지원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공간은 무료로 제공되지만, 공간 사용에 따른 공과금 납부가 요구된다. 이밖에 비평가 매칭을 통해 비평글 생산을 돕고 연중 1회 오픈스튜디오를 연다.”
- OCI 레지던시만의 특징은?
“규제나 빡빡한 프로그램 일정 없이 자율적인 작업 활동을 보장한다. 그래서 방목하는 레지던시로 알려지기도 했다. 레지던시가 미술관과 거리적으로 멀기 때문에, 세세한 관리보다 작가들끼리의 자유로운 활동을 권장한다. 또한 전년 입주자 중 한두 명의 작가에겐 입주 기간을 1년 연장할 수 있도록 한다. 새로 입주하는 작가들에게 경험을 전수하는 차원에서다.”
- 최근 입주 지원자들의 공통적인 성향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현실 상황이 많이 반영된다. 최근 비극적이고 우울한 작품들이 대거 등장했다. 다만 이런 흐름 중, 작가만의 개성이 돋보이지 않으면 개별적으로 눈에 띌 가능성이 낮아져 선발되기 어렵다.”
윤하나 기자 heee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