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지난 2015년 단색화가 미술 시장을 뜨겁게 달궜다. 2016년엔 ‘포스트 단색화’로 민중미술과 리얼리즘이 꼽히고 있다. 단발적으로 전시가 열렸던 과거와 달리 가나아트와 학고재갤러리,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 주요 갤러리와 미술관이 잇달아 관련 전시 일정을 발표하면서 민중미술과 리얼리즘이 다시금 화두로 떠올랐다.
리얼리즘(사실주의)은 19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확대된 예술 경향이다. 낭만주의와는 달리, 감성 중심이 아니라 객관적 세계의 정황을 관찰해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의 민중미술은 이 리얼리즘의 연장선상에서, 한국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독자성을 갖춘 장르다. 1980년대를 기점으로 등장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무력 진압 뒤 진보 성향 미술인들이 중심이 돼 민주화운동과 흐름을 함께 해왔다. 만화-판화 등을 중심으로 벽화-걸개그림 등의 형태를 통해 선동성이 강한 모습을 보였다. 올해 이 장르에 주목하는 미술계의 움직임과 주요 성격을 살펴본다.
세계가 주목했지만 국내선 외면
가나아트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 리얼리즘의 복권’전
가나아트는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전환기였던 1980년대~1990년대의 리얼리즘 미술을 오늘의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한국 현대미술의 눈과 정신 - 리얼리즘의 복권’전을 가나인사아트센터 전관에서 1월 28일~2월 28일 연다. 1980년대 한국 리얼리즘의 대표작가 권순철, 신학철, 민정기, 임옥상, 고영훈, 황재형, 이종구, 오치균의 주요 작품 100여 점이 등장한다.
▲황재형, ‘군상’. 판 위에 종이 부조, 122 x 244cm. 1986. 사진 = 가나아트
권순철은 인물과 풍경의 형상을 해체함으로써 얻어낸 리얼리티의 근원에 집중한다. 신학철은 역사의 흐름과 현실의 모순을 독창적인 화법으로 소화한다. 민정기는 추상부터 구상까지 다양한 시도를 통해 사회적 현실과 소외를 드러내고, 임옥상은 격벽하는 시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해석한다. 이종구는 급격한 산업구조의 변화로 붕괴된 농촌을 배경으로 삶의 애환, 분노, 좌절, 희망이 얽힌 현실을 객관적 시각으로 담아낸다.
오치균은 어두운 지하철 풍경이나 슬럼가의 노숙자,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인체를 통해, 치열한 사회의 이면에 자리한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그린다. 황재형은 무거운 노동과 삶의 무게를 지닌 탄광촌의 광부를 주제로, 당대의 처절한 현실을 살아가는 원초적 생명력을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고영훈은 인간의 문명을 상징하는 동서양의 고서(古書)들 위에 자연의 상징인 돌 혹은 시계와 삽 등 오브제를 융합시킨 화면을 통해 실물의 재현을 넘은 독특한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리얼리즘의 복권’전 등 전시 이어져.
복고열풍과 함께 새 주력 상품 될까 주목
가나아트 측은 “예술에서 리얼리티의 재현이란 단순히 실재하는 대상의 외관을 충실히 모사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상을 포함하는 정황에 대한 감각과 인식 전부를 아우르는 총체화 된 경험이라 할 수 있다”며 “이렇게 리얼리즘은 역사를 기록하거나 현실의 재현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시대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진정한 면모를 드러내는 역할을 해왔다. 이번 전시는 그 점에 주목한다”고 밝혔다.
이번 전시 기획에 참여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리얼리즘 미술이야말로 한국 현대미술의 독자성을 보여주는 장르라고 강조했다. 그는 “1980년대는 제도권 미술이 현실에서 벗어나 그저 보기 좋은, 예쁜 그림을 팔던 답답한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 제도권 바깥에서 임옥상, 이종구 등이 시대 현실을 반영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며 “리얼리즘 예술에도, 기존 제도권 아래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현할 수 없었던 시니어 작가들, 그리고 이념으로 무장한 젊은 작가들 두 부류가 있었다. 이들의 작품이 언론에 의해 민중미술로 규정됐는데, 사회적 상황이 몰아가며 덮어씌운 이 장르를 작가들이 받아들였다”고 짚었다.
▲권순철, ‘갯펄 아낙’. 캔버스에 유채, 100 x 72cm, 1975. 사진 = 가나아트
이어 “민중미술은 당시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리얼리즘의 표현이자 한국적 정체성의 표현이었다. 서구에서 한국 현대미술, 특히 민중미술 분야에 관심이 많다. 우리네 삶의 진정한 면모를 그러내는 역할을 해온 이 분야가 정작 80년대 한국에선 외면 받았다. 임옥상의 그림은 정치적으로 불온하게 해석된다고 전시장에 걸리지도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리고 “이번 전시는 험악한 시절을 극복하고 예술 세계를 펼친 그들의 작업을 살피는 형태로 접근했다. 한 시대 한국 사회를 휩쓸었으나, 그때 인정받지 못했던 예술적 가치를 현 시대에 재현하려는 것”이라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은 단색화 이후의 미술 트렌드를 짚었다. 그는 “단색화가 세계 미술 시장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한국 미술의 다양함을 해외에 보여주고자 지난 2015년 단색화에 이어 올해 리얼리즘 전시를 연다”며 “새로운 매력이 있는, 또 하나의 시장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가나아트 측은 “이번 전시는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닌 사회적-시대적-역사적 인식과 각성으로 나타난 한국 리얼리즘의 면면을 살핀다. 또한 이것이 단순히 한 시대나 사회의 한정된 흐름이 아니라, 우리 미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가는 주요한 흐름으로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살피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서울시립미술관, ‘사회 속 미술’전
학고재-광주시립미술관도 민중미술전 계획
서울시립미술관은 서소문 본관 2층 천경자 전시실 옆에 약 200㎡ 규모의 가나아트 기증 작품 전시실을 4월 개설한다. 이는 지난 2001년 고건 시장과 유준상 초대 관장 시절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사장으로부터 200점의 민중미술 작품을 기증받고 상설전시를 해주기로 협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기증작 중 대부분이 1980년대 민중의 삶과 현실을 소재로 그린 작품이다.
▲안창홍, ‘불사조’. 종이에 채색. 1985. 사진 = 가나아트
북서울미술관도 5월 ‘사회 속 미술’(가제)전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 전시는 한국 미술이 가지는 사회참여적 기능의 원류를 80년대로 파악한다. 거대담론이 주도적 힘을 상실한 이후에도 미술의 이런 흐름은 제도 비판, 타자, 시각문화와 일상에 초점을 맞추며 이어졌다. 5월 전시는 이를 ‘이면의 풍경’ ‘호명과 귀환 사이에서’ ‘텔레-비젼’ ‘하루’라는 키워드로 살펴본다.
가나아트가 기증한 200여 점의 민중미술 작품을 통해 1980년대의 역사적 민중미술과 함께, 1990년대 이후의 ‘포스트 민중미술’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정치 미술의 확장과 변화의 양상을 고찰하겠다는 의도다. 서울시립미술관 측은 “미술이 더 이상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지 못하는 이미지 사회에서, 미술은 사회에 대해 발언하고 간섭하며, 참여하는 기능을 증대시켜 왔다”며 “이 전시는 미술의 사회 참여 기능을 살펴보며, 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성찰하는 자리”라고 밝혔다.
학고재갤러리는 민중미술 1세대 서양화가인 주재환(3월)과 민중미술 대표 작가인 신학철(9월)의 전시를 준비 중이다. 이 갤러리는 전속 작가로 소속돼 있는 윤석남의 작품이 영국 테이트 미술관의 2015년도 컬렉션에 포함돼 주목받았다. 윤석남은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대표적 여성주의 화가이자, 민중미술 조직 중 하나인 ‘시월모임’의 일원으로서 활동을 펼쳐온 작가다.
광주시립미술관 역시 올해 주요 계획에 민중미술 전시를 포함시켰다. 조진호 관장은 신년 간담회에서 “올해 국내 대표 작가와 원로 및 작고 작가, 소장품 관련 전시를 열고, 아시아 지역의 민중미술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5.18기념문화재단과 공동 주최로 5월에 본관 3, 4 전시실에서 열 예정인 ‘민주 인권 평화’전이 그 시작이다.
▲임옥상, ‘귀로’. 종이 부조에 먹, 채색. 사진 = 가나아트
한 미술 관계자는 리얼리즘, 민중미술을 선보이는 미술계의 움직임에 관해 “요즘은 거짓과 가식을 싫어하는 시대다. 여전히 현실은 힘들고 차갑고, 그 와중에서 진실을 보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각박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려는 태도다”라며 “이런 사회 현상이 미술계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인다. 과거 금기시됐던 그림에 호기심을 보이고, 이를 들춰내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이어 “또 상품성으로 봤을 때 이런 현상은 복고 열풍과 다르지 않다. 최근 ‘응답하라 1988’이 인기를 끌듯, 1980년대를 되돌아보는 복고 열풍과 더불어 민중미술이 미술 시장의 새로운 상품으로 주목받는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