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전시] 평면인 듯 평면 아닌 2.5차원의 매혹
이승희·김남표 작가의 집요한 시도에 눈길
▲이승희, ‘TAO’. 세라믹, 56.5 x 115 cm. 2014. 사진 = 박여숙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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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김금영 기자) 앞에서 보면 평평하다. 그런데 옆에서 보면 울룩불룩하다. 입체 조각인 듯, 회화인 듯 알쏭달쏭한 매력의 작품들이 전시장에 걸렸다. 조각과 회화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하는 작품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백자 평면 작업 선보여
30년 넘게 도자 작가로 활동해온 이승희 작가가 개인전으로 돌아왔다. 이번 전시의 주요 테마는 ‘백자 평면 작업’이다. 일반적으로 백자라 하면, 입체 도자기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백자 평면 작업이라니, 어떤 형태인지 궁금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3차원 물체로서의 도자기는 하나도 없다. 벽에 줄지어 걸린, 백자의 그림만 눈에 띌 뿐이다. 그런데 이 ‘그림 도자기’가 신기하다. 분명 그림인데, 너무나 또렷하게 입체감이 느껴져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승희, ‘TAO’. 세라믹, 57 x 43 cm. 2014. 사진 = 박여숙화랑
여기엔 여러 비밀이 있다. 우선 그림의 흰 바탕은 그냥 캔버스가 아니다. 흙덩이 판을 도자기 굽듯 구운 것으로, 배경 자체가 도자의 하나다. 이 부분엔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워 흙이 지닌 본연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는 데 주력했다. 이 화면 위에 그려진 백자 또한 울룩불룩 튀어나온 입체적인 형태를 띤다. 흙물을 쌓는 붓질 과정이 겹쳐진 결과다. 그리고 여기엔 유약을 발라 고전 도자기를 재현하는 형태를 취했다.
박여숙화랑 측은 “작가는 유명 박물관과 미술관의 걸작 도자기들을 평면 회화로 재현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단순히 입체를 평면으로 옮기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조형성을 살린 예술적 평면을 구현하고 싶었기에 작업 자체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며 “4~5cm 두께의 흙덩이 판에서 시작해 5mm의 두께를 얻기까지 연속된 실패를 딛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정통 도자 기법으로 3차원 도자기를 2.5차원의 평면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 전시는 그 작품들을 소개하는 자리”라고 밝혔다. 전시는 박여숙화랑에서 3월 18일까지.
이승희 작가 “70일의 붓질로 빚은 백자”
- 이번 전시에서 백자 평면 작업을 선보이는 데 주력했는데,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려요.
“3차원 도자기에 평면 형태를 접목시킨 거예요. 완전한 평면도, 입체도 아닌 두 가지가 결합된 2.5차원 형태죠. 도자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는 화면에 하루에 한 번씩 붓질을 하면서 또 하나의 도자를 구현했습니다. 하루에 한 번씩 붓질을 칠하면서 흙물을 쌓아 올렸는데, 등고선처럼 윗부분은 70번, 더 아래쪽으로 내려올수록 60번, 50번씩 횟수를 줄이면서 입체감을 더욱 생생하게 살렸어요. 각각의 작품이 탄생되는 데 평균 70일이 걸린 것 같네요.”
“30년 넘게 도자 작가로 활동하면서 매일 흙을 주물렀죠. 그런데 도자기라는 한정된 형태의 작품에 제 생각을 모두 담는 데 한계가 있다고 느꼈고, 관객과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래서 제 나름의 해답을 찾기 위해 2008년 중국에서 가장 오래 된 도자기 도시인 장시성의 징더전으로 떠났습니다. 2000년 넘는 도자기 생산 역사를 간직한 곳이에요.
이곳에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같은 아시아권에서 도자 작가로 활동해온 데 나름 자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릴 때부터 서양식 미술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서양 미술에 매료돼 감동을 받았을지언정, 조선시대 또는 중국 명나라 대가들의 작품을 보려고 따로 박물관을 찾은 기억이 없었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래서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 미술관과 박물관을 정말 많이 다녔어요. 이 과정에서 걸작 도자기들의 아름다움에 매료됐고, 이 감동을 단순하게 이야기할 게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착상한 게 백자 평면 작업입니다. 흙물을 입혀 두께를 쌓아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내는 한국의 분청 기법에서 힌트를 얻었어요.”
“박물관에서 본 도자들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상상을 이용하거나, 완전히 새롭게 창조한 형태는 없어요. 일부러 의도한 것입니다. 미술 교과서 등을 통해 익숙한 이미지를 사용해야 더 쉽게 다가갈 거라 생각했어요. ‘저거, 내가 박물관에서 봤는데 형태가 살짝 다르네?’ 이런 식으로 더욱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부분을 염두에 뒀죠. 알고 있는 걸 살짝 비틀었을 때 발생하는 호기심의 힘은 대단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관객과 더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 백자 평면 작업에서 수많은 실패를 겪었다고 하던데요.
“이 작업을 처음 시작하고 실험하는 데 벌써 3년이 걸렸어요. 처음엔 한국 흙으로 시도했는데, 큰 도자기 판을 만들면 자꾸 휘었어요. 흙의 입자가 둥글기 때문이죠. 그래서 중국으로 갔어요. 중국 흙 입자는 길쭉한 형태로, 큰 도자기 판을 만드는 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긴 시간을 보내면서 판 형태를 만드는 데 집중했어요. 처음엔 기술 부족으로 작은 판밖에 못 만들었는데, 최근에는 큰 작업도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나름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흙을 정말 좋아하지만, 나름 콤플렉스도 있었어요. 순수미술이 아닌, 변방 미술을 하는 것 같은 느낌에 항상 ‘주류’에 들어가고픈 욕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흙은 진부해 보인다는 일반인들의 인식도 있었고요. 하지만 백자 평면 작업을 연구하면서 지금은 흙이 제 정체성이 됐습니다. 표현의 한계는 늘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앞으로도 많은 공부를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각화된 회화…‘앤드로지니’전
‘앤드로지니(Androgyny)’전엔 조각화 된 회화 작품들이 등장한다. 이번 전시는 C.P(Carved Painting)가 기획한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C.P는 ‘조각화 된 회화’를 지칭하는 새로운 개념이다. 김남표를 주축으로 만들어진 C.P 프로젝트는 탈평면 회화를 새롭게 고찰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됐다. 1부 전시엔 김세중, 윤두진이 참여해 평면에서 형상이 도드라지는 작업 방식을 위주로 선보였다. 김세중은 회화와 조각의 작업 방식을 동시에 사용해 공간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했고, 윤두진은 부조를 얕게 만들어 평면과 입체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이어서 열리는 2부 전시엔 강준영, 김남표가 참여한다. 두 작가는 다양한 장르들의 교집합을 형성하고, 고유한 매체의 제한적 한계를 극복하는 데 주력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각자의 작품뿐 아니라 협업 작품과 설치도 함께 선보인다. 도자기와 회화, 영상 등 다양한 요소의 결합을 통해 서로 다른 매체가 완전히 다른 장르가 아님을 보여준다.
▲강준영, ‘이야기 +가(哥) - 더 퍼스트 듀티 오브 러브 이즈 투 리슨(The first duty of love is to listen) 2000일 간의 이야기 中’. 드로잉 시리즈, 펜과 오일, 2015. 사진 = 아뜰리에 아키
강준영은 회화, 조각, 드로잉, 영상 등을 통해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내는 일종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주제는 크게 사랑, 꽃, 집이다. 어린 시절부터 호주와 미국, 한국을 오가며 경험한 생활, 그리고 유별난 가족 사랑을 통해 각인된 낭만적 사랑의 감성이 작업의 단초가 됐다. 이를 서정적이면서도 세련된 미감으로 표현하는데, 특히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달항아리에 자신만의 드로잉을 담으며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다. 도자기를 쓰임이 아니라 보임의 개념으로 변화시킨 것. 이처럼 강준영은 여러 장르와 문화를 자신만의 예술 방식으로 끌어들이면서, 다양한 매체의 결합을 통해 자신의 내러티브를 풀어나간다.
▲김남표, ‘인스턴트 랜드스케이프 - 앤드로지니(Instant Landscape - Androgyny) #10, 캔버스에 파스텔, 인조 털, 162.2 x 130.3cm. 2015~2016. 사진 = 아뜰리에 아키
김남표는 ‘인스턴트 랜드스케이프(Instant Landscape)’ 연작을 통해 인간 사회의 산물과 자연의 구성물들을 조합해 초현실적인 세계를 표현한다. 작업을 위한 사전 구상과 계획 없이 하얀 캔버스 위에 연상되는 것을 잇달아 그리면서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그는 콘테와 파스텔의 재료를 사용해 손으로 직접 캔버스에 드로잉 한다. 그리고 동시에 다양한 오브제를 평면에 붙임으로써, 평면 위에 입체적인 감각을 돋보이게 만든다.
아뜰리에 아키 측은 “전시명인 앤드로지니는 남성을 뜻하는 그리스어 앤드로(andro)와 여성을 뜻하는 진(gyn)을 합성한 이름으로, 중성적인 태도를 가진 작품들에 집중한다”며 “예술에서 탈장르는 기존의 장르와 장르 간의 경계를 허물며 유연성과 동시에 다양한 의미를 추구하는 태도를 보여줬다. 다양한 매체의 결합을 통해 기존의 지배적인 예술 사유방식에 의문을 던지면서 고전적 관습에서 탈피하고, 예술의 근본적인 변화를 함께 고민하고 사유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전시는 아뜰리에 아키에서 2월 29일까지.
김금영 기자 geum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