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생 예술동네 ⑤ 기고자] ‘기획의 고자’가 여는 평등 큐레이션의 세계
▲‘진지한 준비운동’의 설치 전경. 사진 = 기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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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김연수 기자) ‘큐레이션’은 개인 혹은 특정한 집단의 특성에 맞춰 필요한 정보만 골라내 제공하는 행위다. 예술 작품을 수집해 적절한 기획으로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가치를 부여해 관객에게 전파하는 미술관의 큐레이터에서 비롯된 용어다. 하지만, 이미 감당하기 힘들만큼 수많은 정보의 홍수에 모든 사람이 떠밀려 가는 21세기에 큐레이션은 마케팅 용어로 더 각광받고 있는 듯도 하다.
한편, 수집한 다양한 정보들을 정제해 전파하는 교육적인 기능과 함께, 그 과정에서 그들만의 감각과 경험을 개입시킨다는 점에서 전시 기획자의 큐레이션은, 예술가의 창조 행위와도 닮았다.
큐레이터와 작가가 평등한 공간 ‘기고자’
최근에 생긴 여러 예술 신생공간들이 자립하려는 예술가들의 욕구에서 비롯됐다면, 공간 ‘기고자’는 큐레이터의 욕구를 반영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이대역 사거리 근처의 예전 시장골목 어귀인 듯한, 하지만 이제 곧 재개발이 시작될 골목의 중간에 숨듯 박혀 있는 공간 ‘기고자’의 이야기는 운영자 임다운이 몇 년 전, 인턴(연수단원) 큐레이터로 근무했던 경험으로부터 시작했다.
현재도 그다지 나아진 것은 없는 상황이지만, 당시 인턴 큐레이터는 떠맡은 잡다한 업무에 비해 그 만큼의 보람을 얻기가 힘들었다. 또한, 기획 분야의 위치에서 작가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 줄 수 없었을 때 회의감이 들기도 했고, 다른 무엇보다 작가는 물론이고 기획자 및 비평가가 마음껏 자신의 기획과 생각을 펼칠 수 있는, 더 나아가 예술이론 관련 직종에 더 많은 기회를 줄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만든 것이 기고자다.
‘기고자’라는 이름은 기획과 고자(원래는 생식기관이 불완전한 남자를 의미하지만, 최근 젊은 세대에서는 어떤 일에 대해 서투르거나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뜻하는 속어로 쓰인다)의 합성어다. 미술계의 시스템 안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폄하함으로서 기성 미술계를 비판하는 동시에 울분을 섞어 넣은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마포세무서 앞에 위치했을 당시의 기고자는 비디오 가게를 꾸며 활용했다. 사진 = 기고자
그녀가 처음 공간을 만들 당시 두 가지 철칙을 세웠다. 하나는 지원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획에서 기획자와 이론가의 역할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공간은 그녀가 외부 일을 하면서 월세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만큼 작다. 또한 눈여겨 봐둔 신인 작가의 전시를 어떤 비용도 요구하지 않은 채 같은 위치의 신인 이론가나 기획자의 글-기획과 함께 선보인다.
▲기고자에서 관객들이 영상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 = 기고자
마포세무서 근처의 방 한 칸이 달린 비디오가게 자리에서 시작된 작은 공간은, 이제 이대 앞으로 옮겨 다시 손때가 묻고 있다. 전의 자리는 빌딩 주인이 말없이 빌딩을 새 주인에게 넘기는 바람에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공간 역시 언제 재개발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역량이 되는 한 끝까지 운영해 볼 거라고 했다.
개인과 집단의 이익추구가 상충하는 사회가 만들어내는 시스템에서 벗어나, 기획자로서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임다운의 모습을 보며 이미 개인의 삶 역시 큐레이션의 영역으로 들어왔음을 느낀다. 따라서 앞으로 어떤 방식의 큐레이션이 필요할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김영미 “진지한 삶의 태도는 멀리서 보면 희극적”
임다운과 김영미의 인연은 오늘 기고자가 존재하게 한 결정적 동기인 공장 미술제로부터 시작됐다. 임다운은 당시 전시 참여 작가들의 작품 중 김영미의 작품이 가장 인상에 남았기에 공간을 만든 후 주저 없이 김영미 초대 전시를 열었다.
김영미는 자신이 특별히 미디어 아티스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와 비디오 작업이 맞아 선택했을 뿐 작업에 있어 매체에 구애 받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기고자에서 했던 전시에서 임다운이 소개해준 미디어 전공 이론가와의 만남은 매우 좋은 배움의 기회였다. 자신의 작업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 신선한 계기가 됐다.
▲김영미, ‘진지한 준비운동’. 3채널 비디오, 8분 30초. 2015
김영미의 3채널 비디오 영상에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진지한 준비 운동’이라는 작품 이름처럼 말 그대로 쓸데없이 몰두하고 있는 그들의 반복적인 행위는 너무 진지하게 느껴져 웃음을 유발한다.
작가는 개인들이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며 구성하는 사회의 모습을 관객, 배우, 연출가 등 연극의 구성요소에 빗대 표현했다. 일정한 공간(야외)에서 편집 없이 기록된 영상에서, 배우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들의 일치된 반응 및 걸러지지 않은 소리는 화면 밖에 있는 연출가로서의 작가와, 관객으로서의 행인 역시 존재함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이 영상(연극)을 이루는 구성 요소들이 서로 상호작용 함을 보여준다.
그녀는 동일한 시간상에서 벌어지는 행위들을 여러 시점에서 촬영하고 3채널, 즉 3개의 각기 다른 화면으로 상영한다. 이것은 관객들이 하나의 화면 혹은 연극 무대를 볼 때 주로 중심의 자리에 위치하는 주인공이라는 개념을 없애고, 사회를 형성하는 구성원으로서 개인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다. 또한, 배우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성격의 집단(직업, 계층)으로부터 섭외됐는데, 작가는 단순한 동작들의 표현에 그들의 배경이 반영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역시 매우 흥미로운 과정이었다고 전한다.
김태윤 “시간 투자 없이는 얻을 수 없다”
김태윤이 기고자에서 선보인 작업은 47분짜리 영상이다. 굳이 장르로 얘기하자면 다큐멘터리 실험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영화 ‘뉘른베르크 두첸타이히 광장(Nürnberg Dutzendteich)’은 나치의 전당대회가 열렸고, 그 전당 대회를 기록한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의 영화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 1935)가 촬영된 건물이 배경인 한 공간(광장)을 1년간 관찰하면서 기록한 것이다.
▲김태윤, ‘뉘른베르크 두첸타이히 광장(Nürnberg Dutzendteich)’. 싱글채널 비디오, 47분. 2014
그가 6년간 독일에서 유학하면 느낀 독일인들은 과거에 대한 반성 교육이 정말 잘 되어 있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조차 무의미해진 상황에서 역사적으로 한정된 의미가 있는 그 공간을 선택한 이유는 그 공간이 가진 모호성 때문이었다. 독일인들은 깔끔하고 검소하지만 그 공간은 반성의 의미로 꾸미지도 부수지도 못하고 방치해두어 잡초와 쓰레기가 뒹군다. 하지만, 각종 행사는 꾸준히 열린다.
작가는 독일인이 되기 이전에는 공감할 수 없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공간을 바라본다. 영상은 자신이 공간을 바라보며 추측하는 행위의 기록이며, 관객들 역시 다르지 않은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영상으로 촬영했지만, 마치 스틸 컷 이미지처럼 움직임이 없는 장면이 어떤 내레이션이나 자막도 없이 3~5초가량의 시간을 두고 바뀐다. 마치 추측할 수 있는 여유를 주려는 듯.
▲‘뉘른베르크 두첸타이히 광장’이 기고자에 설치된 모습. 사진 = 김태윤
임다운은 “큰 사건이 있었던 공간을 실질적으로 맞닿아 있는 사람들이 대하는 모습을 다양한 각도와 계절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이 머리로 인지하는 공간 인식과 시각을 환기시키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김태윤은 “작은 규모 때문에 많은 작품을 설치할 수 없는 게 기고자의 공간이지만, 한 곳에서 오래 집중해서 봐야 하는 내 작업에는 오히려 적격”이라며, “영상 작업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선 조금 더 진중하고 느긋하고 명상적인 관람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그것은 시간성을 이미 담고 있는 영상작업에만 해당되는 요구만은 아닐 것이다. 한 작가가 오랜 시간을 들여 표현한 결과물을 감상할 때, 작가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의 시간이라도 여유롭게 할애할 수 있다면, 얻어지는 것이 있을 것이므로.
김연수 기자 hohma00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