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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 추천작가 ⑤ 상명대 이정훈] ‘혹시 있을지도 모를’ 희망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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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72호 윤하나 기자⁄ 2016.03.03 08:57:46

▲상명대 미대 조형예술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이정훈. 사진 = 윤하나 기자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윤하나 기자)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상명대에서도 특히 조형예술학과는 캠퍼스 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산을 오르니 이정훈 작가가 작업 중인 미술대 건물이 보였다. 능선 따라 내려가면 바로 광화문과 맞닿은 곳이지만 그의 작업실은 도시 속 요새처럼 고요했다. 산중에 자리해 도심과 ‘경치적’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접근성은 용이한 이곳에서 그가 바라보는 도시가 최근 작업으로 이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불안과 소외는 사람의 숙명

평소 괴테를 즐겨 읽는다는 이정훈은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침착한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려 노력했다. 왜 작가가 되려고 마음먹었는지, 작업을 하면서 찾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등 본질적 생각에 집중하는 그의 태도는 무척 진지했다.

▲이정훈, ‘낮잠’. 캔버스에 유화, 130.3 x 97cm. 2015. 12. 15.

그는 자신을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올해 그림을 시작한 지 꼭 5년이 됐다고 한다. 학부생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작업을 향한 진지한 태도와 의지를 가진 그를 보며 궁금증이 일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가 뭘까.

▲이정훈, ‘길’. 캔버스에 유화, 53.0 x 45.5cm. 2015. 12. 5

그는 20살이 되기까지는 미술에 흥미를 느낀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프랜시스 베이컨의 고리에 걸린 고기 그림을 접하고 바로 그림에 뜻을 품었다. 내면의 연약한 부분이 파괴되던 때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이 길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미술이 단순한 자기치유나 위안의 수단이 아니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미술을 선택한 이유는 외려 그가 보지 못했던 현실의 이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란다. 자신의 내면만 보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진실의 내면을.

나약한 인간이기에 그린다

그는 “나약한 인간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이성계, 나폴레옹 등 역사 속 위인은 당시에 폭군이었고, 그들을 위대한 인물이라고 강요하는 요즘의 교육에도 폭력성이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는 오히려 나약한 인간에 애정을 가졌다고 한다. 

▲이정훈, ‘겨울 산’. 캔버스에 유화, 65.1 x 53.0cm. 2015. 12. 16

나약함에 대한 그의 정의가 새로웠다. 그에게 나약함이란, 세상 혹은 누군가를 조정하기 위해 휘두르는 폭력의 반대말이다. 그가 지향하는 방향은, 폭력에 반대하고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 세상의 진실을 볼 줄 아는 사람이리라 상상해본다.

실제로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우리네 삶은, 때로 희극적 또는 비극적으로 묘사된다. 이야기를 덧입히거나 보다 기억하기 쉽게 각색되면서다. 그렇기에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있는 그대로 본다는 눈조차도 믿을 수 없다는 게 과학적 진실이기도 하다. 그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투쟁한다. 환상에 현혹되지 않고 환영 너머의 세상을 보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고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가 글이나 사진이 아닌 그림을 선택했다. 현혹되기 쉬운 눈과 머리는 그가 믿을 대상이 못 됐다. 글을 읽고 세상을 관조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파헤치는 그가 회화의 우연성을 믿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유화는 마르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 변화의 가능성은 무한해진다. 그림을 그리며 그는 세상과 자신의 이면을 발견해나가는 것이리라.

▲이정훈, ‘도시 풍경’. 캔버스에 유화, 160 x 560cm. 2016. 1. 25.

현실의 이면, 사회의 이면, 있는 그대로의 진실…. 그의 말에서 몇 가지 반복되는 키워드가 몽글몽글 떠오른다. 작가는 실존주의자인 듯했다. 괴테뿐 아니라 톨스토이, 키에르케고르, 발터 벤야민, 하이데거의 책을 읽고 프랜시스 베이컨과 볼스(Wols)의 작품에 영향 받은 그는 온전히 사회와 자신의 실존에 집중했다.

▲이정훈, ‘나의 불쌍한 돈키호테’. 캔버스에 유화, 162.2 x 112.1cm. 2015. 11. 9.

현재 그는 지난 1년간의 방황으로 자신과 작품 사이에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 이는 그가 처음 프랑스에서 직접 본 칸딘스키 작품에서 경험한 방황과는 다른 듯 보였다. 그 시절 칸딘스키를 책으로만 접하면서 저자들이 설명한 칸딘스키 그림의 따뜻함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전까지 칸딘스키의 그림이 따뜻하다는 책의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실제로 만난 그의 그림을 보고 깨달았죠. 칸딘스키 그림이 가진 힘, 아우라는 무척 뜨거워서 심지어 덥게 느껴지기까지 했어요”라고. 그 이후 3달가량 그림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난 5년간 축적해온 수많은 드로잉과 일기, 캔버스를 보면서 이 3개월 간의 정체가 그에게 큰 의미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작가는 시대의 보고자

당시와는 달리 최근 1년 동안의 방황은 그에게 새로운 주제를 남겨 놓았다. 바로 인간을 둘러싼 환경, 도시다. 그는 도시를 서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치여 사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우리가 살아갈 공간이 도시이므로,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싶다고도 했다. 시대를 대변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그는 앞으로 그림을 통해 어떤 희망을 발견할까.

희망을 밝히는 염세주의자

책, 특히 철학 책을 많이 읽는다는 그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인용했다. “세상을 가장 잘 살아내는 사람은 바로 작가” “매순간 투쟁하며 사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말이었다. 언뜻 보면 염세적이라고도 느껴지는 그의 생각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작가 이정훈에게 희망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정확히 인지하는 것, 그것이 희망”이라고 그는 대답했다. 눈에 보이는 환상에 현혹되지 않고 도시와 사람, 세상의 현실을 직시해야 그 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몇몇 최근 그림과 제목에서 희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림에서 보이는 강렬한 오렌지 색깔 빛을 그는 ‘가로등’이라고 불렀다. 어두운 거리를 밝히는 가로등. 그가 보는 그 유일한 빛은 곧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가로등이었다. 앞으로의 그의 행보에 보다 많은 가로등이 길을 밝혀주길 바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화가보다 더 화가 같은 이정훈” 
이인범 상명대 미대 교수의 추천사

“Life is short, art is long.” 인생의 덧없음을 받아들일 줄 아는 자, 하이데거의 말대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죽을 자’만이 예술적 실천을 할 수 있다고 해석된다. 이정훈 은 인간이 아플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을 겸허하게 그림 그리기로 자각하고, 온 몸으로 실천할 줄 아는 화가 지망생이다.

어쩌면 그를 화가 지망생 혹은 미술학도로 호명하는 것은 부당할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예술가의 삶 그 자체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앞서 여러 선배 거장들이 남기고 간 예술적 업적의 에너지들을 읽어내고 매일 자신의 화폭에 실천하며 살 줄 안다. 극도로 불안정하다. 하지만, 이미 그는 그 불안한 혹은 때로는 부당하기 일쑤인 이 세계의 진실에 자신을 옷 벗겨 노출시킬 용기도 지니고 있다. 

자신이 몸담은 위기에 찬 시간과 공간, 삶의 조건과 도시적 현실에 흔들릴 줄 아는 예민한 감수성도 넘친다. 그리고 별똥별이 밤하늘에 자취를 남기며 사라지는 것 같이, 나날이 아슬아슬하게 살아가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자기 자신과 아직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세계, 자신이 몸담고 사는 지금 여기를 붓끝으로 끌어내 입증하느라 그는 숱한 밤들을 지새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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