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의 요즘 미술 읽기] ‘볼것’ 없어진 현대미술…보이면 쉽고 안보이면 어렵다?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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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4. 사라진 작품(무형의 예술)
전시장에 하얀 벽만 보이고 작품이 보이지 않는다. 용기를 내어 들어가 보지만 바뀐 것은 없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미풍에 머리카락이 날릴 뿐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상상해본 적은 있는가? 뜬금없어 보이는 이 상황은 2012년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에서 화제가 되었던 작품, 라이언 갠더(Ryan Gander)의 ‘나는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어떤 의미가 필요하다 / I Need Some Meaning I Can Memorise’(2012)이다. 사실 이미 십여 년 전에 이와 비슷한 작품이 발표되어 논란의 중심에 놓였었다. 다른 점이라면 5초에 한 번씩 전깃불이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마틴 크리드(Martin Creed)는 이 당혹스러운 작품 - ‘작품 227번, 점멸하는 불빛 / Work No. 227, The Lights Going On And Off’(2000) - 으로 2001년 터너상(Turner Prize)을 받았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미술은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미술이란 보는 것’이라는 관람객들의 기대를 사정없이 깨뜨린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작품이 사라지면서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무언가를 보기 위한 기본 조건인 빛, 작품을 위한 배경에 불과했던 벽,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 그리고 그것들을 감지하는 나의 예민한 감각 등이 그것이다.
전통적으로 미술이 미술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이 필수적이라 여겨졌다. ‘미술가가 생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적합한 재료를 선택해 작품을 제작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결과이자 증거인 작품이 전시되어 감상의 대상이 되고, 이후엔 매매되어 소장된다.’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의 작가들은 그동안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미술의 조건들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 전형을 깨뜨린다. ‘미술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미술이 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의 답을 관람객들과 함께 찾고 나누며, 미술에 대해 함께 고민하길 원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당연시되었던 물질적 작품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미술가들은 ‘미술가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자기 질문을 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미술의 본질에 대해 지적인 유희를 벌이는 사람이 되었다.
▲‘0kg 삼만리’, [Mak Show](2015), 플레이스 막, <0kg Today>와 <순간이동장치>의 협업 발표. 사진제공 = 하상현 작가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미술가들은 관람객들의 도움을 받아 물질적 작품을 소멸시키거나 변형시키기도 한다. 신미경은 서양의 고전 조각, 동양의 불상, 중국의 도자기 등을 비누로 조각하는 작가이다. 그녀는 화장실에 비누 조각을 설치하는 ‘화장실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조각인 동시에 비누인 그녀의 작품들은 화장실 사용자들에 의해 닳아 모양이 변하고 시간의 궤적을 담게 되었다. 이전에도 한 번 거론했던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는 신문 기사에서부터 사적인 경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들이 인쇄된 종이 더미를 전시장에 쌓아두고 관람자들이 원하는 대로 가져갈 수 있게 했다. 관람객이 작품을 변형시키거나 가져가는 행동까지도 모두 작품에 포함되는 이들의 작업은 원작과 복제, 미술가와 관람자의 역할을 새롭게 제시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특히 사라지는 작품들을 통해 영원히 보존되고 소유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작품이라는, 당연시되어 온 고정관념이 해체된다.
결과물보다 과정이 중요시되면서 미술에서 점점 행위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행위가 주인공인 퍼포먼스는 순간의 예술이다. 그것의 결과는 사진과 영상뿐이다. 가끔 퍼포먼스에 사용되었던 도구들이 전시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작품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일례로 하상현의 ‘0kg Today’(2015)는 무형의 예술, 행위로서의 예술을 전면에 내세운다. ‘숨’을 소재로 하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날숨을 시간대별로 봉지에 담아 보관한 뒤, 정해진 한 장소에서 3시간 동안 다시 들이마셔 들숨으로 바꿨다. ‘숨’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숨’은 생명이다. 작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이 가진 의미를 확인시킨다.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게 하는 미술인 것이다.
▲‘2011 오늘의 작가 정재철 실크로드 프로젝트’전(2011) 설치 모습. 사진제공 = 김종영미술관
이처럼 오늘날의 미술은 한두 점의 결과물을 눈으로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그 과정을 함께 하는 것으로 변했다. 정재철은 2004년부터 2011년까지 7년 동안 진행되었던 ‘실크로드 프로젝트’에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고, 빨래한 폐현수막을 나눠주면서 자유롭게 활용하라고 안내했다. 함께 오브제(object)를 만들기도 했다. 현지 사람들은 모자, 가방, 차양, 커튼 등을 만들어 삶을 꾸며나갔다. 작가는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렸던 ‘2011 오늘의 작가 정재철 실크로드 프로젝트’전에서 전 과정을 공개했다. 전시장에는 프로젝트 진행 사진과 영상, 사람들에게 나눠줬던 현수막 사용설명서, 손으로 작가의 여정을 그린 지도, 현수막으로 만든 차양 등이 설치되었다.
무에서 유 만드는 창조주 자리 포기한 작가들
그런데 작가는 현지에서 만든 오브제들을 가져오지 않았다. 사진과 동영상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다시 만들어 전시했다. “현장에서 너무 잘 활용되고 있어 다시 수집할 수 없었으며, 현지에 두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표에 근접한 것이었다”, “그 분들이 즐겁게 참여한 일이다. 이것이 미술이 할 일이다”라는 정재철의 인터뷰는 마음을 울리는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며 미술 작품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대변한다.
오늘날의 미술가들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고 제시하는 절대적 권력을 가진 창조자로서의 모습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일한 작품만이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니다. 요즘 미술은 우리가 겁먹을 만큼 어렵지 않다. 오늘날 의심의 여지없이 거장으로 평가받는 미술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알 수 없는 이상한 미술을 하는 괴짜로 비판받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 공간이 비어 있기에, 의미가 열려 있기에 더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의 미술이다.
(정리 = 최영태 기자)
이문정(조형예술학 박사, 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