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보고전을 알리는 홍보물이 단지 외부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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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윤하나 기자) 인천 차이나타운과 인천항 사이에 개항기 때의 향수를 품은 창작 공간이 숨쉬고 있다. 1호선의 끝, 인천역을 빠져나와 차이나타운의 소란스러움을 뒤로 하고 5분 여 걸으면 그곳에 인천아트플랫폼이 있다.
현재의 복합문화공간은 인천 중구 해안동의 옛 구일본우선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 건물을 비롯해 대한통운 창고 건물, 삼우인쇄소, 피카소 작업실, 영광수퍼, 대진상사, 양문교회 건물 등 1930~40년대 지어진 근대 건축물 단지를 매입 후 리모델링해 이뤄졌다. 붉은 벽돌로 마감된 이 이국적인 옛 건축물 단지 안에는 전시장, 공연장, 아카이브관, 입주 작가 스튜디오, 게스트 룸, 사무 공간 등 총 13개 동의 시설이 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인천아트플랫폼은 인천광역시가 구도심 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한 지역 문화 활성화 거점으로, 2000년부터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시각예술뿐 아니라 연극, 무용, 음악, 다원예술 등 다양한 공연 예술 부문과 문학창작 및 비평 부문을 아우른다.
이번 6기 레지던시의 시각예술 부문 입주 작가로는 강우영, 기슬기, 길다래, 김유정, 나나&펠릭스, 니콜라 마넨티, 로미 아키투브, 박윤주, 박은하, 백승기, 사야카 오하타, 안토니 워드, 에이스 일디림, 염지희, 위영일, 이주현, 이창훈, 임선희, 전형산, 젯사다 땅뜨라쿤웡, 지희킴, 최영, 클라라 페트라 사보, 폴 주커, 함정식이 있다.
▲이주현 작 ‘신묘막측(神妙莫測)’의 설치 모습.
▲박은하, ‘폐쇄적 써클’. 148 x 194cm, 캔버스에 유화. 2015.
공연예술 부문엔 김성배, 김성용, 배인숙, 앤드씨어터, 얼라이브 아츠 코모, 우현주, 이영주, 판소리 ‘하다’가 입주했다. 마지막으로 문학 창작 및 비평 부문에 강효미, 김경해, 이하람, 인진미, 전강희가 입주했다. 이들 모두가 이번 레지던시 결과 보고전에 참여했다.
‘예술가의 생존에 관하여’ 대담 통해 본 현실적 작가 생존기
올해 입주 작가 보고전을 보기 위해 지난 2월 18일 인천아트플랫폼을 찾았다. 무엇보다 이날 방문을 서두른 이유는 오프닝 행사로 진행된 아티스트 토크(작가와의 대화)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도착하자마자 ‘예술가의 생존에 관하여’를 주제로 대담이 시작됐다. 대담에는 6기 입주 작가인 김유정과 박은하 작가, 홍경한 미술평론가가 참여하고 양종남 아트플랫폼 운영팀장이 진행을 맡았다.
▲전형산, ‘노-시그널’. 35 x 20 x 8cm, 혼합 재료, 음향 설치. 2015.
레지던시 보고전의 부대행사에 예술가의 생존을 논하는 이유가 무얼까 궁금하던 찰나, 양종남 운영팀장이 대담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모두가 느꼈던 처참함과 무력감을 레지던시 내 작가들도 통렬히 경험했고, 그것으로부터 파생된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예술가의 생존에 대한 담론을 작가들이 함께 공유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보고전은 입주 작가들의 살고 죽는 것, 즉 생존에 관한 고민을 한데 모았다. 전시장에는 작업으로 표출된 무거운 고민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대담에 참여한 김유정, 박은하 작가가 작업 소개와 함께 작품의 주제가 된 삶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박은하 작가(이하 박)는 이번 전시에 초록색 바다 3연작(Triptych)을 선보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죽음과 가족에 관해 작업했다. 2014년 이후부터는 사회 내 집단적 기억의 주인공을 대상으로 비유적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김일성, 박근혜 등 집단적 기억 속 인물의 특징적 얼굴과 옷 등을 사물로 치환해 인물의 초상화를 완성하는 방식이다.
반면, 김유정 작가(이하 김)는 보다 개인적인 범위의 생존에 관해 작업한다. 고대부터 이어진 프레스코화 기법을 현대적으로 이용한다, 회벽이 마르기 전에 긁어내는 방식으로 삶의 생채기를 표현해낸다고 했다. 주로 식물원 내의 온기를 주제로 그리는데, 그 온기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과 결국 소비재로 전락한 식물에 관한 관심을 우리 삶에 투영한다. 두 작가 모두 세월호 참사 이후 작가로서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며 작업해왔다고 했다.
작가들의 작업 소개 후 대담의 흐름은 시대의 생존에서 예술가의 생존 현실로 이어졌다.
양종남 운영팀장(이하 양) : ‘세월호 세대’란 2014년 세월호 사고 당시 주요 희생자였던 고등학생과 비슷한 연령의 세대를 일컫는 신조어다. 세월호 참사 이전보다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 타인과의 협력 필요성, 사회를 바꾸려는 실천 의지 등이 증가한 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작가의 태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홍경한 미술평론가(이하 홍) : 사회에 관해 직접적으로 작업하는 작가도 있지만 아닌 작가도 많다. 과거의 예술 형식이 생물학적으로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면, 현재의 예술형식은 생물학적 생존 이후에 다시 물질적으로 생존하려는 고민으로 진화했다고 본다. 현재 작가들은 이런 물질적 생존 위기 아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예술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헛된 망상에 가깝다. 지금 현실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며 예술을 우선하던 시절에서 자본에 의해 예술이 타살되는 단계로 이행해 가는 경계선에 위치해 있다고 본다.
김 : 현실적으로 요즘 작가들은 작품만 해서는 생존하기 어렵다. 지원금에 의존하거나 다른 생업을 갖지 않으면 생활을 이어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홍 : ‘가난은 필수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식의 예술가는 이래야 한다는 한국 미술만의 에토스가 존재한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진짜 좋아한다면 버텨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지만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고 본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보다 다양한 길을 열어주고 제시해야 한다. 버틸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재능이 있는 사람만 버텨야 하지 않나. 예술가가 예술만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풍토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여러 방식으로, 다른 매체로도 실험하며 자신의 작업을 연결시키는 방향도 생각할 수 있다.
박 : 난지 입주 당시 어떤 작가가 “10년 버티면 뭔가 있을 것”이라 말했지만 현재 난 9년차 작가다. 지원금, 레지던시, 공모전, 개인전 등이 있어 그나마 지금까지 버텨왔다. 시스템에 반하는 작업을 하면서도 시스템에 기대어 온 것이다. 하지만 숨 쉬고 생활하는 것(사회에 속하는 것 자체)도 타협이라고 생각한다. 중도를 유지하며 작업해야 한다고 느낀다.
홍 : 정부 지원금은 늘지 않으면서 작가에게 바라는 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지원금을 받으면 오히려 작업보다 지원금 정산 등에 시간을 뺏기는 등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소위 잘나가는 몇몇 작가를 제외한 대부분 작가의 삶이 그러하다.
▲나나 앤드 펠릭스(Nana&Felix), ‘Lunar Estate’. 가변 크기, 액자에 사진. 2015.
이후 현 미술계의 제도적, 행정적 문제점과 예술가의 처우 개선점에 관해 토론하면서 대담은 점차 심화됐다. 그리고 대담을 마치기 전 작가들을 향한 마지막 질문이 던져졌다.
이영리 큐레이터(인천아트플랫폼 6기 입주작가 결과보고전 기획) : 작가로서의 생존이 어렵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하는 작가의 원동력은 도대체 무엇인가.
박 : 자기 존재 증명이다.
김 : 실존의 문제다.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좋아서 한다.
1시간 여 진행된 대담은 이번 레지던시 보고전을 관통하는 작가들 전체의 고민을 충분히 담아낸 시간이었다. 집단적 트라우마를 경험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그 씁쓸한 입맛을 이번 인천아트플랫폼의 전시를 통해 조금은 씻어낼 수 있었다. 집단적 생존을 가슴 깊이 고민하는 작가들의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역 정치인에 몸살 앓는 창작기관
인천아트플랫폼은 약 1년 반 전 큰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당시 관장의 독단적인 행태와 운영 방식은 입주 작가들의 공분을 샀고, 결국 1년여의 파행 끝에 당시 이승미 관장이 직위해제 조치됐다. 이후 인천아트플랫폼 정상화를 위해 작가들과 행정기관들이 열심히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난 3월 2일 인천시장의 고교 동창인 최병국 현 인하대 겸임 교수가 신임 관장으로 초빙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인천 지역 미술협회 회장을 역임한 지역 내 유력한 미술 인사다. 하지만 국제적인 창작기관인 인천아트플랫폼 운영에 요구되는 전문가적 경험과 이론적, 실천적 성취가 여실히 부족하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지역 미술협회가 갖기 쉬운 제도적-미술적 보수 성향은 창작 공간에 요구되는 특유의 실험정신과 어울리기 쉽지 않다는 문제 제기와 인천지역작가모임은 “유정복 인천시장의 낙하산 인사 아니냐”며 반발하고 있다.
▲강우영, ‘야간채집’(디테일). 가변설치, 혼합 재료. 2015.
인천문화재단 측은 아트플랫폼 신임 관장 선임 결과에 대해 “객관적이고 엄정한 심의 과정을 거쳤다”고 밝힌 바 있다. 지역 정치의 입김이 작용하는 창작 공간이라는 불명예는 열심히 작업하는 작가들, 그리고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일하는 문화 인력들을 좌절하게 만들기 쉽다. 지역사회 속 문화예술기관, 특히 창작 공간은 종종 그 독립적 성격을 침해받을 가능성에 노출된다. 인천아트플랫폼이 앞으로 어떤 해법을 찾아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윤하나 기자 heee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