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윤하나 기자) ‘평화의 소녀상’은 오늘도 주한일본대사관을 향해 조용히 앉아 있다. 치마저고리을 입은 단발머리 소녀는 맨발을 반쯤 허공에 든 채 두 주먹을 쥐고 초연하게 응시한다. 소녀상은 혼자가 아니다. 지난해 12월 28일 한국과 일본 정부의 갑작스러운 일본군 위안부 관련 졸속 합의와 소녀상 강제이전 설에 분노한 시민들이 연일 자발적으로 소녀상 곁을 지키고 있다. 피해자인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협상에 분노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은, 소녀상 지키기 노숙부터 작은 소녀상 나누기 프로젝트, 영화 ‘귀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전국에 설치된 6종류의 소녀상을 총망라한 전시가 주한일본대사관 인근의 갤러리 고도에서 3월 5~15일 열린다. 갤러리 고도(관장 김순협)는 여태껏 공적 장소에서만 역할을 해온 소녀상을 미술관 전시 공간으로 초대했다. 공공예술(public art)이자 사회미술(social art)로서 소녀상을 새롭게 바라보자는 첫 전시다. 이번 전시는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의 작가인 김서경·김운성의 소녀상은 물론, 그 이전의 작품들, 그리고 차후 진행될 프로젝트까지 모두 담고 있다.
▲한국이 가해자로서 베트남에게 준 상처를 반성하는 의미 담은 ‘베트남 피에타’. 사진 = 윤하나 기자
▲20cm 크기의 작은 소녀상. 사진 = 윤하나 기자
소녀상은 2011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님들의 수요 집회 1000회(20년)를 맞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 배상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김서경운성 작가’(두 작가의 협업을 나타내는 아티스트의 이름으로 ‘김서경운성’을 쓴다)가 제작·설치했다. 김서경운성은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용기 있는 폭로와 그 뒤를 이은 수요 시위를 보고 소녀상 제작을 마음먹었다. 갤러리 고도에서 김서경(51), 김운성(52) 부부를 이틀에 걸쳐 만났다.
전시장 초입에는 소녀상 원형을 재현한 석고 조각 6점이 나란히 놓였다. 소녀상은 먼저 흙으로 형태를 만들어 틀을 짜고 거기에 브론즈를 부어 복제하는 과정을 거쳐 제작됐는데, 그 틀을 이용해 석고 조각을 만들었다고 한다. 여섯 종류의 소녀상은 일본대사관 앞의 평화의 소녀상을 시작으로, 서 있는 거제시 소녀상, 고양시 국립여성사박물관의 김학순 할머니 소녀상, 대학생과 함께 만든 평화나비상(이화여대 앞), 박숙이 할머니의 남해소녀상(경남 남해군 소재), 고등학생과 함께 만든 수원의 평화의 소녀상 등이다. 이밖에도 소녀상은 국내 총 27곳에 설치됐다.
▲갤러리고도에 소녀상 6점이 나란히 전시돼 있다. 사진 = 윤하나 기자
소녀상의 모습은 각각 상징하는 바가 있다. “소녀상은 할머니들이 끌려갔을 당시 한복을 입은 13~15세 정도 소녀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원망과 한이 서린 시간을 그렸다”고 했다. 할머니 그림자 속 하얀 나비는 “나비로라도 환생해 생전에 받지 못한 일본 정부의 사죄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담은 결과다. ‘뜯긴 머리카락’은 낳아준 부모와 자라난 고향으로부터 일본군에 의해 억지로 단절된 상황을, ‘뒤꿈치가 들린 맨발’은 힘들게 돌아온 내 나라에서 느끼는 불편한 마음을 각각 표현했다.
소녀의 어깨에 앉은 새는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동시에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연결하는 영매의 상징이다. 소녀 옆의 빈 의자는 먼저 돌아가신 할머니들을 위한 자리인 동시에 소녀상을 찾는 이들이 현재의 할머니들의 외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자리로 제작됐다 이들은 전했다.
소녀상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작가가 소녀상을 제작하기 이전에 했던 작업들이 궁금해졌다. 이들의 어떤 작업적 여정이 소녀상 프로젝트로 이어진 걸까?
▲김서경, ‘매삼치다’. 사진 = 윤하나 기자
김서경 작가는 “중학교 2학년 때 박정희의 죽음을 경험하고 5.18 당시에는 명지대 인근 학교를 다니면서 대학생들의 투쟁을 지켜봤다. 중앙대 조소과에 입학하니 그때 대학생들이 왜 투쟁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두환 독재 시절 대학에 입학했고, 1학년 초기엔 흙 작업을 할 실기실 쟁취를 위해 투쟁했고 졸업 때 조소과 건물이 새로 지어졌다고 하니, 이런 과정 모두가 시대정신으로 작가에 새겨졌다. 그 시절 ‘짱돌이’라는 4컷 만화를 교지에 연재했고, 민중가요 삽화를 그리는 등 만화에도 관심이 많았다.
중앙대 시절에 대해 김운성 작가는 “80년대 격변기에 대학을 다니면서 청년, 학생들의 분노와 사회의 불합리를 느끼며 자연스럽게 사회적 문제의식을 키웠다”며 “첫 전시는 ‘상계동 철거민’ 현장에 관한 것이었고, 예나 지금이나 눈과 귀로 직접 느끼는 여러 사회적 고민에서 작업이 비롯됐다”고 했다.
소녀상 이전과 이후의 작업을 말하다
대학 졸업 후 2년 만에 결혼한 김서경운성 작가는 이후 따로 또 같이 작업해왔다. 졸업 후에는 동학농민운동 100주년 기념비, 광주 5.18 민주화 운동, 제주 4.3 사건, 전태일 관련 조각 작품을 함께 만들어왔다.
이렇게 함께 하는 작업과는 달리 두 작가의 개별 작업은 그 성격이 명확히 구분된다. 김운성 작가는 주로 상징과 은유를 바탕으로 작업을 하며 ‘사회 속의 미술’을 지향해 왔고 관객의 동의, 공감을 중요시한다.
▲김운성, ‘평화가 밥이다’. 사진 = 김서경운성 작가
반면 김서경 작가는 졸업 이후 ‘작은 조각전’이라는 전시를 주로 열며 주변 사람과 그들의 표정을 관찰하고 표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아이가 자랄 때 아이의 모습을 흙작업 하며 자식의 자식, 손자의 손자가 살 미래에 일조할 작업을 하고자” 했단다. 이렇게 같기도 또한 다르기도 한 두 작가의 협업이 현재의 소녀상을 만들어냈다.
“사회를 직접적으로 말하는 예술이 부재한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란 기자의 질문에 이들은 “요즘은 사회가 바라는(요구하는) 미술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요구가 미술이 가져야 할 사회와의 연관성을 불필요하게 만든다”고 대답했다.
이들은 “예술은 이상적으로 정보의 생산자 역할을 해왔지만, 현재는 정보의 소비재로 변모한 듯하다. 그런 현실에서 ‘나라도 나 그리고 우리에 충실해야지’라고 다짐했다”고 전했다.
앞으로는 텀블벅 모금으로 제작되는 10, 20, 30cm 크기의 ‘작은 소녀상 프로젝트’에 이어 ‘여성 독립운동가’와 ‘무명 독립운동가’, ‘베트남 피에타’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작년 해방 70주년 기념 소녀상의 제작과 소녀상 철거 논란 등으로 차기 작업이 늦어졌다. 전쟁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영웅인 이들을 조각의 형태로 계속 알리려는 두 작가의 의지를 강하게 느낄 수 있었던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