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던시展 탐방 - 라익스 아카데미 레지던시] “계속 해나가야 예술가… 그 힘을 줍니다”
▲김성환과 레이디 프롬 더 씨, 12 minutes, 2005년 라익스 아카데미에서의 설치 광경. 사진 = 아르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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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윤하나 기자) 반 고흐 미술관의 도시, 암스테르담은 미술이 도시 브랜드가 될 수 있음을 선명히 보여준다. 가장 자유로운 도시인 동시에 최신 디자인과 현대미술의 동향이 포착되는 이 도시에는 미술인들이 눈여겨보는 또 하나의 명소가 숨어 있다. 바로 라익스아카데미(Rijksakademie)다.
라익스아카데미(이하 라익스)는 전 세계적으로 미술 작가들이 가장 입주하고 싶어 하는 레지던시 중 하나다. 네덜란드의 국가적 지원과 암스테르담 시민들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지로 레지던시로서 최고의 환경을 자랑한다. 1870년 설립된 라익스가 처음부터 예술가를 위한 레지던시였던 것은 아니다. 피에트 몬드리안과 콘스탄트, 카렐 아펠 등 다양한 예술가가 거쳐 간 예술 학교였던 이곳은 1980년대부터 독자적인 예술기관으로 자리 잡으면서 미술인을 위한 국제 레지던시 형태를 갖췄다.
작가들의 파라다이스, 라익스 아카데미 레지던시
수많은 레지던시가 있지만 그 중 유독 라익스가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예술가를 위한 최상의 환경으로 유명하다. △사진, 영상, 음향을 담당하는 미디어 △각종 염료와 물감, 캔버스를 담당하는 페인트 △나무나 금속을 다루는 컨스트럭션 등 크게 3 분류의 매체 워크숍이 구성돼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한 방대한 자료를 갖춘 도서관이 있어 이론적 연구 및 자료 수집도 용이하다.
▲임고은, ‘연작 외부세계가 변해서…’, 2014~2016. 사진 = 아르코미술관
여기에 조언가 단(Advisor Group)이란 시스템이 갖춰져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전문가를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조언가 단에는 비평가 및 유명 작가부터 라익스의 참여 작가 선정위원회 인사들이 참여하고, 과학자, 철학가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까지 방대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망라돼 있어, 이들과 만나 작업에 관해 토론할 수 있다.
개별 스튜디오 50개에 입주하는 작가들은 매해 약 25명 정도다. 절반은 네덜란드에 일정 기간 이상 체류하는 작가들, 그리고 나머지 반은 전 세계에서 지원한 작가들로 구성되며 총 입주 기간은 2년이다.
[인터뷰] 디렉터 엘스 반 오다익
“달라야 소통가능…그래서 다양성 안배”
현재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라익스 참여 작가들의 전시 방문을 위해 방한한 라익스의 디렉터 엘스 반 오다익을 그녀의 출국 당일 만날 수 있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커피를 마시며 나눈 이야기를 통해 그녀가 생각하는 예술가와 레지던시에 관한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서울 종각과 인사동 사이에서 만난 그녀는 시종 인사동 주변의 오래된 불상 점포들에 시선을 빼앗긴 채 감탄했다. 한국인은 늘 그냥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불상 파는 가게 위층의 종이상자 더미, 독특하고 낮은 층고의 건물 등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는 그녀의 감각에 집중하면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라익스 레지던시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면?
엘스 “라익스는 교육기관이 아니예요. 우린 예술가로서의 자질과 잠재력을 가진 작가들을 찾아 그들이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합니다. 대부분의 입주 작가들은 기성교육을 마치고 작업관이 자리 잡은 성인들입니다. 저마다 다른 배경에서 출발한 이들이 만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하고 그들이 만나 이야기하고 교류하며 서로 배우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저희가 하는 일입니다.
- 그렇다면 예술가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예술가는 아주 많고 라익스에 입주하고자 하는 이들도 참 많습니다. 그들이 왜 라익스를 원하고, 또 입주 작가 선발은 어떻게 이뤄지나요?
엘스 “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매년 25명의 입주 작가 모집에 1000~2000명에 가까운 지원자가 몰려요. 이런 경쟁률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예술가는 결코 이미 뛰어난 작업을 하고 있는 완성된 작가가 아니에요. 발전 가능성이 있고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작가들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1차 포트폴리오 심사를 거쳐 2차 면접은 꼭 네덜란드 현지에서 진행해요. 다른 기관들은 스카이프(화상 통화) 면접도 한다지만 그것만으론 진짜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접 만나 작가와 얘기하면서 더 많은 부분을 느낄 수 있고 그 감각을 바탕으로 최종 심사를 진행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 해의 입주 작가들의 출신 국가가 편향되지 않도록 안배합니다.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특정 문화권이 생길 경우 작가들 간의 활발한 소통이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 많은 작가들이 생계와 꿈의 좌절 등으로 예술의 길을 포기하곤 합니다. 혹은 그에 대한 대안으로 레지던시에 집중하는 경향도 보이고요. 레지던시의 그런 역할을 어떻게 보시나요?
엘스 “예술가는 같은 것에서 다른 면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같은 일상을 경험하더라도 다른 면을 찾고 그것으로부터 자신의 감각을 깨우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죠. 작가는 어디서나 힘들어요. 라익스의 경우 작가가 입주한 후 오로지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합니다. 그래서 입주 기간 동안 자기 작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기본적으로 필요해요. 아니라면 너무 아까운 기회의 낭비라고 생각해요. 작업에 집중하기도 바쁘죠. 계속해서 작업을 해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진 이가 결국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주변의 숨 쉬는 모든 것을 느끼고 집중할 수 있는, 그리고 생동하는 감각을 가진 이로서 왜 작업하는지 어떻게 살아갈지를 알고 살아내는 사람이죠.
‘관계적 시간’: 시간과 경험으로 숙성한 작업들
삐삐롱스타킹의 삐삐처럼 통통 튀는 한 독특한 여성이 영상에서 알 수 없는 몸짓을 이어나간다. 그녀는 어느 남성의 얼굴 사진 위 딸기를 키스하듯 먹거나 배변한 컨테이너를 뒤집어 생크림과 딸기 장식을 하는 등 기행을 거듭한다. 함께 흐르는 나른한 듯 익숙한 음악이 그녀의 행위를 선언적인 행위예술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녀의 행위들은 모두 세세하게 지시된 것들이다. 세분화된 지시들은 두 협업 작가들이 공존하는 과정이다. 서로를 침범하고 강탈하는 동시에 인내하며 협상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2006년 아트 스펙트럼 전시를 통해 소개되며 작가 김성환의 이름을 처음 각인시킨 작품(‘Flat White Rough Cut’)을 ‘관계적 시간’전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레지던시에서 만나 2년의 입주 기간 동안 협업한 작가 니나 유엔과의 작업들로, 김성환과 니나 유엔이 함께 서로의 관점과 상상을 유추하고 재연해내는 과정이 담겨 있다. 김성환 작가는 현재 뉴욕과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며 2012년 런던 테이트모던 탱크스에서의 전시로 크게 주목받았다.
▲김성환과 레이디 프롬 더 씨, ‘플랫 화이트 러프 컷(Flat White Rough Cut)’의 스틸 이미지 2장. 비디오, 컬러/사운드, 9분 30초. 2004. 사진 = 윤하나 기자
그런가하면 논문을 완성하려는 한 여성의 고군분투가 담긴 단편영화 형식의 영상작업도 있다. 손광주의 영상(‘리서치’) 속 여성은 “생각하고 쓰고 읽고”를 반복적으로 되뇐다. 읽어야 할 많은 책과 씨름하면서 한 마리의 백마가 자리 잡고 내주지 않는 자신의 공간(머릿속)으로 방황한다. 결국 어지럽게 쌓인 책들을 무심하게 훑어 내리고는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 한마디를 남긴 채. “좋은 글이군요. 하지만 읽지 않았습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지난 10년간 라익스에 입주하는 한국 작가들의 경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에 아르코미술관은 그 기간 라익스를 거친 작가 총 13명 중 7명의 작업을 모아 ‘관계적 시간(Emerging Other)’전을 4월 1일부터 6월 19일까지 개최한다. 전시 제목 ‘관계적 시간’이란 작가들이 타국의 레지던시에서 겪었던 낯설음과 타인들과의 관계 맺기 과정을 통해 겪었던 절대적 시간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험을 통해 심리적으로 발생한 유도적인 시간을 나타낸다고 미술관 측은 밝혔다. 전체 라익스 레지던시 입주 작가들 중에서 이 7인을 선정한 이유는 레지던시 기간 이후 해당 경험을 통해 작가의 작업이 어떻게 확장됐는지 엿보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초기 입주자들을 위주로 전시가 구성됐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 김성환(2004-5년), 손광주(2006-7년), 임고은(2008-9년), 오민(2011-12년), 진시우(2011-12년), 배고은(2012-13년), 안지산(2013-14년)을 비롯해 송상희(2006-7년, 아카이브 섹션에 인터뷰 및 도큐먼트 제공만) 작가가 참여했다.
▲오민, ‘소나타’. 3채널 HD(1080p) 비디오, 6채널 오디오, 7분 9초. 2016. 사운드 아티스트 홍초선과의 협업. 사진 = 아르코미술관
우선 1층 제1전시관은 손광주, 김성환, 임고은, 오민 작가의 흥미로운 영상으로 가득하다. 저마다 시간을 들여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매체들이지만, 재생 시간도 길지 않고 작가들의 고민과 실험적 연구 결과가 결코 지루하지 않게 담겼다. 차분한 영상의 방 안에서 각 영상들은 그만의 숨겨놓은 날카롭고 흥미로운 비기를 품고 있었다.
반면 2층의 제2전시관은 △회화의 안지산 △설치,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진시우 △영상과 영사된 이미지 그리고 반지 오브제를 선보인 배고은 작가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주요 매체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물음에 퍼포먼스, 영상, 사진, 오브제 등 유화 작업을 제외하곤 모든 매체를 이용한다고 유쾌하게 자신을 소개한 배고은 작가를 전시장에서 만났다.
[인터뷰] 전시 참여작가 배고은
“네덜란드인도 라익스 경험 못잊더라”
- 라익스에 지원한 동기는 무엇이었나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과정을 졸업하고 어떤 자극이 필요했어요. 당시 라익스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환경적인 변화를 위해 주변에 조언을 구했고 그렇게 알게 된 해외 레지던시로 라익스에 지원하게 됐습니다.”
- 라익스에서 경험한 가장 특별한 일은 뭔가요?
“매년 11월 말에 오픈 스튜디오를 열어요. 암스테르담 아트 위크엔드(암스테르담 시내의 갤러리와 미술관 등이 가장 최근의 현대미술을 선보이는 대형 이벤트)와 함께 진행하기 때문에 유럽은 물론 전 세계의 미술 관계자들이 암스테르담에 모이고, 라익스의 스튜디오에 자연히 주목하게 됩니다. 전시 디렉터, 큐레이터, 콜렉터 등 미술 관계자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큰 관심을 가집니다. 개관 시간인 10시부터 문전성시를 이루고 할아버지부터 아이들까지 작가에게 질문을 던지죠. 제가 스튜디오에서 한 퍼포먼스 덕분에 식당의 누군가가 저를 알아본 적도 있어요.”
▲배고은, ‘포 더 썸 앤 더 빅 토(For the Thumb and the Big Toe)’. 설치, 금속 링, 42 x 6.58 x 6(mm). 2012. 사진 = 아르코미술관
- 현재 네덜란드에서 활동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라익스 레지던시를 통해 어떻게 활동이 이어졌는지 궁금해요.
“오픈 스튜디오를 통해 제 퍼포먼스를 초청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기 시작했고 신문에 소개도 됐어요. 이어 여러 전시 및 이벤트 참여로 연결됐고, 최근에는 상파울로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에서 작가 생활을 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가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라익스를 통해 네트워크가 어느 정도 형성된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기로 결심했죠.
- 현지의 다른 작가들은 라익스 레지던시에 대해 어떤 인상을 갖나요?
“한 네덜란드 친구는 똑같이 암스테르담에서 작업하고 있어도 라익스 입주 기간이 그립다고 말해요. 그만큼 라익스의 전폭적인 지원과 몰두할 수 있는 작업 환경은 특별했습니다. 외적인 고민은 털어버리고 그야말로 ‘바캉스 같은 시간이었다’고 말하더군요.”
작가 배고은은 신문 기사로 접한 개인의 사건을 통해 사회의 구조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번 전시에서 두 개의 반지가 결합된 형태의 오브제(’For the Thumb and the Big Toe’)는 두 엄지손가락이 묶인 채 발견된 죽은 여성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손가락이 묶여버린 상황을 여성으로서의 사회적 제약, 자신과 가까운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의 변질 등으로 치환하며 작업을 확장해나간 작가는 4월 23일 5시에 제2전시실(2층)에서 전시 연계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윤하나 기자 heee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