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3호 김연수⁄ 2016.05.13 13:57:03
디지털 기술로 작업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된 현대미술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는 예술의 한 표현기법으로 당연시 되곤 하지만, 사실 ‘예술 사진’이라는 명칭이 붙었을 때 느끼는 괴리감은 여전한 것 같기도 하다.
한 폭의 추상표현주의 그림처럼 보이는 사진은 추상화 앞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를 때의 당혹스러움을 주고, 인물이나 풍경 사진을 볼 때면 요즘 좋은 핸드폰 카메라로 찍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사진인데, 왜 이 사진들이 예술로 분류되는지 의구심마저 생긴다.
사진 매체의 실험적 시도는 1989년이 기점
5월 4일~7월 24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사진전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 1989년 이후 한국현대미술과 사진’은 이런 의구심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준다.
지난 30년간 사진이라는 매체가 어떻게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새로운 영역을 구축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이 전시는 작가 75명의 300여 작품을 선보이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이래의 첫 대규모 사진전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지윤 운영부장은 이번 전시의 개연성을 두 가지로 짚어낸다. 첫째는 사진 매체는 90% 이상이 보도 혹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쓰여 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진기의 발명과 함께 사진이 현장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스트레이트 포토’ 형식으로 출발했음과 동시에 기록 기능의 매체로서 시대상을 반영해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은 거대 담론의 추상적 표현으로부터 소소한 개인의 일상 혹은 소외된 집단의 시선에 이르기까지 소재와 표현 방식을 바꿔왔다. 하지만 그것은 형식의 차이일 뿐 결국은 시대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런 현대미술과 사진 매체가 가진 공통점과 함께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이라는 전시 제목은, 현대미술의 특징 중 하나인 개인적인 시선에 반영되는 사회적 담론을 기록이라는 사진의 특성과 맞물려 생각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측면은 1989년이라는 특정 시기를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는 1989년을 기점으로 제작된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 부장은 1989년 전후에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들(소비에트 연방 해체, 베를린 장벽 붕괴 등)을 나열하며 전 세계적으로 세계화 열풍이 불기 시작한 시점임을 지적했다.
한국에서는 해외여행 자율화가 실시됐고, 해외 유학이 가능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 미국은 비싼 학비 때문에엄두를 못 내고 무료로 대학을 다닐 수 있던 독일이나 프랑스 등지로 갔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세계적인 변화의 물결을 직접 경험한 뒤 돌아왔고, 그 경험은 작업에 반영됐다.
이 부장은 이에 덧붙여 “우리나라의 미술에서 회화나 서양미술의 영향을 받은 여타 미술 분야들은 당시만 해도 뒤따라가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사진은 그 자체의 역사가 짧아 결과적으로 한국 사진의 역사는 세계 사진의 역사와 흐름을 나란히 갔다고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실험의 시작
전시는 30년 사진 역사의 시기별 특징에 따라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첫 섹션인 ‘실험의 시작’이 보여주는 작품들은 주제뿐 아니라 소재와 사진 자체의 물리적인 실험까지 이뤄진 다채로운 매체 연구가 특징이다.
당시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구본창이 기획한 ‘사진, 새시좌’전(1988년)과 김장섭, 김승곤 등의 작품으로 주목을 받은 ‘한국사진의 수평'전(1991, 1992, 1994년)은 기록 담당의 다큐멘터리적 역할을 중시한 이전의 사진들과 대비되는 기점으로써 제시된다.
단색화처럼 보이는 주명덕의 나무 넝쿨 사진 ‘잃어버린 풍경’을 시작으로, 죽은 화초나 조약돌 등 스쳐지나가는 소재들을 프레임에 담아낸 민병헌의 작품들, 이태원에서 미군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여성의 모습을 담은 오형근의 사진은 각각 70년대 유행했던 모노크롬 회화의 특징과 현대 미술에서도 끊임없이 거론되는 비주류의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사진이 순수 미술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한 증거로 보인다.
더불어, 사진을 실로 꿰매 이어붙인 구본창의 ‘태초에’와 사진을 입체 형태로 처음 선보인 이규철의 작품에선 물성에 집중한 매체 실험과 함께 사진 프레임 밖을 벗어난 작가들의 창의적 사고를 엿볼 수 있다.
개념적 미술과 개념사진
두 번째 섹션 ‘개념적 미술과 개념사진’은 조금 더 강하게 작가의 발언과 주장이 들어간 작품들을 선보인다. 1980년대 민중미술을 이끌었던 모임 ‘현실과 발언’의 창립 동인 성완경의 주위를 기록하며 사회, 관계, 삶 등에 대한 의미를 찾는 작업부터, 1999년 창립된 잡지 ‘포럼A'의 편집위원이었던 박찬경의 작품까지, 예술가의 사회참여가 어떻게 이뤄지고 변화됐는지를 보여준다.
북한의 아리랑 페스티벌을 담은 노순택, 청계천 재개발을 배경으로 사회적 가치에 대한 제안을 하는 ‘플라잉 시티’의 작업 등은 사회비판적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퍼포먼스, 아카이브, 연구 프로젝트의 형식으로 과거보다 더 다양하게 사진 매체를 활용하는 개념미술의 지평을 제시한다.
세 번째 섹션 ‘현대미술과 퍼포먼스, 그리고 사진’은 현대 미술의 언어로 해석하고 바라봐야 하는 작품들이 제시된다. 퍼포먼스와 설치 미술의 형식이 주목받기 시작한 현대미술에서 현장의 개념은 공감과 소통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현장을 기록하던 사진은 그 매체 자체의 독립성을 획득했다.
세트 설치와 인물의 연출 사진, 퍼포먼스 기록 형태 등의 사진은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여고생, 히피족, 여피족 등의 특정 집단에 스며들어 사회문화적 배경 속 인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니키리의 기록 작업, 김수자의 보따리를 늘어놓고 다시 싸매고 떠나며 삶의 여정을 은유하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사진이 눈에 띈다.
한 개인이 쓰는 잡동사니들을 그러모아 조각의 형태로 설치해 정체성을 표현한 오인환의 작업은 설치미술의 기록으로, 창을 통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자세히 보이는 호텔의 전면을 담은 김인숙의 거대한 사진 작품 ‘Saturday Night'은 연출사진과 세트설치가 결합된 방식으로 각각 제시됐다.
이미지 너머의 풍경: 상징, 반미학, 비평적 지평
마지막 섹션 ‘이미지 너머의 풍경: 상징, 반미학, 비평적 지평’은 디지털 미디어 기술의 발전과 함께하는 작품들을 보여준다. 이제 사진은 현대예술의 매체 중 하나로 공고히 자리를 잡았다.
이 기획이 바라보는 현대예술 매체로서의 사진은, 현실을 기록한 이미지에 근거하지만 객관적인 기록이 아니라개인적 상징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매체다. 기록되고 구축된 사실적 이미지들은 이제 발전된 사진 기술과 작가들의 의도에 따라 반미학적으로 전복되거나, 초현실적으로 확장됐다.
두 번째 방에서 소개됐던 오형근의 작업에서 인물은 이제 거대하게 프린트 되고 섬세한 표정이 너무도 자세히 노출된다. 어색한 화장을 하고 긴장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앉은 여고생의 모습은 아름다운 이미지의 제시가 아니라, 한 세대 혹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상징적 코드로 제시된다.
이번 전시에 대해선 국립현대미술관의 거대한 공간과 많은 양의 작업들에 비해 효과적인 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평들이 몇몇 눈에 띈다. 그리고 상업 갤러리 소속의 작품들이 태반이라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한국 사진사와 미술사에서 큰 의미가 있는 작품들을 모았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때로는 하나의 시각으로 전체를 이해하면 쉬워질 때가 있다. 관람에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지만, 사진예술의 현재가 있기까지를, 특히 한국 현대미술을 개괄적으로 이해하면서 보는 데 도움이 되는 전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들은 결국 순수 미술계의 시점에서 선정된 것들이며, 구획별로 정리된 개념 역시 한국현대미술사의 개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