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하고 버거운 일상이 절망스러울 때가 있다. 생계를 위해,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버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를 버티게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눈앞에 다가온 주말 데이트, 여름휴가, 아이의 웃는 얼굴 등 사람마다 다양하겠지만, 대개의 경우 오늘을 버티게 하는 힘은 어제의 추억과 내일의 기대다.
작가 임시호는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과 함께 할 때 주변 모든것이 하나로 압축돼 기억되는 것처럼, 1%의 기쁨이 99%의 힘겨운 나날을 이겨내게 만든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가 더 절망적으로 들린다고? 작가 임시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따뜻한 체온을 기억해
삶에 치이고 부딪힐 때마다 작가는 누군가의 체온을 느낀 순간을 떠올렸다. ‘이런 순간들은 왜 잊히지 않을까’ 궁금해하던 작가는 체온의 따뜻함이 주는 무한한 안정감에 주목한다. 몸이 기억하는 심리적 안정 그리고 그 순간의 환기가 삶에 어떤 용기를 주는지를.
갑자기 더워진 날씨를 뒤로하고 남산 길을 따라 작가의 해방촌 작업실을 찾았다. 얼큰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작가의 작업실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오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작업실로 쓰는 큰 거실과 방 안엔 100호 이상의 큰 그림들이 가득했고, 거대한 테이블 위에도 물성 실험에 열정적인 작가의 흔적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작품과 드로잉이 뿜어내는 색의 향연에선 엄마의 살갗 같은, 포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가장 따뜻한 36.5도는 그리운 누군가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작가는 이 매혹적인 미온을 캔버스로 옮긴다. "따뜻한 체온을 찾아서"란 시리즈로 현재 작업 중인 그녀의 최근작들에는 사라져가는 기억 속 남아 있는 따뜻함이 아련히 담겼다. 그림 속 이들의 포옹에는 차가운 푸른색과 대조적으로 무방비 상태의 일상의 편안함이 배어있다.
작가는 이 체온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여기에서 나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보다 안정감에 대해 말하고자 해요. 체온이란 감각을 통해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있고 보호하거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느끼죠. 어떠한 안정감은 여기에서 나와요. 나는 왜 이걸 그렸을까? 라고 반추해보면, 청년 실업, 보장받지 않은 노후, 비정규직 문제 등 기본 생활이 보호받지 못하는 전반적인 사회분위기속에서 이 심리적 ‘안정감’이 더욱 절실하구나. 그래서 나도 모르게 따뜻한 체온을 찾고 있구나. 라고 나의 심리상태를 발견해요.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다른 이들도 그렇지 않을까? 이러한 것들이 저의 작업의 모티브가 되요.”
삶을 지탱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무의식중에 몸의 감각을 통해 해소되고 위안 받고자 한다. 이를 통해 문제를 이겨나가고자 하는 인간의 본연의 심리상태가 무엇인지 찾고자 한다. 작가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이야말로 일상을 지탱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말한다.
할머니가 아이를 쓰다듬는 그림을 보자. 할머니만을 의지해 살아온 아이의 손에는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초록색 성적표가 쥐어져 있다. 아이 곁을 지키려 생을 버티는 할머니의 손길에서 강렬하고 복잡한 심정이 느껴진다. 서로에게 의지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삶을 지탱시키는 인간의 순수한 순간을 묻게 된다.
"그림은 나를 대면하는 과정"
임시호는 인간이 서로에게 의지하는 순간을 "충전"이라고 표현한다. 멈춤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모두 "재충전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충전이 완료돼 전원 플러그가 빠지면 몸의 감각이 열리기 시작한다고 작가는 말을 이었다. 이때 몸은 주변을 받아들이고 공간의 일부가 된다. 이는 작가의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감수성이 있다는 말은 스스로의 감정 상태를 잘 알고 있다는 걸 뜻해요. 자기가 스스로를 잘 인식하지 못할 때 괜히 짜증이 나고 화도 나고 예민해지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바깥의 불빛도 보이고 바람의 온도도 느낄 수 있게 되요. 그러면 내 불안과 화가 타인에게 전해질 틈도 없어요.” 그녀는 이어 장난기 어린 말투로 “인류 평화의 길은 자신에게서부터 찾아야죠”라며 웃었다.
자기를 인식하고 스스로에게 몰입하는 과정은 회화 작업과 닮았다. 작가는 그래서 그림 그리길 멈추지 못하는지 모른다. 나를 위한 일이지만 결국 세상을 향하는 그림처럼, 내 스스로에 집중할 줄 알아야 세상의 일도 삐딱하지 않게 받아들일 줄 안다. 몸이 공간의 일부가 되는 순간은 평온의 시간이 된다.
삶의 커다란 부침에서 결국 작가가 깨달은 것은 “(모든 걸 잃어도) 그래도 내겐 그림을 그릴 시간과 공간이 남았구나”였다. 생계을 위해 그림을 가르치고 여러 일을 해온 작가는 몸이 고된 날이라도 붓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붓도 들지 못할 때면 종이 위에 물감을 쥐고 짜버리기라도 했다. 10여 년을 고집스럽게 작업해오며 작가가 느낀 것은 “그림의 근간은 이전과 똑같을지 몰라도 현재는 내게 가장 잘 맞는, 나다운 그림을 그린다"는 점이었다.
이성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작가가 그린 감성적인 그림에 대해 묻자 그는 "그림을 통해 쉬기 위함"이라고 답했다. 삶의 스토리를 담는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삶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함이라고. 그림을 통한 몰입은 그래서 삶을 사는 원동력이 된다. “그림은 내 자신을 찾게 해주는 동시에 나를 잊게 해준다”는 작가의 말도 여운을 남긴다.
"삶의 한 순간이 삶 전체를 견디게 한다"
임시호는 회화의 가능성을 믿는다. 너스레를 떨며 “나이들면 늙고, 늙으면 서러워지고. 죽음 앞에 속절없는 건 다 똑같다. 죽음, 안정감 등 기본적인 것들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며 회화도 그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 AI(인공지능), VR(가상현실) 등이 인간을 위협하거나 또는 매혹시키며 발전하고 있지만, 이런 기계들을 앞두고 더욱 감성에 접근하는 것이 미래를 맞는 또 다른 길이라는 생각이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감각도 첨예하게 발달할 것이고, 이에 따라 감성의 요구도 더해질 것이란 역발상이다.
앞서 설명한 회화의 작용은 그림을 그린 이후에도 발현한다. 감각은 그걸 알고 느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유효하다. 한 번은 그의 그림을 사간 컬렉터로부터 그림의 색깔이 조금 어두우니 밝은 색으로 바꿔줄 수 있느냐는 의뢰를 받았다. 작가의 대답은 "작품을 계속 보세요. 보면 볼수록 달리 보일 거예요"였다. 실제로 컬렉터는 얼마 뒤 "정말 그렇더라"는 연락을 해왔다. 작가는 이에 대해 에너지 드링크처럼 짧은 시간에 흡수되는 자극은 체온의 속도와 걸맞지 않다고 했다. 그가 그려내는 미묘한 온도들은 곁에 두고 계속 바라보면 바라보는 이의 감각에 맞춰 은근하게 변화한다. 감각적이고 인상적인 그림보다 교감하는 그림을 통해 작가는 회화가 가진 느림의 힘을 실험하는 것 같다.
작가는 무척 개인적이고도 일상적인 심리상태를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결핍된 무언가를 발견하는 과정을 회화로 표현한다.
작가는 "(나는) 사회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한 개인을 그리기보다 그 문제점을 내버려두지 않고 이겨나가고자 하는 인간 본연의 심리상태를 그리고자 한다"고 했다. 세상을 고치려는 시도나 스스로를 치유하는 과정으로서의 작업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알고 살아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의미다. 스스로를 위한 그림이지만 자연스레 이타적인 영향력도 발휘할 것이다. 작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죽기 직전에 보고 싶은 것을 그릴 뿐"이라고.
한 여인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는 그림('Life is Precious')에선 "다 빠져나갔구나" 하는 한탄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젊은 시절 아이에게 젖을 물렸을 그녀는 이제 노쇄하고 허무한 상태다. 그녀에게 남은 황망한 불안함은 어떤 안정감이 채워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