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7호 김금영 기자⁄ 2016.06.10 14:52:00
(CNB저널 = 김금영 기자) 2016년 6월, 롯데백화점 잠실점 에비뉴엘 6층 아트홀에 특별한 미용실이 오픈했다. 홍학순 작가의 ‘윙크토끼 본능 미용실’이다. 전시장 입구 쪽에 설치된 미용실의 물결무늬 간판에 자리 잡은 토끼가 방문객을 향해 귀엽게 윙크를 던진다. 바로 ‘윙크토끼’다. 본능 미용실 안에 들어서면 윙크토끼를 비롯해 다양한 친구들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우유각 소녀’는 본능미용실의 본능 디자이너로, 양 볼에 새침한 듯 부끄러운 듯 홍조를 띠고 있다. 우유각 소녀에게는 사랑하는 남자 친구 ‘우쭈쭈’도 있다. ‘흑마걸’은 자유롭고 당당한 모습으로 눈길을 끈다. 본능미용실에서 본능의 몸을 얻은 친구로, 날개 형태의 검은 머리로 우주를 날아다닌다. 윙크토끼의 또 다른 친구 ‘지돌이’는 양볼에 도토리를 한가득 물고 있다. 그는 윙크토끼만 알아듣는 언어로 말한다. 모두 홍 작가의 친구이자 방문객들의 친구들로, 함께 새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개성이 가득한 이 미용실에선 머리 스타일만 맡기는 게 아니라, 내 마음까지 맡겨야 할 것 같다. 이들이 무슨 이야기든 열심히 귀기울여 들어줄 것 같기 때문이다. 행복한 표정의 이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대화를 할까? 이 친구들과의 만남을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홍 작가는 계원예대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거치며 순수미술과 영상을 전공했다. 하지만 이 과정이 남들보다 늦었다. 주입식 입시 미술 과정에 불만을 품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작가는 “중2병이 강하게 왔던 것 같다”며 웃었다. 주변에 그림을 그려 달라는 친구들의 요청에는 응했지만, 정작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22살이 되고, 낮인데도 별이 보이는 요상한 날을 맞았다. 그 빛나는 별을 보면서 문득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강한 생각이 들었다고.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바로 행동으로 옮겨 검정고시를 봤고 20대 중반 나이에 미술 대학에 입학했다. 작품 활동에 몰입하다가 2001년 무수한 동그라미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동그라미 속에서 윙크토끼와 친구들이 탄생했다.
“제가 첫 독립한 시기가 1998~2001년이었어요. 그때 집에서 동그라미 그리는 걸 좋아했죠. 동그라미가 다 똑같은 것 같지만, 그리다 보니 다 모양이 달랐고, 각각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도 달랐어요. 각각의 동그라미가 사귀면서 그룹을 이루는 과정도 있었고요. 그러던 어느 날, 친해진 동그라미들끼리 짝을 지어주다가 토끼가 탄생했어요. 그리고 친구들도 연이어서 탄생했죠.”
치열하고 어두울수록 더 밝고 행복하게
윙크토끼가 탄생하자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이 캐릭터가 작가에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이 과정을 이상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어릴 때 인형과 대화하면서 놀지 않았나? 물리적으로 인형이 입을 열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아이들은 인형과 대화를 이어 나가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자신이 하는 낙서의 그림과도 대화를 나누던 아이는, 어른이 돼서는 그런 이야기하기를 어색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홍 작가는 이 습관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타자와의 소통 방법을 오롯이 간직한 어른이다.
그는 이런 소통법으로 각각의 캐릭터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듣는다. 윙크토끼가 한쪽 눈을 계속 깜빡이는 건 자신이 태어난 '동그라미 월드'에서 오는 신호를 받기 때문이다. 손가락 갯수는 변하는데, 이는 우주를 날 때 평소 세 개였던 손가락이 네 개로 늘어나 쫙 펴지기 때문이다. 지돌이가 양볼이 미어지도록 가득 물고 있는 건, 도토리이지만 또한 사랑, 행복이기도 하다. 그냥 캐릭터가 아니라 각각이 삶을 영유하고 있고, 이건 우리네 인생사와 마찬가지다.
“그림을 통해 뭘 말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거창하게는 평화, 우정, 사랑이겠죠. 하지만 저는 사실 거창한 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 숨은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고 싶었어요. 그림 속 지돌이는 비를 피하기 위해 우산을 쓰고, 윙크토끼는 차도 마셔요. 우리가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지요. 평범한 삶의 한 부분을 드러내면서 어떤 형태로도 존재할 수 있는 행복과 평화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작가가 일상에서 강렬하게 느낀 감정이 작업으로 나타난다. ‘물대포’는 경찰의 물대포에 맞고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그렸다. 강렬한 물줄기를 마주한 윙크토끼의 모습이 화면에 보인다. 그런데 맞은편 벽면에는 물을 마시는 윙크토끼의 여러 모습을 담은 ‘물 한 잔’이 있다. 같은 물인데, 벽의 양쪽이 이렇게 다르다.
“물대포에서 물은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죠. 그런데 반대편 화면에는 살려면 꼭 마셔야 하는 물이 나와요. 물이라는 단어 자체는 죄가 없어요.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삶과 죽음이 오갑니다. 똑같은 소재가 한쪽에서는 힘을 주고, 다른 쪽에서는 힘을 앗아가는 현상이 강렬하게 느껴졌어요. 이런 사회적인 메시지들을 그냥 표현하는 것보다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평화와 행복을 더욱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거칠 수 있다. 그러나 귀여운 캐릭터로 표현된 이야기는 희망의 가능성을 준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위해 사회라는 괴물과 투쟁한다. 그것은 인간답기 위한, 억압을 벗어나기 위한 과정이지만 지치도록 싸우다가 괴물이 사라지면 멍해진다. 인간답고 싶다던 목표는 어느새 잊고 괴물에게 종속돼버리는 현상이다. 그래서 작가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 즉 행복과 평화를 잊지 않기 위해, 놓치지 않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 그 과정을 윙크토끼 친구들이 함께 한다.
강동원 주연 영화 ‘가려진 시간’ 작업에도 참여
전시장에 나타난 작가의 작업은 회화뿐 아니라 드로잉, 조각 및 애니메이션으로 다양하다. 사실 ‘본능미용실’은그의 다양한 작업 중 한 부분이다. 2011년 SNS를 통해 소통하다가 각각의 사람들에게 맞는 캐릭터를 그려줬다. 실제로 얼굴은 모르니 대화를 하며 속마음과 기질을 파악해 그렸다. 그 사람의 본능을 드러낸 캐릭터들이 탄생했고, 그래서 ‘본능캐릭터’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전 우주의 친구들’(https://youtu.be/j8HeBwVxMp8)을 선보였다. ‘또또’라는 별에 사는 아이들이 자신의 본능을 찾으러 본능미용실에 간다. 여기엔 윙크토끼, 우유각 소녀, 우쭈쭈가 산다. 그리고 찾아온 별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말 상대도 해준다. 이 미용실에 있는 기계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본능을 찾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나온다. 더 행복해진 웃음이 인상적이다. 작가는 이밖에도 애니메이션 ‘계속 달리는 잉카씨’를 제작했고, 2009년 ‘인디애니페스트 영화제’에서 대상도 받았다.
“캐릭터와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이 친구들이 움직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죠.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쉽게 만들면 5분 영상엔 50장 정도가 들어가요. 부드러운 움직임을 보여주고 싶으면 같은 5분짜리 영상에 5000장을 그려 넣기도 하죠. 제가 다양한 형태로 작업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제게는 모두 그림이에요. 애니메이션은 필름에 그리고, 아크릴과 과슈로는 캔버스에 그리는 거죠.”
올 11월 개봉 예정인 강동원 주연의 영화 ‘가려진 시간’에도 작가는 참여했다. 윙크토끼가 중요한 영화적 장치로 등장할 예정이라고.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히지 않았지만, 윙크토끼가 영화와 어떻게 어우러질지 기대감이 커진다.
윙크토끼의 질주는 거침없다. 소재 고갈을 염려하는 목소리에 작가는 “1000년이 넘는 이야기가 이미 ‘윙크토끼 설계도’에 마련돼 있다”고 답하며 웃었다. 이 설계도의 원본은 1만 페이지에 육박한다. 2003년 책으로 일부가 출간되기도 했는데, 암호 체계가 특징이다. 이 이야기들이 찬찬히 작업으로 나오는 과정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열정을 밝혔다. 그의 작업은 편견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팝아트가 유행일 때는 팝아트라 불렸고, 그저 낙서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러스트라고 보는 경우도 있었다. 이 모두에 대해 작가는 ‘노(No)’라고 답하지 않는다. 작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건 순수예술이다.
“순수한 예술적 동기로 창조된 예술을 순수예술이라 하죠. 작가는 사상과 목표에서 흔들리지 않고 의도대로 작업하고요. 윙크토끼는 제 의도가 확실히 반영된, 어찌 보면 주관성을 담은 캐릭터예요. 상업성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저는 근원만은 놓치지 않으려 해요. 윙크토끼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하려는 거죠. 어떻게 불리든 연연하지 않지만, 저 스스로는 이 캐릭터의 탄생 때부터 느낀 주관적인 즐거움, 행복과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앞으로 꾸준히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미용실의 경쟁이 치열한 시대에 ‘윙크토끼 본능미용실’도 그 대열에 참여했다.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북적댈 것 같다는 예감이다. 전시는 잠실점 에비뉴엘 6층 에비뉴엘 아트홀에서 6월 2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