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트리피케이션과 예술인 소외 현상 속에서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놓인 작가들의 복지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어느 것도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생(自生)을 모색하는 작가들의 움직임이 최근 몇 년 새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이번에 만나볼 자생 예술단체는 공공미술 및 문화예술기획 분야에서 활동하는 미술인 비영리민간단체 '공공미술 삼거리'(이하 삼거리)다. 삼거리는 작가들이 중심이 돼 마을 문화공간을 만들기와 문화예술기획 사업을 비정기적으로 진행해왔다. 작업과 공공미술 협업을 종횡무진하는 이들 삼거리의 이모저모를 들여다보고, 또 다른 예술가들의 자생적 복지 대안을 탐색해보자.
작가들의 공공미술 협동조합
한가로운 6월의 초저녁, 마포구에 자리한 삼거리 작업실 겸 양철모 작가의 스튜디오에서 삼거리의 주요 멤버 3인방(양철모, 권용주, 강동형 작가)을 만날 수 있었다. ‘믿음, 소망, 사랑', 아니 ‘사랑, 배려, 신뢰’로 이뤄진 이 예술가 단체는, 함께 장작을 패거나 만화책을 보며 까르르 즐거울 수 있는 인지상정의 공동체였다. 삼거리 멤버들은 모두 활발히 작업하는 예술가들로, 각자가 활용할 수 있는 이이디어와 기술을 이용해 공공미술 사업을 함께 진행한다.
초기에 삼거리의 대표를 맡은 양철모는 조지은 작가와 함께 작업과 기획을 겸하는 미술가 그룹 '믹스라이스'로 활동하고 있다. 아시아의 ‘이주’가 만들어낸 여러 흔적과 과정-경로-결과의 기억들에 관해 작업해왔다. ‘올해의 작가상 2016’ 후원 작가로 선정돼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권용주는 설치미술을 하는 작가로, 올해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 입주했다, 도시에 버려진 부유한 물건들을 켜켜이 쌓아 구조를 만들며, 전시 디자인 일도 겸한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젊은 모색 2014'전에 거대한 폭포 설치작업을 전시한 바 있다.
강동형은 현재 삼거리의 대표로 활동하며 회화, 드로잉, 만화 작업을 한다. 작년 합정지구에서의 개인전과 올해 서울바벨 전 참여를 통해 꾸준히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다재다능·박학다식한 척척박사로, 작가 활동 이외에도 여러 곳으로부터 도움을 구하는 손길을 받는 능력자로 알려졌다.
삼거리는 작가가 해석하고 실행하는 공공미술 전문 집단으로 이들 3명을 주축으로 결성됐다. 2006년 'A&C(Art & Communication) 삼거리' 단체 결성을 시작으로 '퍼블릭아트 고물상'(2009)이란 이름을 거쳐 2012년 '공공미술 삼거리'로 서울시 비영리민간단체 등록까지 마쳤다. 현재 10여 명의 작가들이 고정적으로 참여하고, 그 외에도 매 사업에 도움을 주고받는 동료들이 많다.
지난 10년 간 삼거리는 다양한 주민참여, 문화예술 교육, 워크숍, 행사기획, 디자인, 전시, 설계, 제작 등의 국공립 기관 사업에 참여해왔다. 삼거리 작가들의 작업은 저마다 사회참여적 의미를 지닌 한편, 이러한 단체 협업을 통해 작업과 생계를 해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왔다. 삼거리가 협동조합으로서 작가들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은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삼거리 친구(작가)들은 개인 작업 및 사업 수행에 필요한 장비를 매번 사는 대신 삼거리 공동체에서 빌려 사용한다. 이뿐만 아니라 작업과 삶에 필요한 여러 정보들을 주고받는 등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공동체다. 이런 단체의 운영·유지를 위해 사업 수익의 15%를 삼거리 공동 출자금으로 적립하고 이를 통해 긴급 자금을 대출받기도 한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협동조합에 필요한 합리적 의견 수렴과 친목 유지를 동시에 달성하고 있다.
예술가와 커뮤니티에겐 공간이 필요해
삼거리의 활동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2006년 소외지역 환경개선을 위한 공공미술 프로젝트 '마석이야기'를 시작으로 무지개다리 사업, MDF 마석동네페스티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어린이관 조성사업 등 크고 작은 사업을 지속적으로 해마다 이어 왔다. 그리고 공공미술 작업과 함께 맥락이 이어지는 커뮤니티 공간을 하나씩 마련해 왔다.
충북 괴산면의 탑골만화방, 서대문구 개미마을의 '버드나무가게', 남양주 마석가구단지의 '공장의 불빛' 등이 모두 삼거리가 구축한 재미난 공간들이다. 특히 2012년 삼거리 친구들이 직접 폐가를 리모델링해 꾸민 탑골만화방은 현재도 전국 곳곳에서 찾아오는 독특한 입지를 형성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개미마을에 위치한 버드나무가게는 젊은 작가들이 작업을 위해 일정 기간 사용하는 공간이다. 또 공장의 불빛은 예술가와 이주노동자들이 만나는 문화적 거점으로 만들어졌다. 듣다 보니 삼거리가 이렇게 탈중심적인 위치에 적지 않은 공간을 구축해 온 이유가 궁금해진다.
이런 공간 조성은 각 지역의 문화 네트워크의 허브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작가들의 기획 공간이 된다. 양 작가는 이에 관해 "예술가와 커뮤니티에게 공간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간을 통해 커뮤니티가 유지되고, 작품이나 물건을 보관할 수도 있다. 대개의 작가들에게 공간적 제약이 큰 탓도 있고, 최근엔 젠트리피케이션의 영향으로 될 수 있는 한 먼 곳을 염두에 두기도 한다. 대부분의 (설치나 미디어아트를 하는) 젊은 작가들의 전성기가 40~50대까지인 경우가 많아 작가들의 은퇴 후 삶을 위해서도 공간 마련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강 작가는 “삼거리 활동을 안 했다면 공간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며 권 작가와 함께 귀촌 및 공간 마련에 대한 계획을 드러냈다. 이는 삼거리 친구들 대부분이 공유하는 생각이기도 하다. 은퇴 후 꼭 한 동네에 머물지 않더라도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는 것에 긍정적이었다. 강 작가는 "이게 다 외로워서 그래요"라며 농을 치듯 말했지만, 삼거리가 가진 신뢰와 유대를 엿볼 수 있었다.
예술인 자생의 가능성, 대안은 '인지상정' 공동체
탑골만화방을 짓고 벌써 4년이 됐다. 요즘엔 초창기만큼 자주 내려가지 못한다는 이야기 사이로 만화방을 주로 이용하는 지역주민과 전국구 방문객들의 에피소드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잘못 사용한 화장실을 알아서 청소하고, 이불도 알아서 말리는가 하면, 깨진 유리까지 알아서 갈아끼우고 간 분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만화방의 고정 방문객들이 알아서 공간을 보살피고 돌보는 분위기는 삼거리가 공유하는 공동체 의식과 닮았다. 서로 배려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한 안정적 관계를 삼거리 사람들은 '인지상정'과 '사랑'이란 말로 표현한다.
양 작가는 “같이 동료처럼 일할 친구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삼거리를 통해 그런 친구들을 앞으로도 만났으면 좋겠다.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면 계속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그렇게 단체의 규모가 커진다고 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 외의 다른 것을 기대하는 이가 들어오면서 규모가 커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삼거리의 정체성에 대해 "공공성을 추구하는 계와 협동조합의 중간 형태”라고 덧붙였다.
공공미술 분야의 초기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공식적 제도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도 이와 맞닿았다. "타 공공미술 비영리단체들은 이제 대부분 사회적 기업으로 제도화됐다. 그렇게 되면 결국 회사가 예술가를 고용하는 체계로 변한다. (단체의) 제도화 필요성은 인식하지만, 공공미술을 사업화하지 않는 방향은 없을까 고민하게 된다. 그게 가능하다면 사회적 기업으로서 공동주택을 세우거나 인건비를 고정적으로 줄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각자가 예술가로서 삶과 작업에 필요한 복지 수단을 고민하며 결성된 삼거리는, 어느덧 예술인 협동조합의 형태를 온전히 갖춘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