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술 아니면 작업이었던 오윤의 일생
“어렸을 때 본 오빠는 늘 방에 처박혀 있었어요. 바깥에서 술을 많이 마시는 것 아니면, 늘 방에 있었죠. 그리고 그 방에서 흰 러닝셔츠를 입은 채 진흙을 파고 깎는 부조 작업을 온종일 했어요. 그러다가 드로잉을 열심히 하기도 했죠. 오빠는 늘 그랬어요.”
오영아(66) 씨는 오빠 오윤(1946~1986)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오윤은 한국의 현실 사회를 비판하고, 이를 민족성이 담긴 모습으로 표현해낸 민중미술의 대표 작가로 꼽힌다. 1980년대 군사정권 하의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 속, 고통 받고 소외 받는 평범한 민중들의 이야기를 작업으로 풀어냈다. 하지만 영아 씨에게 오윤은 그런 위대한 명성을 등에 업은 작가라기보다는 작업을 사랑한 한 인간이었다.
올해 초 민중미술을 필두로 한 대규모 전시 ‘리얼리즘의 복권’을 선보였던 가나아트가 민중미술 사랑을 이어간다. 주인공은 오윤이다. 가나아트센터 전관에서 8월 7일까지 열리는 ‘오윤 30주기 회고전’이 공개됐다. 이 자리에 오윤의 여동생 오영아 씨를 비롯해 오윤의 두 아들, 매부 김익구 씨, 그리고 전시를 기획한 윤범모 가천대 교수가 참석했다. 이번 전시의 기획 과정과, '인간 오윤'의 이야기도 전해 눈길을 끌었다.
오윤은 1960년대 대학가 문화운동과 1980년대 민중미술 부흥 시기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현실비판적인 내용을 담은 흑백 판화를 시작으로, 다채로운 색과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는 선을 도입해 작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기존 미술계의 주류를 형성하던 모더니즘의 틀에서 벗어나,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포스터와 걸개그림, 월간지의 표지화와 삽화 등 당대 상황과 맞물리는 작품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사회적인 시각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많은 작가들이 이 시기 ‘한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에서 예술적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 가운데 오윤은 탈춤, 판소리, 농악 등 토속적인 주제를 통해 자신의 예술적 향방을 모색하며 단연 주목 받았다. 그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현실과 발언’ 단체를 통해서다. 작가로서 본격적인 첫 발을 내딛은 때이기도 했다.
윤 교수는 “오윤은 민중미술의 출발을 알린 단체 ‘현실과 발언’의 창립 작가로 참여했다. 전통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흙 재료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멕시코 미술의 영향도 받아 벽화 작업도 했다. 그 시절 ‘현실과 발언’ 동인들과 밤새 토론하며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며 열정적이었던 오윤을 회상했다. 김익구 씨 또한 “평소에는 늘 말이 없던 오윤은 술을 먹으면 말이 많아졌다. 이야기를 밤새도록 했다. 고향 이야기부터 역사, 문화, 종교 이야기까지 사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며 사회 현실에 관심을 보인 오윤을 기억했다.
이번 전시는 그런 오윤의 작업을 기억하고, 현 시대에 되새기는 데 의미가 있다. 농촌의 삶이나 자연에 대한 애정이 드러나는 ‘대지’ 시리즈부터, 고달픈 노동에 시달리는 빈민층의 모습을 반영한 ‘노동의 새벽’, 그리고 민담이나 설화를 소재로 한 작품까지 전시장에 펼쳐진다. 현실 비판에 그치지 않고 한(恨) 같은 우리 민족만의 정서를 역동적으로 담으려 한 그의 에너지가 전시장에 울려 퍼진다. 신명 나는 칼춤으로 민중의 애환과 한을 조형적인 방법으로 치유하고자 한 ‘원귀도’나 ‘도깨비’도 찾아볼 수 있다.
생전 오윤의 한 마디 "권위적 미술 타개"
대중적이면서도 전통적인 도상을 통해 미술과 사회의 소통을 꾀한 오윤도 만날 수 있다. 윤 교수는 “지금 시대에는 판화 작업의 에디션이 이야기되지만, 80년대 판화는 상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판화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 오윤의 작품 또한 에디션이 없었다. 오윤은 ‘현실과 발언’에서 매체 실험에 집중했다. 유화만이 미술의 전부가 아니라며, 미술이 너무 권위적이고 대중친화적이지 않은 것을 타개해야 한다고 늘 말하곤 했다. 그래서 에디션 넘버링이 아닌, 판화 작업을 많이 선보이는 데 힘썼다”고 말했다.
김익구 씨도 한 마디 덧붙였다. 그는 “오윤이 판화 작업에 열중할 때 ‘이것은 문화 게릴라’라며 웃었다. 그는 작품을 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다만 판화를 열심히 찍어서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고 볼 수 있게 하겠다고 연신 말했다”며 웃었다. 생전에는 제대로 된 가격을 평가받지 못한 오윤의 작품은 사후에 더 관심을 받는 모양새다. 2015년 12월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서 ‘칼노래’는 4800만 원에 낙찰됐고, 올해 6월 초 K옥션 온라인 경매에서는 ‘무호도’가 2700만 원에 낙찰됐다. 윤 교수는 “판화가 이 정도 가격에 거래된다는 건 전무후무하다. 그만큼 판화에 대한 관심이 과거와 비교해 높아진 것도 입증한다”고 말했다.
미술과 사회의 소통을 꾀한 오윤의 작업이 더욱 가깝게 다가오는 건, 그가 사회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보고 느낀 것을 담았기 때문이다. 작업 중 춤을 소재로 한 그림이 유독 많은데, 동래학춤으로 이름을 떨쳤던 외조부 김기조 선생과 외삼촌 김희영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영아 씨는 “오빠는 전통 춤에 대한 이해도가 깊었다. 외삼촌에 이어 이종사촌이 학춤의 전통을 물려받았는데, 집에 데려다놓고 춤사위를 보며 그리곤 했다”고 설명했다. 윤 교수 또한 “전통 춤 연구가가 말하길, 그림 속 춤 동작이 막연한 동작이 아니라 정확한 동작이라고 하더라. 실제 자신이 접하고 이해한 내용이었기에 더욱 대중의 가슴에 공감을 일으킨 게 아니겠는가” 하고 덧붙였다.
오윤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애비’ 속 어린아이는 큰아들 오상묵(39) 씨가 모델이다. 윤 교수는 “세계문학전집 발간 기념 포스터에 쓸 수 있는 작품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애비’를 줬다. 큰아들이 태어나고 얼마 안 됐을 때 아들을 모델로 작업한 그림이다. 우리의 주체성을 지키면서 세계문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라고 하더라. 그림을 보면 불어오는 바람에서 아이를 보호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이렇듯 오윤은 우리의 전통과 주체성을 갖추는 걸 늘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윤의 열정이 담긴, 그가 생전 직접 작업한 판화들과 더불어 그가 작가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기 이전의 미공개 드로잉작들도 처음으로 공개한다. 학창시절 오경환 등과 함께 여행하고 어울리며 그리곤 했던 스케치북의 드로잉이 전시장에 자리 잡았다.
윤 교수는 “미공개 드로잉작들을 보고 나도 충격을 받았다. 오윤이 1970~75년 막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로서의 모색기 때 그린 작품들이다. 오윤이 젊은 시절에 어디에 관심을 뒀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며 “내가 보고 받은 느낌은 매우 역동적이다. 힘이 넘치는 그림을 통해, 역시 훌륭한 작가는 토대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는구나 느꼈다. 이번 전시의 중심 중 하나라도 봐도 좋다”고 극찬했다.
크레파스, 색연필, 모필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드로잉부터 흙 작업, 테라코타, 유화 작업, 그리고 그가 가장 많이 활용한 목판화에 이어 유화, 조각 등도 전시돼 오윤의 평생 작업을 전반적으로 살필 수 있도록 구성됐다.
전시를 함께 살펴본 둘째아들 오상엽(36) 씨는 남다른 감회를 밝혔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다.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자꾸 천재라고들 하는데, ‘친한 사람들이라 그렇게 말해주는 건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나도 서른이 넘고 아버지에 관심을 갖고 조금씩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 근대미술에 관심을 갖고 찾아봤다. 그 가운데 아버지의 작업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해 좀 더 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시에서도 아버지를 더 알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윤 교수와 영아 씨, 김익구 씨 부부는 예술가로서의 오윤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전했다. 이들은 “오윤이 30년 전 7월 5일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러 30주기 전시를 갖게 됐다. 그를 기억하고 다시 만나는 이 자리에서 오윤의 진정한 예술세계가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고 말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