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기자 간담회에 앞서 30분 일찍 전시장에 도착했다. 전시장은 ‘사고(Thinking)’, ‘제작(Making)’, ‘소통(Storytelling)’을 주제로 꾸려져 있었다. 특이한 가구와 제품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다양한 작업이 펼쳐졌다.
그런데 그 많은 작업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시장 거의 끝 무렵에 설치된 ‘스펀 - 훌라!’였다. 넓은 공간에 혼자 빙그르르 돌아가는 설치 작품들이었다. 회전하는 팽이처럼도 보였다.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작품 설명을 읽어보니 앉아도 된단다. 그래서 앉아봤다. 의자가 빙그르르 돌아가는 가운데 몸이 떨어질 것 같지만 쉽게 떨어지지 않도록 설계돼 있었다. 의자에 앉자 돌아가는 세상이 보였다. 바로 전의 세상과 다른 세상이었다. 한참을 그 의자에 앉아 어린아이가 된 듯 놀았다.
생각하면 그저 스스로 돌아가는 의자일 뿐이다. 하지만 이를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구현해낸 작가의 실험 정신이 인상깊었다. 남들이 스쳐지나칠 이야기에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능력. 그 점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는 팽이처럼 도는 의자에 앉아 색다르고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었을까. 아이디어의 산실인 헤더윅 스튜디오를 이끄는 세계적 디자이너 토마스 헤더윅이 ‘헤더윅 스튜디오: 세상을 변화시키는 발상’전을 위해 한국을 찾았다. 헤더윅의 과거부터 미래까지를 아우르는 핵심 프로젝트들을 공개하는 자리다.
이번 전시 타이틀은 그에게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 간담회에서 그는 연신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늘 관심을 갖고 궁금해 하며 질문을 던지는 게 그의 천성 같았다. “22년 스튜디오를 시작할 때만 해도 지금과 같은 전시를 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못했다. 헤더윅 스튜디오의 작업을 보여주는 첫 대규모 전시다. 내 작업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또 설레기도 한다. 그간의 아이디어를 직접 보여줄 기회”라고 감회를 밝혔다.
헤더윅은 영국 디자인계의 거장인 테런스 콘란 경이 ‘우리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극찬한 인물이다. 영국 왕립건축가협회의 명예회원이자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의 선임 연구원이다. 영국 왕립예술학교, 던디 대학교, 브라이튼 대학교, 셰필드 할람 대학교, 맨체스터 대학교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린스 필립 디자이너 상'을 받았고, 2004년 최연소로 '왕립 산업 디자이너'의 칭호를 수여 받았다. 이밖에 영국 왕립건축가협회의 '루베트킨 상'과 '런던 디자인 메달'을 수상했다. 그는 1994년도에 헤더윅 스튜디오를 설립해 건축, 도시계획, 조형물, 디자인 등의 분야에서 창조적인 사고를 펼쳐 왔다. 건축설계사, 디자이너, 제작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전문가로 이뤄진 180여 명의 구성원과 협업을 통해 선보인 작업들은 저마다 개성을 지녔다.
대표작으로는 런던 시의 의뢰로 50년 만에 새롭게 디자인된 ‘런던 버스’, 직접 개발한 기계로 독창적인 제작 방식을 도입한 ‘에버리스트위스 아트 센터’, ‘2010 상하이 엑스포’에서 ‘씨앗 대성당’으로 불리며 영국의 대표 상징물로 자리 잡은 ‘영국관’, 2012년 런던올림픽 성화대 등이 있다. 현재도 LA 실리콘밸리의 구글 신사옥,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 타운의 새로운 박물관 설계 등 세계 곳곳에서 30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 중이다.
"다양한 작품의 통일점?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이들이 펼치는 작업은 매우 다양하다. 형태만 놓고 봐서는 통일점을 찾기 힘들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이것이 바로 헤더윅 작품들의 공통점이었다. 형태부터 기능까지 창의성이 한껏 발휘됐다. 런던 버스의 경우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연료의 효율성, 승객과 운전자의 편의성을 고려했고, 심미적으로는 일반 버스의 딱딱한 이미지를 벗은 곡선 형태에 탁 트인 유리창까지 재미있는 모양으로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했다.
2018년 완공 예정인 템스강의 ‘가든 브리지’도 눈길을 끈다. 일반적으로 교량은 딱딱한 재질로 튼튼하게 만들어진다. 그런데 헤더윅 스튜디오는 이 교량 위에 공원을 조성할 생각이다. 전시장에 공개된 이 교량 모형에는 숲을 옮겨다 놓은 듯 나무가 가득 심어져 있고, 곳곳에 쉴 공간도 마련돼 있다. 위에서 보면 교량이 아니라 나무 울창한 섬 같다.
헤더윅은 “건축가 또는 예술가는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것보다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작업하는 게 더 중요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문제이든 끝까지 대화하고 고민하며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하찮은 문제란 없다”고 했다. 이어 “여럿이 함께 놀이하듯 논쟁하고 실험하며 아이디어를 키우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경험을 가장 중시한다. 불편하거나 실망스러운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하다보면 거기서 새롭고 창의적인 것이 발견된다”고 그는 자신의 작업 과정을 밝혔다.
“이건 안 돼”가 아니라 “이거 되겠는데?” 하는 긍정적 태도다. 부정적인 태도가 앞서면 창의적인 사고가 발휘될 기회 자체가 사라진다. 헤더윅의 머릿속에는 이 세상에 쓸데없는 아이디어와 생각은 없다는 생각이 꽉 찬 듯했다.
전시를 기획한 김지현 큐레이터는 “현대는 창의적인 사고와 융합적인 사고방식을 중시한다. 똑같아 보이는 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창의적인 작업을 선보이는 대표적인 곳이 헤더윅 스튜디오”라고 소개했다. 이어 “가구부터 건축물까지 그들의 폭넓은 작업을 따라가는 이번 전시를 즐기고 새로운 영감을 받을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고-제작-소통 주제로 헤더윅의 대표작을 소개
전시는 크게 네 섹션으로 이뤄진다. ‘사고(Thinking)’는 독창적 사고방식을 가꿔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헤더윅 스튜디오의 구성원뿐 아니라 각 분야 전문가들과 디자인 과정을 공유하고 모은 비평적 의견들의 결과다. 디자인 전반에 걸쳐 철저한 질문과 분석, 그리고 재분석을 거치면서 핵심 개념을 도출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곡물 저장고의 길고 높은 원통형 사일로 구조를 새롭게 디자인한 ‘자이츠 아프리카 현대미술관’, ‘런던 버스’, 그리고 한쪽으로 둥글게 말리는 조형물 같은 영국의 ‘롤링 브리지’ 등의 작업 과정이 전시된다.
두 번째 섹션은 ‘제작(Making)’이다. 작품 제작 과정에서 이뤄지는 소재에 대한 다채로운 실험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이곳에 전시된 ‘익스트루전’은 고온 가열돼 물러진 금속을 금형 틀에 통과시켜 연속된 형태를 만들어내는 압출성형 기법을 활용했다. 매끈한 좌석 부분과 비정형적인 좌석 부분이 공존하는 독특한 형태다. 물이 떨어지며 변화하는 형태를 형상화해 디자인한 런던의 ‘블라이기센’도 볼 수 있다. 차가운 물에 액체 상태의 금속을 떨어뜨리는 실험 속에 수백 개에 달하는 무작위 형태가 눈길을 끈다.
세 번째 섹션은 ‘소통(Storytelling)’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어떻게 사람들의 생활과 어우러지고 소통하는지를 보여준다. 겉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실용성도 갖춘 작업들은 관객에게 놀라움, 즐거움을 선사한다.
헤더윅 스튜디오의 대표작인 ‘영국관’의 탄생 과정도 볼 수 있다. 전시관의 안과 밖을 관통하는 7.5m 길이 6만 개의 무수한 투명 막대가 모인 결과물이다. 이 막대 끝부분에는 25만 개의 씨앗이 담겨 신비로운 공간을 연출했다. 2010년 상하이 엑스포의 야외 부지에 설치돼 6개월 동안 8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참가국들의 화합을 상징하기 위해 청동 소재의 꽃잎 모양으로 제작된 올림픽 성화대도 볼 수 있다. 싱가포르의 ‘러닝 허브’도 눈길을 끈다. 타원형 구조의 교실과 정원 등이 새로운 학습 공간으로서의 건물의 역할을 해낸다. ‘가든 브리지’도 이 섹션에 공개된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이 가장 재밌어 하는 ‘스펀 - 훌라!’가 기다린다. 디뮤지엄이 의뢰해 헤더윅 스튜디오가 최초로 선보이는 작업이다. 2008년 금속과 회전 틀에 찍어낸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었던 스펀 체어가 이 공간에서는 무한대로 회전한다.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과 빛 센서를 통해 자동으로 반응하고 회전한다. 전시 관람 뒤 마지막 순서로 이 의자에 앉으면 창의적 아이디어가 머리속에서도 빙빙 도는 듯 하다.
사람들은 창의적인 아이디어 내기를 고통스러워한다. 회의에서 “아이디어 좀 내봐” 하는 상사와 눈과 안 마주치려고 고개를 떨구기 십상이다. 입은 꽉 다물어진 채 열리지 않는다. 쓸데없는 소리를 꺼내다 혼나기보다는 입닫고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게 한국적인 지혜다. 하지만 헤더윅은 말한다. “저는 욕실 탕 안에서 대단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저 동료들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실험해요. 여기서 확고한 의지가 중요해요. 계속 앞으로 밀고 나가는 긍정적인 자세와 끈질긴 노력이 결국 아이디어로 탄생되죠. 그게 중요해요.” 전시는 디뮤지엄에서 10월 2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