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엄마가 직접 떠준 목도리나 장갑은 공산품보다 훨씬 따듯했던 기억이 난다. 씨실과 날실이 서로 교차되는 촘촘하고 단단한 직조와 달리 손으로 직접 한 뜨개질에는 손의 온기와 그리운 엄마의 포근함까지 담겨 있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뜨개질한 소재가 털실이 아니라 나일론 합성수지라면, 과연 어떤 온도를 느끼게 될까? 문선영 작가는 투명한 낚싯줄로 코바늘뜨기한 패브릭으로 작업한다. 그가 만들어내는 투명한 편물이 가진 역동성과 독특한 온도 이야기를 들어보자.
섬유미술가 문선영, 유기적 구조의 역동성을 표현
섬유미술은 공예와 순수미술 중 어디에 속할까? 실용성에서 출발한 이 분야는 현재 섬유뿐만 아니라 종이, 금속, 돌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며 그 영역을 점차 확장하고 있다. 현재의 섬유미술를 정의하자면, 소재와 그 조직을 중요시하는 시각예술의 한 범주라고 말할 수 있다. 포장 디자인이나 섬유 디자인, 패턴 디자인, 도자 등 표면을 다루는 모든 공예를 통칭하는 ‘텍스타일 디자인’과 다르게 섬유미술은 순수미술과 직조공예의 결합체다. 주로 조각과 회화 형식 안에서 소재에 특히 집중한다.
따라서 문선영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도 바로 소재다. 작가의 작품에는 투명한 낚싯줄이 주로 사용된다. 낚싯줄이 가진 탄성 덕분에 작품은 형태를 갖출 힘이 생겨난다. 이를테면, 코바늘뜨기를 하며 만들어지는 수많은 고리들이 저마다 힘을 지탱하는 연결점이 되고 그 연결점의 수만큼 형태가 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작가가 편직한 낱장의 작품은 설치 방식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진다. 원단을 한 바퀴 느슨하게 꼬아주면 주머니 같은 형태가 되는가하면, 자연스러운 주름으로 꽃이나 파도의 형태를 갖추기도 한다. 작가는 재료가 가진 자유로운 형태적 성질을 적극 활용한다.
여기에 형태를 결정하는 또 한 가지 요소가 있다. 바로 빛이다. 작가가 수작업으로 만든 이 편물 작업들은 기계가 짠 구조보다 조직이 헐겁고 균일하지 않다. 이로 인해 조직의 조밀함보다 푹신하고 유동적인 촉감이 생겨난다. 낚싯줄 고리가 여러 번 겹쳐진 이 구조는 빛을 불규칙하게 난반사하거나 흡수하면서, 시각적으로 더욱 부드럽고 유연한 인상을 남긴다.
작가는 이 때문에 작품의 설치 위치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밝은 곳, 자연광이 있는 곳에서는 소재가 투명하기 때문에 눈에 거의 띄지 않기 때문이다. 창이 없거나 조도가 낮은 곳에서 인공적인 조명을 이용해야 비로소 반짝반짝한 재료의 속성이 빛을 발한다. 이 반짝임과 투명성은 명상적인 성격이 강해,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동시에 작품에 집중할수록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만드는 특징을 지닌다.
생동하는 조각, 기(氣)의 활동
작가의 작품들은 대부분 공중에 매달린 모빌(mobile) 형식을 취한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소재를 사용해 공중에 매닮으로써 작품은 공기 중에서 부유하는 ‘움직이는 조각’이 된다. 실제로 전시장의 미묘한 공기 흐름에 따라 작품이 나풀거리거나 회전하는 등 미묘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럴 때마다 빛을 받는 부위가 변하면서 은근한 움직임은 고요하면서도 묵직한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에너지(energy)를 동양적으로 표현하면 기(氣)라고 하죠. 기가 모여 사람도 되고, 동물도 되거나 사물도 되는 거잖아요. 기가 흩어져 공기 같은 물질이 됐다가, 기가 모여 바다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가… 하는움직임을 표현하고 싶었어요”라며 작품의 움직이는 기운을 설명했다.
이렇게 작가는 움직이는 조각이 주는 고정되지 않고 유연하고 변화 가능한 상태에 집중한다. 이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코를 어디에 두느냐의 선택에 따라 작품의 특성과 형태가 달라져요. 코를 이쪽에 두면 평면이 되지만, 이렇게 바꾸면 구 또는 큐브가 될 때도 있어요.” 그는 코바늘 작업을 하는 내내 즉흥적인 선택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나간다. 오히려 완성된 형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코바늘 작업을 하며 내면을 향하는 순간에 보다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뜨개질이나 바느질은 자기 내면에 집중할 수 있는 행위다. 전적으로 내향적인 순간. 그 순간에 작가는 작품의 형태보다 그 과정을 즐기고 면밀히 바라본다. 자기치유적 특성을 가진 뜨개질을 활용한 작업은 대개 여성스러움과 어머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작업을 단순히 여성스럽고 가녀린 작품으로만 판단하긴 힘들다.
“제 마음대로 안 되는 부분이 매력이죠”
육아와 교육 일을 병행하는 작가는,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 작업실을 얻어야 가능한 작업은 힘들 것임을 직감했다. 그래서 여러 재료와 방법을 실험하다 현재의 낚싯줄과 코바늘에 정착했다. 재료가 가진 투명성과 가벼움,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색이 변치 않는 속성 등이 마음에 들었다고. 그래서인지 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가 작업해온 낚싯줄은, 아이가 어느 정도 큰 지금 그들의 장난감이 됐다고 한다.
작가는 재료인 낚싯줄을 낚시용품 회사에서 주로 구매한다. 작품을 위해선 일반적으로 낚시에 쓰이는 낚싯줄의 양보다 훨씬 많이 주문하게 된다. 그 덕에 낚시용품 회사가 덤으로 낚시줄을 더 챙겨주는기도 하고, 월별로 낚시 정보가 쓰인 달력 같은 사은품을 보내준다고 한다. 직접 회원가입도 권유하면서 한때는 '프로 낚시꾼'으로 오해하기도 했다니, 낚시줄에 줄줄이 엮여져 올라오는 에피소드들이 재미있다.
이런 일화들은 어찌 보면 육아와 작업을 고민하며 병행한 작가에게 내려온 튼튼한 황금 동아줄인지도 모른다. 가볍고 무해해 아이 옆에서 작업하거나, 가방에 넣고 이동하면서도 코바느질로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꽤 오랫동안 다양한 굵기의 낚싯줄을 사용해왔지만, 낚싯줄로 형태를 만들기가 생각보다 어렵다는 얘기도 한다. 코바늘이 고리를 계속 걸어가며 형태를 확장하는 방식이라, 고리를 꼬는 과정에서 낚싯줄의 탄성이 더해지기도 한다. 찌그러지거나 원치 않는 반대 방향으로 휘어버리는 낚싯줄을 보며 마음을 졸이기도 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효과를 반기는 법도 배우게 됐다고. 계획된 형태만 보는 것보다 변형이 무한히 이뤄지면서 다음 작업에 대한 모티프를 얻거나,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는 것에서 작가의 긍정적인 태도가 엿보인다.
섬유를 이용한 작업에선 반복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반복적으로 염색을 하거나(나염), 계속해 코바늘을 뜨고(뜨개질), 바늘을 찌르고(펠트), 천을 계속해 이어붙이고(퀼트), 재봉틀을 돌리는 일(재봉) 모두 반복적 행위로 진행된다. 작가는 섬유의 정체성을 이 반복에서 찾는다. 이어 그는 “요즘 어른들을 위한 색칠공부가 유행하듯 치유의 성격을 지닌 섬유미술이 예술의 감흥과 함께 치유의 효과를 줄 수 있길 바란다”고 유쾌하게 말했다.
한 장의 니트 원단이 꼬여 겹친 모양 10점을 나란히 걸어놓은 '10개의 공기', 하늘이나 바다에서 보이는 파동을 연상시키는 '서틀 노이즈' '웨이브스', 붉은 생명력을 드러내는 '오빗' 등의 작품을 통해 작가가 발견한 세상의 유기적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문선영 작가의 전시는 경기도 용인의 마가갤러리에서 진행 중이다. 선배 섬유미술가 박광빈과 함께 하는 ‘섬유미술 2인展 - 경계를 넘어’는 7월 21일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