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정의 요즘미술 읽기 - 장소특정적 미술] “머물러요. 떠나면 안돼요”라는 작품들
이문정(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오직 단 하나의 장소만을 위해 제작된 미술, 전시된 공간을 떠나면 의미를 잃어버리는 작품을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이처럼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기 위해 제작된 미술을 장소 특정적 미술(Site-specific Art)이라 한다. 사실 장소 특정적 미술은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온 미술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인 영원성을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진정한 가치를 갖는 미술 작품이 되려면 언제,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보편성과 절대성, 불변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실제로 모더니즘 시기까지의 대부분의 미술은 장소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족성을 가졌다. 마티스(Henri Matisse)나 피카소(Pablo Picasso)를 비롯한 아방가르드 거장들의 작품들은 언제, 어디에 설치되든 간에 동일한 의미를 소유해왔다. 무(無)장소성, 무(無)시간성을 갖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더니즘 미술이 가진 보편성과 절대성에 대한 비판적이고 반동적인 태도에서 장소 특정적 미술이 시작되었다. 이제 미술가들은 특별한 장소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작품, 관계 속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갖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할 수 있는 배경에는 모든 기호의 의미는 문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인 태도가 있다. 또한 이전의 칼럼(요즘미술 읽기 2 - 자전적 고백)에서 다루었듯 큰 이야기보다는 작은 이야기, 일반론보다는 한 사람의 특별한 이야기에서 진실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에도 처음부터 특별한 장소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는 미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별한 교회, 건축물, 레스토랑, 무덤 등을 위해 주문되고 제작된 작품들이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 대부분이 주문자의 소유물로서 제작되었던 것과 달리 오늘날의 장소 특정적 미술의 많은 수는 공공성과 대중성, 사회정치적 문맥을 생각하며 제작된다. 대지 미술, 과정 미술, 퍼포먼스(performance), 설치를 비롯한 요즘 미술에서 장소 특수성을 띤 작품들은 쉽게 만나볼 수 있다.
▲박대성, ‘집’, 혼합재료, 2012. 사진제공 = 환기미술관
이제는 익숙해진 크리스토(Christo Javacheff)의 ‘포장된 퐁네프(Le Pont Neuf Wrapped Coast)’(1975~85), ‘둘러싸인 섬(Surrounded Islands, Miami, Florida)’(1980-83)은 가장 유명한 장소 특정적 미술일 것이다. 특별한 장소를 선택하여 작업하는 대표적 미술가로 뱅크시(Banksy)도 빼놓을 수 없다. 익명으로 활동하는 뱅크시는 따뜻한 시선과 신랄한 풍자가 공존하는 벽화와 오브제(object) 설치 등을 통해 사회정치적 현실을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의 분리 장벽에 그려진 풍선더미를 들고 하늘로 날아가는 소녀, 영국 런던의 프랑스 대사관 벽에 그려진 최루가스로 눈물범벅이 된 코제트(Cosette)는 그 장소에 존재할 때만 의미를 갖는 작품들이다. 간혹 그의 작품이 그려진 벽 자체가 뜯겨 판매되는 일이 있는데, 뱅크시가 “내 작품은 그려진 곳에 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발언한 것은 그의 지향점을 함축한다.
“그려진 곳에 있어야 한다”는 뱅크시,
고종의 침소에서 퍼포먼스 펼친 서도호
한편, 하나의 전시 전체가 특별한 장소를 염두에 두고 기획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 예로 2012년 진행된 ‘덕수궁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덕수궁 프로젝트’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 미술가들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유산의 재해석을 시도한 프로젝트였다. 이 전시에서 서도호는 고종의 침소였던 함녕전을 무대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작가적 상상력이 결합되어 재창조된 역사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전달했다.
또한 환기미술관이 기획한 ‘부암동 아트 프로젝트’(2012)는 옛 정취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부암동에 거주하는 예술가들과 주민, 관객들이 함께 한 전시 및 문화 예술 축제로 소통의 미술을 보여주었다. 참여 작가 중 박대성은 ‘경계석’, ‘담’, ‘집’ 제목의 작품들에서 오랜 세월이 묻어나는 부암동 집들의 무너진 담의 일부를 복원했다. 그의 작품들은 작은 부분이 공간을 어떻게 바꾸고 확장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예술의 역할을 생각하게 했다.
▲한성필, ‘성북동 스토리’, single channel video, 1분 42초, 2015. 사진제공 = 성북구립미술관
작년에 열린 ‘한양 도성프로젝트 원’(2015)은 한양도성(漢陽都城)이 지닌 장소성과 시대성, 역사성을 재고하고 오늘의 예술적 언어로 풀어내는 전시였다. 참여 작가들은 14세기 조선 개국과 함께 건립되어 오늘날까지 존재해온 한양도성을 자기들의 언어로 재해석했다. 한성필은 한양도성의 풍경과 성북구립미술관의 건물을 합성한 영상 작품을 통해 시공간을 넘나드는 역동적이고 극적인 경험을 선사했고, 심철웅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되고 변형되었던 특정 장소들의 변모 과정들을 역사적 사료와 이미지, 텍스트 등을 통해 고찰했다.
그런데 ‘한양 도성 프로젝트 원’이 진행된 성북구립미술관은 이미 미술관 자체가 지역적 특수성을 강하게 내포한다. 한국 근현대미술의 시작에서부터 수많은 예술가들이 머무르며 예술 활동을 지속했던 성북동의 지역 정체성을 바탕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미술관의 정체성에 맞게 올봄에는 실제 성북구에서 말년을 보내며 작품 활동을 한 변관식의 전시가 열리기도 했다.
장소 특정적 미술과 전시들이 우리가 향유하는 예술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다양한 미술을 체험하게 함은 분명하다. 도시의 일상뿐 아니라 정치적 분쟁 지역, 자연 등의 새로운 공간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살아 있는 실제 장소에서 대중들과 호흡하는 미술을 만들어낸다. 이제 미술가들은 우리와 한 공간에 머무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삶에 참여한다. 그렇게 관계를 만들어낸다.
(정리 = 최영태 기자)
이문정(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