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천경자 화백.(사진='SBS일요스페셜' 캡처)
지난 11월 3일, JTBC TV는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다중스펙트럼 광학연구소(Lumiere Technology Multispectral Institute)’의 감정팀(이하 ‘프랑스 감정팀’)이 천경자 화백의 작품이라 주장되는 ‘미인도’가 위작임을판정했다는 단독보도를 내보냈다. 감정팀은 자체 개발한 특수카메라(3D 멀티 스펙트럼 카메라)로 미인도와 천 화백의 진작(眞作)들을 촬영한 뒤, 그림 속 인물의 눈과 눈동자, 코, 입 등의 부분으로 나눈 9개 세부항목들을 1600여 개 단층으로 쪼갰다. 그 쪼갠 것을 수치로 바꿔 비교했더니 문제의 '미인도'의 모든 항목들이 진작들과 수치가 다르게 나왔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의 그림 표면 밑에 존재하는 세 개의 다른 초상화를 밝혀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감정팀은 “미인도는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아니며 고의적으로 만든 가짜”라는 결론을 냈다. 혼란스러운 시국에 나온 미술 뉴스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식에는 많은 관심과 온라인상의 댓글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라도 천 화백이 한을 풀고 영면에 들 수 있게 되어 다행” “한 작품의 위작 판결이 외국의 감정단까지 동원해 결론이 났다” 등 그 초점이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여론은 프랑스 감정팀의 결과를 신뢰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음날인 4일 '미인도'를 천 화백의 진작이라 주장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하 국현)의 반박 보도 자료가 각 언론사에 배포됐다. “프랑스 감정단이 도출한 감정 결과는 종합적인 검증 등을 통한 결론이 아니라 부분적 내용을 침소봉대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심히 유감을 표명한다”는 국현의 입장은 다시 공방을 과열시키는 모양새를 만들었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연구소의 장 페니코트가 '미인도'가 위작이라는 판정 후, 천 화백의 기술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 인터뷰를 했다. (사진= 'JTBC 뉴스룸' 캡처)
2016년 본격적인 논란의 시작
잠시 현재까지의 사건 정리를 하자면, 1991년 불거진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절필 선언을 하고 미국으로 잠적한천경자 화백이 지난해 타계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이후, 천 화백의 차녀 김정희 미국 몽고메리대 교수는 어머니의 명예 회복을 위해 올해 4월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전-현직 관계자 6명을 미인도 관련 사자명예훼손, 허위공문서작성, 저작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위작 논란 이후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던 '미인도'는 올해 6월 수사를 위해 25년 만에 밖으로 나와 국현의 수장고에서 검찰로 이송됐다. 수사가 시작됐지만 7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DNA 분석에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검찰과 유족의 요청으로 프랑스 감정단이 미인도의 감정을 맡게 됐다. 현재 미인도는 프랑스 감정단이 제출한 자료와 함께 검찰의 최종 결론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이번 JTBC의 보도가 나가자마자 즉각적으로 반박 보도 자료를 내놓은 국현의 이례적인 반응에 대해 미술 관계자들은 "성급한 대처였다"거나, 혹은 "그렇게 급하게 반박 자료를 낼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직 검찰의 최종 결론이 난 상황이 아닌 데다가, 반박 보도문 역시 직관적 정의에 의한 반박 혹은 감정적인 대응으로까지 비춰지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미인도' 위작 시비 관련 고소인인 천경자 화백의 차녀 김정희 교수(오른쪽)와 사위 문범강 화백.(사진='SBS일요스페셜' 캡처)
과학 vs 안목
국현 측은 보도자료 ‘프랑스 감정결과 보도에 대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입장’에 연이어 배포한 추가 보도문 ‘프랑스 감정단의 미인도 감정 결과에 대한 모순, 신빙성 부재 분석(요약)’의 첫머리에서 “프랑스 감정단이 애초에 이미지와 붓질, 작업 방식 등의 패턴을 종합적으로 규명한다고 했으나, 공언한 바와는 반대로 극히 일부 자료에 대한 통계적, 인상적 분석 결과만 내놨다”고 주장했다. “미술사적 분석, 재료 분석, 소장 경위, 전문가 의견 등을 배제하고 화면의 표층적 묘사 패턴에 대한 분석 결과만으로 위작 결론을 도출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덧붙여, 국현의 박미화 학예연구관은 “어떤 항목에는 여덟 점만 비교대상 분석으로 삼았고, 또 다른 항목에서는 아홉 점을 비교대상으로 삼는 등 비교대상 항목이 일정치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유족 측 대변인인 배금자 변호사는 “이런 논지는 과학적 분석을 무시하는 주장”이라며, “전문가의 의견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아직도 안목 감정에 의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안목 감정을 하는 전문가 집단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국현의 박 학예사에게 ‘현재 검찰 수사에 참여하는 전문가 집단은 검찰이 100% 선정했는지?’를 묻자 그는 “물론 검찰이 다 선정했고, 우리는 그 전문가들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한다”며, 기자에게 그 전문가들을 아는지 되묻기도 했다. 유족과 국현이 전문가 선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비전문가인 검찰에서 어떤 기준으로 전문가를 선정했는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지점이다.
배 변호사는 “이 사람들(프랑스 감정팀) 역시 자신들의 국제적, 학술적 명예를 걸고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국현 측이 논리적이지 못한 근거로 이 연구 보고서를 폄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의 '미인도'(오른쪽) 제작 시 참고 자료가 됐을것이라 추측되는 천 화백의 세 작품들을 보여주는 화면. (사진='SBS일요스페셜' 캡처)
‘장미와 여인’과 ‘차녀를 모델로 한 스케치’
이번 공방전에서 천 화백의 다른 작품 ‘장미와 여인’과 ‘차녀를 모델로 한 스케치’는 또 다른 쟁점이 되고 있다. 국현 측은 반박문에서 “(프랑스 감정팀은) 1979년 이전에 제작돼 1980년 4월에 국현으로 이관된 문제의 '미인도'가 1981년 작품인 ‘장미와 여인’을 보고 만든 위작이라는 성립 불가능한 모순된 결론을 내리면서도 이에 대한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배 변호사는 “단지 '미인도'에 표기된 1977이라는 숫자와 ‘장미와 여인’의 제작년도인 1981년을 비교해 모순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1977이라는 숫자가 1977년에 그 그림이 제작됐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위작자가 얼마든지 실제와 다르게 표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응했다.
또한, 국현은 “미인도 진위의 결정적 증거자료인 1976년 작품 ‘차녀를 모델로 한 스케치’를 비교대상 작품으로 넣지 않았다는 것과 함께, 감정단의 눈, 코, 입에 대한 도상의 묘사패턴 분석은 의미가 없다”며 “미인도가 도안화된 인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1976년 차녀를 직접 보고 그린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차녀를 모델로 한 스케치’는 이미 이 작품의 모델이자 고소인인 차녀 김정희 씨가 '장미와 여인'의 습작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 5월 천 화백의 장녀가 부경대에 천 화백의 작품을 기증하는 과정에서 다시 등장한 이 작품에 대해 모 언론사가 ‘미인도 습작의 발견’이라는 보도를 냈고, 김 교수는 이에 대해 반박문을 내기도 했다.
그는 “이 스케치의 사진은 이미 2월 SBS 스페셜 ‘소문과 거짓말 - 미인도 스캔들’을 통해 방송된 적이 있고, ‘천경자 평전’을 집필하고 있는 평론가 최광진 씨 등이 이미 그 사진까지 자료로 가지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정희 교수는 지난 2월 방영된 'SBS 일요스페셜'에서 천 화백의 1976년 작 '차녀를 위한 스케치'가 1981년 작 '장미의 여인'과 1979년에 그려진 작은 소녀 그림의 모티브가 됐다고 증언한 바 있다. (사진='SBS일요스페셜' 캡처)
국현은 프랑스 감정팀의 조사 결과를 어떻게 알았지?
국현의 반박문은 이밖에도 “'장미와 여인'이 수복처리 과정에서 많은 가필이 이뤄졌지만 많은 수정 및 덧칠, 그리고 작업의 과정에서 압인선(눌러서 긋는 방식)을 사용해 형태를 완성해가는 독특한 기법에 대한 파악이 없다”, “미인도와 다른 천경자 작품과의 차이점만 기술되고, 공통점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위작 결론을 전제로 한 감정과 분석이었다”, “광도와 휘도의 분석에서 재료에 대한 변수를 고려하지 않았고, 그 외 많은 변수를 고려하지 않았기에 결정적인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는 등 프랑스 감정팀의 조사 결과에 대해 방법론적 비판을 했다.
유족 측은 이런 국현 측의 비판이 논리적이고 타당한지의 여부를 떠나, 피고소인인 국현 측이 어떻게 유족 측이 감정을 의뢰한 프랑스 감정팀의 최종감정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는지의 경위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유족 측 배금자 변호사는 11월 1일 검찰 측에 최종 결과 보고서를 제출했고, 4일 국현이 낸 반박 보도문은 “조사 결과를 보면” “~에 대한 파악이 없다” “~만 기술되었다” 등 결과 보고서 전체를 보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표현들이 가득하다고 말했다.
배 변호사는 “이는 검찰이 조사 결과 자료를 받자마자 국현에 제공하지 않고서는 시간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고소인이 감정 비용을 전액부담한 보고서를 검찰이 수사 중인 상황에 피고소인에 제공한 것은 결코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며, 검찰의 태도에 의혹을 제기했다.
국현의 박 학예사는 이에 대해 “검찰 측에서 결과 보고서에 대한 의견을 물어와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정보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배 변호사는 “프랑스 감정팀은 이번 국현의 반박문에 대해 매우 황당해 했으며, 그에 대한 재 반박문을 이미 검찰에 제출한 상태”라고 밝혔다. 또한, “법적인 절차를 따르기 위해 자세한 조사 결과를 현재 모두 공개할 수는 없지만,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가 나오면 그 이후 프랑스 감정팀이 직접 내한해 과정과 결과를 투명하게 밝힐 예정”이라고 전했다.
덧붙여, “감정팀은 이번 스캔들에 대한 과학적 데이터를, 유명 과학 저널 등에 게재할 예정”이라며, “검찰이 안목 감정에 기댄 결과를 발표한다면 세계적인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김연수 breezeme@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