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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조형물 - ①] 훼손된 박정희, 감춰진 반기문 동상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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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18호 김연수⁄ 2017.01.13 16:40:57

▲2013년 우크라이나의 흐멜니츠키 공원에 세워진 레닌의 동상이 철거되고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이제는 높은 빌딩이 있는 도시라면 거리의 어디에서나 거대한 조형물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조형물들이 더 흔해지기 이전부터 학교, 공원 등의 공공장소에선 인물상, 즉 동상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발에 채일 정도로 흔하거나 어떤 미적인 호기심도 자극 시키지 못해 존재감이 미비하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미술의 한 분야로서의 ‘조각’에 관한  일반적인 이해도 그런 조형물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요즘만큼 그런 조형물들에 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을 때가 있었을까. 조각이 주목 받는 시대,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훼손된 문래근린공원의 박정희 흉상. (사진=최황)


이슈1. 박정희 흉상 훼손

작년 12월 5일 영등포구 문래근린 공원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흉상은 한 30대 남성에 의해 훼손됐다. 박 전 대통령의 얼굴은 붉은색 락카 스프레이로 칠해져 있었고, 흉상을 받치고 있는 ‘5.16혁명 발상지’라는 한자가 새겨진 돌 좌대에는 ‘철거하라’는 글씨가 역시 붉은색 락카 스프레이로 쓰여 있었다. 

박 전 대통령의 흉상을 훼손한 사람은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인 최황이었다. 최황은 같은 날 자신의 SNS 계정을 통해 ‘박정희 흉상 철거 선언문’을 게재하며, 자신이 한 일임을 스스로 밝혔다. 그는 “이미 1996년 김영삼 정부 시절 5.16 군사혁명이 아니라 5.16 군사 정변으로 바뀌며 그것이 군인들에 의한 쿠데타였음을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5.16 혁명의 발상지‘라는 잘못된 상징이 어떤 기관으로부터도 관리되지 않고 보존되어 온 것은 우리가 노력해 온 제대로 된 역사의식의 함양이라는 가치와 대치된다”며,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장장 32년간 이어진 군사정권을 탄생시킨 장본인을 기념한다는 것은 한국 사회가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하는 일”이라며, 훼손 이유를 밝혔다. 

문래근린공원은 1960년대 6관구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사령부 사령관이던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령부의 의뢰로 1996년 흉상이 제작됐다. 1986년 그 자리에 공원이 들어섰고, 철거하라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2000년에는 시민단체 회원들이 흉상을 철거해 홍대 출신인 제작자에게 돌려주는 의미로 홍대로 옮겼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최황은 CNB와의 인터뷰를 통해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밝혀진 번복될 수 없는 사실-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더불어 그것은 정말 “정치적인 행위였다”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달리즘’적으로 보이는 행위에 대해, “내가 뱅크시처럼 빠른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고유의 방법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당시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방법은 용역 깡패들이 철거민들에게 하는 행위를 미러링 하는 것이었다”라고 밝혔다. 경제개발 우선주의의 논리가 강요되는 방법 중 대표적인 상징을 차용했다는 것.

*반달리즘: 455년 유럽의 민족 대이동 때 지중해 연안부터 로마까지 광포한 약탈과 파괴 행위를 한 반달족으로부터 유래된 말로서, 유산이나 예술품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행위.

그는 “우리사회를 정체시키는 고정된 관념들에 대해 금이라도 가게 할 수 있는 시도를 한 것”이라며, “사회 문제를 조금 더 즉각적으로 반영하고, 그에 관한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예술 방법을 찾고 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정제된 방법으로 제시할 예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사건 직후, 최황은 특수손괴 혐의로 경찰에 붙잡혀 조사를 받기도 하고, 촛불집회에 참여했다가 보수 성향 단체에 둘러싸여, 태극기로 얻어맞는 일까지 당했다. 

한편, 그가 한 일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리가 유력시된다고 법조인들은 전한다. 흉상이 어느 누구에도 소유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등포구청 관할 지역에 존재하긴 하지만, 영등포구청의 소유는 아니며, 그것을 관리하고 있는 ‘박정희대통령정신문화선양회’는 법인으로 공식 등록돼 있지 않은 임의 단체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부산에 설치된 55번째 '평화의 소녀상'. (사진=연합뉴스)


이슈2. 소녀상 철거 갈등

부산의 일본 영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 설치로 한-일 외교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2015년 12월 28일 발표된 한-일 ‘위안부 합의’에 항의하는 의미로 전국의 55번째 평화의 소녀상이 작년 12월 28일 시민단체 ‘미래세대가 세우는 평화의 소녀상 추진위원회’에 의해 기습적으로 세워지며, 이를 둘러싸고 위안부 합의 문제가 다시 불거졌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일본 정부와 만든 합의한 것으로 알려진 내용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아베 총리가 사과하며, 10억 엔(약 102억 원)을 위로금 명목으로 내놓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을 외면한 협상이었다는 여론이 형성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부산 동구청은 소녀상이 설치되자마자, 주최 측과 실랑이를 벌이고 설치 3시간 46분 만에 완전 철거시켰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12개 중대 경찰 1960명을 동원해 13명의 대학생과 시민을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연행했다. 일본총영사관이 동구청에 소녀상 설치를 막아달라는 외교서한을 보낸 것이 뒤늦게 드러났다. 

시민들의 거센 비난 여론이 일자, 동구청 측은 소녀상을 압수한 지 이틀만인 12월 30일 소녀상을 시민단체에 반환했다. 그러나 일본 아베 총리는 8일 NHK 방송에 출연해 “일본은 이미 10억 엔을 출자했다. 한국 측이 확실한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서울 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라며, 합의되지도 않은 소녀상 철거를 주장했다. 이 갈등은 결국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대사와 모리모토 부산총영사가 9일 항의의 표시로 일본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이르렀다. 일본의 이 같은 행태는 최근 한국의 국정 혼란기 공백을 틈 타 탄핵 정국 이후 외교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시도로 해석되고 있다. 

한편, ‘평화의 소녀상’은 201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 1000회(20년)를 맞아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죄와 법적 배상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김서경운성(부부인 김서경‧김운성 두 작가의 협업을 지칭하는 이름)’작가가 제작·설치하기 시작했다. 작가들에 따르면 소녀상은 할머니들이 일본에 의해 끌려갔을 당시인 13~15세 정도의 한복을 입은 소녀의 모습을 형상화 한 것으로 원망과 한이 서린 시간을 그렸다. 

그들은 소녀상 이에 앞서 동학농민운동 100주년, 광주 5.18민주화운동, 제주 4.3사건, 전태일 열사 등 사회 문제와 관련된 조각 작품을 함께 만들어오기도 했다. 작가 부부는 CNB와의 인터뷰에서 “(최근의 미술엔)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한 미술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요구가 미술이 가져야 하는 사회와의 연관성을 불필요하게 만든다”며, “예술은 이상적인 정보의 생산자 역할을 해왔었지만, 현재는 소비재로 변모한 듯하다. 그런 현실에서 ‘나라도 나-우리(우리가 속한 사회)에 충실해야지’라는 다짐을 했다”고 전한 바 있다.

▲작은 크기의 소녀상. (사진=윤하나 기자)


이슈3. 반기문 동상 우상화 논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동상에 관한 논란은 작년 8월 워싱턴 포스트의 도쿄 지국장인 애나 파이필드의 르포 기사로부터 촉발됐다. 반 전 총장이 취임한 2007년 이후 충북 음성군은 반기문 전 총장의 고향인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 일대에 세금 수십억 원을 들여 반 총장의 생가를 복원하고 공원 등을 조성했다. 그 과정에서 생가 앞 등 여러 곳에 동상 또한 세워졌다. 

파이필드는 그런 ‘반기문 생가’ 일대를 둘러본 뒤, “맞다, 이곳은 분명히 남한이다. 당신이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찬미하는 박물관이나 기념비를 돌아본 뒤 이곳을 찾았다면, 혹시 내가 비무장지대에서 길을 잘못 들어 북한으로 되돌아 간 게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른다"며 꼬집었다.  

이후, “살아있는 사람의 동상을 세운 경우는 독재자 말고는 없었다”는 등의 지나친 우상화에 대한 격한 비판에 직면한 음성군은 몇 개의 동상을 철거해 숨겨뒀다. 33억 원을 들여 역대 유엔 사무총장 8명의 흉상과 유엔을 상징하는 3m 높이의 지구 조형물 등을 설치한 ‘반기문 기념광장’에는 그의 흉상이 안경이 떨어진 채 남아있다.

유엔 사무총장 퇴임 후 대권출마를 선언하고 12일 귀국한 반 전 총장의 고향은 이런 비판 여론들을 의식해 현수막도 자제하는 등 극히 조심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35년 조각가 김복진이 제작한 최송설당 동상.(사진= 위키미디어)


우리나라 동상은 언제부터?

미술사학자 조은정의 저서 ‘동상’에 의하면, 국내에 동상이 건립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동상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미술이었다. 세계적으로는 19세기에 이르러 동상의 개체수가 엄청난 양으로 늘어났다. 미국은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의 영웅들을 기리며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시점이었고, 유럽은 민족적 우월감과 함께 영토를 넓히는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념비적 성격의 동상을 세우고 숭배하는 문화는 일본을 통해 조선으로 이식됐다.

지성과 이성이 강조되는 근대의 이념은 코트를 입고, 바르게 서서 한 쪽 손을 약간 든 자세의 남성의 모습으로 형상화-전형화 되었다. 이런 형상의 경직성과 무게감은 영웅적 인물의 강한 정신성과 실천력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국내에 건립된 동상의 수는 1930년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인물의 업적을 기념하는 행위가 예전의 기념비에서 신식 동상으로 바뀌었다. 육영사업 즉, 학교를 건립하거나 건립에 돈을 많이 낸 사람의 동상들이 세워지는 시기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거리 이름을 명사의 이름을 따 짓는 심리나 인물상을 세우는 심리는 같은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기억하게 만드는 일종의 역사 교육 역할을 거리 이름 또는 동상에 맡긴 것이었다. 

조은정은 "철저히 발주자의 의도와 취향에 맞춰야 하는 미술인 동상이 사회에서 유통되며 근대에 생산된 관념적 이미지에 지배받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한 인물에 대해 지극히 미술 내부의 문제일 수 있는 부분에까지 공동체의 이념이 작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조형적 언어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무형의 이념이나 역사적 사건을 가시화한 동상만큼 시대성을 표출하고, 권력적 속성을 띤 미술이 없다며 동상의 사회적 기능을 전제한다.

동상을 바라보는 시선

근대로부터 시작된 교육-이념이 가미된 사회적 동상의 기능에 대해 국민대 입체미술과 김태곤 교수는 동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의 시선을 제시한다. 하나는 그야말로 인물의 업적이나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한 기념비의 기능으로 바라보는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 혹은 선전 등의 기능이 더 앞서는 것이다. 그것은 사상에 기반을 둔 대중의 사회적 태도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김 교수는 “그런 의도가 담긴 미술들이 한때는 ‘프로파간다’나 ‘선전 미술’ 등의 용어로서 정의되는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동상의 인물이 전달하는 메시지들이 과거의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야 하는 현재 상황에선 또 다른 용어로써 정의되어야 할 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면서 기념비적 성격의 동상의 예로 로댕의 ‘칼레의 시민’을 들었다. 또한, 전국 곳곳에 세워진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의 경우는 오히려 박정희 대통령 사후에 생긴 동상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강하다고 그는 소개했다. 또한 김 교수는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평화의 소녀상’이나 반 전 총장의 동상이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동상의 기능이 과거보다 한 사람의 업적이나 생을 기리는 기능에서 메시지 전달의 도구로 기능이 강화되는 흐름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14세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싸운 백년전쟁 때 프랑스 칼레 시를 구한 영웅적 시민 6명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사진=위키미디어)


동상과 예술가

동상이 이념-사상이 전제된 특별한 목적성이 있는 미술일 때, 또 한 가지 논란거리는 존폐 문제다. 앞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에 대한 훼손, 소녀상 철거 논란, 그리고 반기문 동상의 일부 철거 등 사건은 모두 동상 자체의 예술성 이전에 그것이 품고 있는 이념과 다른 외부의 시선이 충돌하며 일어난 사건들이다. 2013년 우크라이나에서 분리 독립을 거부하는 친정부 시위대에 의해 구소련 통치의 상징인 레닌 동상이 철거된 사건, 4.19 혁명 당시 파고다 공원에 세워졌던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시위대에 끌려 다녔던 일 또한 이념 갈등의 결과였다. 하지만, 그것이 좋게 평가된 이념이든 아니든 간에 예술 입장에서는 예술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예전 경복궁 앞에 세워져 있던 총독부 건물의 해체 문제를 비롯해, 문래공원의 박정희 전 대통령 흉상에 대해 철거를 요구하는 민원과 교육적으로 존속시켜야 한다는 민원이 팽팽하다는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과거 이념의 물리적 상징의 존폐 여부는 오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다만, 김 교수는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이 예술가와 운명을 같이 하지만 특히, 동상 작업에선 그것의 역사적 평가와 예술가의 평가가 같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며, “그렇기에 작가의 역사 인식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밝혔다. 

조은정 미술사학자는 그의 저서 서두를 ‘월간 말’에서 발췌한 소설가이자 사학자인 성낙주의 글로 시작한다. 이번 연재는 그 발췌 글로 마무리한다. 

독재자는 늘 동상을 꿈꾼다. 전국 어디에나 자기 동상을 세우는 꿈 말이다. 하지만 저 혹독했던 1970년대에 ’당신들의 천국‘에서 이청준이 명료하게 은유해 놓았듯이, 동상은 영원으로의 상승이기 이전에 정신의 물질화가 아닌가. 동상이 발언하는 시대는 그 자체로 억압적이라는 정의가 그래서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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