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호국지장사 경내를 나서서 우측 언덕길로 잠시 오르면 철 펜스 안쪽에 바위들이 나타난다. 그 바위 가운데에서 크기 10여cm쯤의 사각형 홈을 찾을 수 있다. 무심히 보면 그냥 바위를 파낸 홈일 뿐이다. 그러나 그 홈은 마애사리공(磨崖舍利孔)이다. 흔히 마애부도(浮圖, 浮屠)라고 하는데 사리를 넣는 구멍인 것이다. 요즈음 말로 하면 유골함인 셈인데 조선 중기 이후가 되면 절은 매우 가난해지고 신역도 고되어졌다. 시주(施主)가 줄어드니 절 살림 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기껏해야 정성을 비는 할머니들이 주신도가 되었으며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절은 궁궐의 궁녀, 벼슬아치 집안의 아녀자들이 신도가 되어 시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모시던 스승이 입적을 해도 변변한 부도 하나 쓰기가 어려운 형편이 되어 갔다. 지난 졸고에서 언급했듯이 겸재의 공암층탑에서 보이는 부도와 같은 부도는 경제 사정 탓에 세우기 어렵게 되어 간 것이다, 어느 날 스승이 입적을 하면 할 수 있는 방안이 절 주위 우뚝 선 바위에 구멍을 뚫고 그 곳에다가 다비(화장)한 후 수습한 사리를 봉안하는 게 고작이었다.
서울 경기 일원에는 이런 마애사리공이 수십 기 발견된다. 온전히 남아 있는 마애사리공은 없고 거의가 구멍을 막았던 덮개가 벗겨져 그 안에 있던 사리함도, 사리도 흔적이 없다. 모르긴 몰라도 사리를 담았을 함이나 혹시라도 함께 넣었을 부장물들이 탐나 누군가의 손에 의해 파손되었으리라. 나무관세음보살!
이제 창빈 안씨(昌嬪 安氏) 묘역을 찾아간다. 드라마나 소설의 주인공이 되어 보지 못한 분이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분이다.
원래 이곳 현충원 일원은 창빈 안씨의 묘역으로 전주 이씨 소유의 땅이었다 한다. 한국전쟁에 많은 국군장병이 목숨을 잃자 이들을 뫼실 묘역이 필요했다. 여러 곳을 검토한 후 이 지역으로 낙점했는데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으로 이곳에 국군묘지를 설치할 수 있었다 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은 원래 창빈 안씨 묘역
그런데 창빈 묘역으로 들어온 국군묘지는 이제는 주인과 객이 완전히 전도되었다. 현충원에 와서도 창빈이 누구인지, 그런 분 묘가 있는지, 알고 왔다 해도 그 분묘가 어디 있는지 좀처럼 알기 어렵다. 창빈은 누구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창빈 안씨(1499~1549년)는 선조(宣祖)의 할머니다. 금천에서 태어나 10살도 안 된 나이에 1507년(중종 2)에 궁인으로 들어가 자순대비(중종의 계비인 정현왕후)를 모시게 되었다 한다.
미모는 수수했는데 행동이 정숙하고 온전하여 자순대비 윤 씨의 눈에 들었고 대비의 보살핌으로 스무 살에 중종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다 한다. 그 뒤 상궁, 숙원(淑媛), 숙용(淑容)까지 그 지위가 올랐다. 1544년 중종이 57세로 승하하자, 3년 복제를 마치고 전례에 따라 인수궁(仁壽宮)에 물러나 거처하기를 청했으나 품행이 단정한 데다 문정왕후와도 사이가 좋아 궐에서 머물게 되었다 한다. 우연히 1549년(명종 4) 친정집에 갔다가 갑자기 51세로 사망하여 양주 장흥리(長興里)에 묻혔다.
중중과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며, 영양군, 정신옹주, 그리고 선조대왕의 아버지가 되는 덕흥군을 낳았다. 둘째 아들은 일찍 죽었다.
안 씨가 죽은 후에도 문정왕후는 그녀의 자식들을 돌보아 주었고 후사 없이 명종이 졸하자 문종의 비는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등극시켰다. 이 사람이 선조다. 선조 이후의 모든 조선 국왕은 창빈 안씨의 DNA를 물려받았으니 창빈 안씨는 사후에 큰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선조는 재위 10년째인 1577년 할머니 소용 안씨를 창빈으로 추봉하였다.
한편 아들 덕흥군은 풍수가들의 말을 따라 어머니 안 씨의 묘를 장흥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장을 하였던 것인데, 묘 자리 덕이었는지 왕위를 이을 위치에 있지도 않은 아들 하성군(선조)이 등극하였기에 풍수하는 이들은 묘 자리 덕이라고 한 마디씩 하고 있다.
창빈의 묘 자리는 겸재의 ‘동작진’ 그림에 표시해 보았듯이 관악산에서부터 높고 낮은 산줄기가 흘러와 서달산에서 한 번 솟아오른 후 그 줄기(來龍)가 창빈 묘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 또 서달산은 좌우로 팔을 벌려 국립현충원 묘역을 감싸고 있는데 이른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가 분명하고 앞으로는 한강의 흐른다. 눈앞에 보이는 나지막한 산인 안산(案山)은 달리 없다. 대부분 풍수사들은 명당(明堂)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좌청룡, 우백호가 팔을 오므리지 못했고 앞에 안산(案山)도 없으니 명당이 못된다고도 한다.
자손대대로 왕 됐다지만 국민에 좋은 왕이었나
풍수를 모르는 필자의 생각으로는 창빈 입장에서 볼 때는 자손이 대대로 조선의 왕이 되었으니 길지(吉地)가 맞을 것 같고, 일반 민초의 입장에서 보면 백성들 배 주리지 않고 삶이 곤곤하지 않게 해주는 임금이 많이 나왔어야 하는데 별로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명당은 못되는 것 같다.
장군, 유공자 묘역 아래에 있는 창빈 묘를 찾아간다. 창빈과 그 자손들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운 것이, 본인의 묘역을 내 주었더니 내룡(來龍)이 흘러내려 오는 산줄기에 장군 묘역, 유공자 묘역이 자리 잡았고 어느 대통령 묘도 그 맥(脈)을 범하였으니 내 집을 빼앗긴 기분이 들 것도 같다.
묘는 단아하다. 아래 길 옆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석이 없어서 1683년(숙종 9) 이조판서 신정이 신도비문을 짓고, 판돈녕부사 이정영이 해서로 쓴 뒤, 비석의 머리글자 전자(篆字)는 오위도총부 도총관 이항이 써서 묘소 근처에 세웠다. 신도비는 1982년 묘소와 함께 서울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과천읍지에는 창빈 묘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창빈 묘는) 군 북 25리 동작리에 있는데 중종대왕 빈 안씨 묘이다. 신도비가 있다(在郡北二十五里銅雀里 中宗大王嬪安氏 有神道碑).”
실록 기사를 보면 영조와 정조가 할머니 창빈 묘 관리와 제사에 신경 쓴 모습이 보인다. 일례를 하나 보자. 아버지 묘인 현륭원 원행길에 다녀온 정조는 배다리(舟橋)에서 창빈 묘역을 보고는 묘에 제사드리도록 조처를 취한다. 정조 23년(1799) 8월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전교하기를 ‘오늘 새벽 주교(舟矯)를 건너올 때 송추(松楸)가 눈 안에 들어왔다. 몇 해 전에 묘소에 제사를 지내드린 적이 있는데 금년은 그분의 환갑이 다시 돌아온 해이므로 강타(江沱)와 규목(樛木)의 칭송이 생각난다. 자손에게 복록을 길이 누리게 하였고 나라에 끼치신 공이 크니, 내가 어찌 감히 목묘(穆廟)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아 그 공을 기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승지를 보내 이 제문을 가지고 가서 창빈 묘에 제사를 지내드릴 것이며, 대원군(大院君: 선조의 부친)의 봉사손이나 직계손 중에서 이름을 알아본 뒤에 현재의 목릉 참봉은 임시로 군직에 붙여두고 그 후임으로 오늘 인사행정에 의망하여 그로 하여금 내일 제례에 참가하고 그대로 재소(齋所)로 들어가 숙직하게 하라’.
敎曰: “曉過舟橋, 松楸入眺. 年前雖致告侑, 而今年卽周甲, 又重回之歲也, 追念(江沱) (樛木)之頌. 福履永綬, 功大邦家, 予小子敢不以穆廟之心爲心, 以敉寧前烈乎? 遣承宣, 奉此祭文, 行祭于昌嬪墓所, 而大院君奉祀直泒中問名, 穆陵參奉權付軍職, 其代今日政擬入, 使之明日往參祭禮後, 仍爲入直齋所.
동작 지역에 있던 8개 정자 살펴보니
이제 대통령 묘역, 유공자 묘역을 지나 정문을 향하여 내려온다. 조그만 묘비 하나로 자신들이 나라를 위해 산 모든 것을 보여주는 사병 묘역을 지난다. 월남전에서 우뚝 모범을 보였다는 삼성(三星)의 채명신 장군 묘도 이 가운데 자리 잡았다. 죽어서도 사병과 함께 하겠다는 고인의 뜻이 있었다 한다.
한편 겸재의 동작진도를 보면 이들 묘역이 자리 잡은 곳에 기와집 여러 채가 보인다. 둘레에는 축축 늘어진 버드나무들이 울타리처럼 자리 잡았다. 도대체 과천 읍내도 아닌 호현(狐峴, 여시고개, 남태령) 넘어 강가 동작진에 무슨 집들일까?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과천군읍지에 실려 있다. 누정(樓亭) 조에 따르면 그곳에는 많은 정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망신루(望辰樓), 망북루(望北樓), 망원정(望遠亭), 창회정(蒼檜亭), 명월정(明月정), 월파정(月波亭), 추원정(追遠亭), 효사정(孝思亭) 등. 겸재의 그림에서 정자들을 이름별로 구분할 수 없는 아쉬움은 남지만 동작, 흑석에 있었던 정자들을 살펴보려 한다.
1. 망신루는 판서 윤계의 강변 정자라 한다(判書尹堦江榭). 아마도 북극성(北辰)을 바라보는 강가 정자 같다. 두보의 ‘높은 누대에서 북극성을 바라보네(危樓望北辰)’라는 시구(詩句)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2. 망북루(望北樓)는 장악원 첨정(僉正) 박세교(朴世橋)의 강변 정자(江榭)다. 여기에서 북(北)은 그냥 북쪽이 아니라 임금이 계신 한양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3. 망원정(望遠亭)은 망원동에 있는 그 정자가 아니라 동작강가(銅雀江頭)에 있었던 정자라는데 경평군(慶平君)의 정자라 한다. 경평군은 광해군 시대의 이륵(李玏)과 철종 시대의 이호가 있었다. 아마도 이 정자의 주인은 이륵일 것 같다. 그는 왕족으로서 심한 갑질을 했던 사람이다.
4. 창회루(蒼檜樓)는 동작진 강가에 있던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정자다. 매산집(제2권)에는 ‘동강의 배 안에서 쌍회정을 바라보다(桐江舟中望雙檜亭)’라는 시에서 창회정을 말하고 있다. 은일할 만한 장소였던 것 같다. 지금 전철이 다니고 올림픽대로로 차가 쌩쌩 달리는 모습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던 곳이었던 모양이다.
한강물 도도히 흐르고 또 흐르는데 江漢滔滔流復流
동작 나루 서쪽 강가 외로운 배에 오른다 桐津西畔上孤舟
구름은 푸른 벽에 갇혀 비 더욱 머물고 雲籠翠壁深留雨
햇볕은 단풍을 비추니 가을이 깊어가네 日照丹楓爛欲秋
물고기와 용은 출몰을 다투지 않고 不與魚龍爭出沒
저 물오리와 해오라기가 제 알아 부침하네 任他鳧鷺自沉浮
어느 날 나 참된 은일 한다면 異時容我成眞隱
창회정 백척루에서지. 蒼檜亭頭百尺樓
창회정(蒼檜亭)은 이귀 이전부터 동작강가에 있었던 것 같다. 여기서는 銅을 桐으로 쓰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는데 특별히 의미를 구분하지 않을 때는 때때로 그러한 예가 있는 것으로 볼 때 같은 음을 살려 쓴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초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이곳에서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과 대사를 논의하였다고도 한다.
또 이곳 창회정 지역에서 바라보는 경관의 아름다움을 조선 후기 문신 남용익(南龍翼)은 호곡집(壺谷集)에 창회정팔경(蒼檜亭八景) 8편의 오언절구(五言絶句)로 남기고 있다. 제목만이라도 살펴본다.
* 一帶淸江 한 구비 푸른 강
* 十里明沙 십리 밝은 모래 (아마도 十里鳴沙는 아니었는지?)
* 三角朝雲 삼각산 아침 구름
* 終南夕烽 남산의 저녁봉화
* 華藏曉鍾 화장사 저녁 종소리
* 龍山夜燈 용산의 밤 등불
* 棋島芳草 기도의 방초
* 漢江歸帆 한강 돌아오는 돛배
5. 명월정(明月亭)은 판서 정두경(鄭斗卿)의 정자로 과천군 읍지에 북쪽 20리 되는 이 지역에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6. 월파정(月波亭)도 동작 강가에 있던 판서 장선징(張善澂)의 정자였다.
다산시문집에는 이 정자 앞 강에서 친구들과 뱃놀이 하던 다산의 칠언절구 4수가 전해진다. 줄여서 두 수 읽고 가자. 제목은 ‘여러 벗과 함께 배를 타고 월파정에 이르러 달밤 뱃놀이 하다(同諸友乘舟至月波亭汎月)’.
월파정 이 아래에 조각배를 갖다 대니 月波亭下扁舟泊
마을 터에 연기 일고 해는 금방 넘어갔네 墟里煙生日初落
누각 올라 술 마시고 내려와서 노래하며 登樓飮酒下樓歌
조수 머리 큰 고기 뛰는 것도 구경하네 時見潮頭大魚躍
부평초에 바람 일어 잔잔한 물결 일으켜 白蘋風起波微揚
수면이 번쩍번쩍 황금 비늘 빛이로세 水面閃閃金鱗光
어느새 하늘 끝에 옥바퀴가 솟아올라 俄看天際玉輪涌
맑고 깊은 푸른 수정 강물 속에 굴러가네 玻瓈碾碧澄泓長
(기존 번역 전재)
7. 추원정(追遠亭)도 여기에 있었는데 재상 노사신의 정자라 한다.
현충원을 돌아 나오며 한양도성을 바라본다. 겸재의 서빙고망도성도는 전호(前號)에서 언급했듯이 한양을 바라보며 그린 것인데, 동작진 앞 한강에 배가 떠 있는 것으로 보아 제목과는 달리 서빙고에서 도성을 본 것이 아니라 현재 현충원쯤 되는 곳에서 그린 그림이다. 도봉산, 북한산, 인왕산, 남산과 한양도성의 성 길도 또렷하다. 남대문도 선명하게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너무 사실적이다 보니 신묘년풍악도첩쯤으로 돌아간 것 같다. 도봉산의 모습은 손자 정황의 양주송추도(楊洲松楸圖)와 흡사하다. 이 구도로 사진을 찍어 보았다. 이촌동과 용산 건물들에 가려 비교해 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현충원을 나와 동작천철역에서 반포천을 통해 한강으로 나온다. 동작구에서는 걷는 이들을 위해 동작충효길을 이어놓았는데 동작역 ~ 노들역 ~ 노량진역을 잇는 코스가 동작충효길 3코스다.
강가 길을 통해 노량진 방향으로 간다. 잠시 후 흑석동에 접어들면 효사정으로 오르는 나무 데크 계단에 닫는다. 동작, 흑석 지역에 아름다웠을 정자 중 유일하게 복원해 놓은 정자다. 오르는 순간 눈과 가슴이 탁 트인다.
8. 효사정(孝思亭)은 “세종 때 한성부윤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의 별서(別墅)였다. 노한은 모친이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했던 자리(지금의 노량진 한강변)에 정자를 짓고 때때로 올라가 모친을 그리워했으며, 멀리 북쪽을 바라보면서 개성에 묘를 쓴 아버지를 추모했다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금천현(衿川縣) 누정(樓亭) 조에는 동시대 많은 이들의 글이 실려 있다. 현재 복원해 놓은 효사정에는 이들 글의 일부를 살려 방문객들이 읽을 수 있게 했다. 복원한 자리가 예전 자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 때에 한강신사(또는 웅진신사) 자리에 정자를 세웠다 한다.
이 지역 다른 정자는 하나도 복원되지 못한 것을 보면 공숙공의 후손인 전 노태우 대통령도 효사정 복원에 일조했던 것 같다.
기왕에 나선 길, 이제 겸재의 동작진도에서 벗어나 동작충효길 3코스를 따라 노량진 방향으로 가 본다. 한강대교 앞에서 강 길을 버리고 노량진 방향으로 오르면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을 만난다. 현재 노량진 수원지 공원 건너편 작은 언덕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가 있는 수원 화산(華山)의 현륭원(顯隆園) 원행길을 과천길에서 시흥길로 바꾼 후, 화성행차 8일이 있었던 을묘년 원행길에 노들강(노량진의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가설하여 건넜는데, 이때 어가(御駕)가 쉴 수 있게 이 정자를 지었다 한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을 들었기 때문에 일명 주정소(晝停所)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처음에는 정문과 누정 등 두세 채의 건물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용양봉저정만 남아 있다. 이때의 기록은 원행을묘정리의궤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그 그림 중 주교(舟橋. 배다리)를 놓았던 지금의 한강대교(인도교)를 보면 가운데 섬이 없다.
이 섬 이름이 일본 냄새가 풀풀 나는 중지도(中之島: nakanoshima)이다. 한강인도교를 놓을 때 용산 쪽 강변 모래와 토석(土石)을 실어다 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주교(배다리)를 그린 정리의궤에는 중간에 섬이 없다.
오늘의 마지막 코스는 길을 건너 노량진 수원지 공원을 둘러보고 사육신 공원으로 넘어간다. 우리가 이미 친숙한 사육신(死六臣) 이외에 김문기 선생이 함께 올라 기리는 분은 일곱 분이다. 공원 벤치에 봄볕이 내려앉는다.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