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얼마 전 연천군에서는 옛 연강을 연상케 하는 걷기길 ‘연강나룻길’을 개설하였다. 북한 측의 불시 임진강물 방류로 인명과 농경지가 피해를 입은 후 대비해서 쌓은 군남댐에서 시작하여 삼곶리(三串里)까지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다.
‘아 드디어 웅연나루(熊淵)에서 임진강물에 손 담그며 걷게 되겠구나’. 설레임 가득 군남댐 두루미공원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기대는 무너졌다. 연강나룻길은 이름과는 달리 나루나 강변을 걷는 길이 아니었다. 이 길은 군남댐 두루미공원에서 시작하여 산길을 따라 군데군데 강을 보며 삼곶리로 산길을 걷는 길이었다. 사실 연강(漣江)을 꿈꾸며 찾아가는 이들에게는 아쉬움이 크지만, 공기 맑고 한적한 트레킹 길을 찾는 이에게는 나름대로 괜찮은 코스였다.
군남댐 앞 두루미공원에는 연강나룻길 출발 표지와 지도가 친절하게 세워져 있다. 주차장도 잘 정비되어 있어 차를 이곳에 세우고 출발지로 회귀하면 좋은 코스다. 이곳까지 차를 몰고 가는 길 중간에는 옥계리를 지난다. 옛 지도 2에는 옥계역(玉溪驛)이 그려져 있다. 그러면서 장주고기(漳州古基)란 표기도 실려 있다. 옛 장주 읍치(邑治)가 있었다는 말인데 이제는 쇠락한 마을에 옛 초등학교도 문을 닫았다. 장주(漳州)라니…?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장주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다.
본래 고구려의 공목달현(工木達縣)인데, 신라가 공성(功成)으로 고쳤고 … 고려가 장주(漳州)로 고쳐 … 충선왕(忠宣王)이 왕위에 오르매, 임금의 이름자를 피하여 연주(漣州)로 고쳤으며, 본조(本朝) 태종(太宗)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연천 현감으로 고치고…”
이 기록을 보면 이곳 장주가 곧 옛 연천이었다는 말이다. 아, 그랬었구나.
이제 지도 1을 따르면 두루미테마파크(1)에서 출발하여 산능선 전망대(2)를 지나고 그리팅맨이 서 있는 최고봉 옥녀봉(5)을 거쳐 삼곶리 전망대(7), 이어서 돌무지 무덤을 둘러보고 회귀하여 현무암 지대(6), 개안마루(4), 여울길(3) 지나 산능선 전망대(2), 두루미테마파크(1)로 회귀하면 가장 완벽한 코스가 된다. 혹시나 힘든 이들이 계시면 옥녀봉(5)에서 현무암 지대(6)를 지나서 회귀하면 될 것이다.
지나는 산길은 아름답다. 산과 길과 강, 그리고 이제는 텅 빈 옛 마을을 지나는 트레킹 코스는 맑고 신선하다.
텅 빈 옛 마을에 남은 것이라고는 연당 나무쯤 되는 나무 한 그루와 빈터뿐이다. 요즈음 놓은 구름다리가 있는데 우리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것 같다. 옥녀봉(280m) 정상에는 유영호 작가의 그리팅맨(Greeting Man)이 15도 각도로 북녘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밤새 잘 계시었오?”
돌아오는 길 개안마루에는 겸재의 웅연계람(熊淵繫纜) 그림이 걸려 있고 그 아래 연강에는 웅연(熊淵: 곰소)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겸재의 그림처럼 웅연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없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날 밤 배를 타고 내려온 뱃길이 선연히 내려다보인다.
저 멀리 횡산(橫山: 비끼산)으로 보이는 산에서 산줄기들이 이어져 나오고 물길에는 장군교의 교각도 보인다. 강 우측 강가에는 백제 때 석실무덤도 보이고 들판 안쪽으로는 중면 삼곶리도 자리잡고 있다. 그래도 가장 주목할 곳은 웅연의 중심이 되는 강가 우뚝한 바위 모습이다. 옛사람들은 이 바위를 중심으로 아래위 강을 곰소(熊淵)라 불렀다.
사라진 ‘웅연범주도’ 보고파
이곳에 배를 띄운 사람은 연강임술첩의 주인공들만이 아니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있었겠는데 연강임술첩이 나오기 70년 전인 1672년(현종 13년) 미수 허목 일행 6인은 웅연에서 즐거운 뱃놀이를 하였다. 이 기록이 ‘미수기언’에 웅연범주도기(熊淵泛舟圖記)로 실려 있다.
미수 선생이 연천 석록(石鹿)에 은거하고 있을 때 미수를 따르던 권공산(권대재: 공산현감을 지냄), 이우당문집을 남긴 권저작(권환), 청빈한 선비 권조대가 찾아와 며칠을 즐겁게 보내는 중, 정극가(정창기: 병조판서를 지냄), 김현서가 합류하여 웅연에서 뱃놀이를 하였다. 그 후 권대재는 이때의 뱃놀이를 그림으로 남겨 미수에게 글을 부탁하였다. 그 글이 ‘웅연범주도기’로 남았다.
웅연범주도(熊淵泛舟圖)를 기록한다. 임자년(1672, 현종13)
금상 13년 4월에 권 공산(權公山)이 권 저작(權著作), 권 조대(權措大) 두 사람과 함께 석록(石鹿)의 산속 집으로 늙은이를 찾아왔기에 적적하던 중에 마음을 툭 터놓고 며칠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다음 함께 웅연을 구경하기로 하였는데, 정극가(鄭克家)가 뒤를 이어 이르렀고, 김현서(金玄瑞)도 함께하기로 약속하고 전날 밤에 이미 도착해 있었다. 마침 내리던 비가 개어 모래톱과 물가의 맑은 경치가 볼만하였다. 주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예를 갖추었기에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이튿날 웅연으로 나가서 신비로운 석문(石文) 글씨를 보았다. 기괴한 글씨가 혹은 세로로 혹은 가로로 뻗고, 혹은 합해지고 혹은 흩어지는 등 변화가 놀라웠으니, 이는 기화(氣化)가 이루어 낸 귀신의 자취라 하겠다.
이어 앞 강에 배를 띄우고 놀았다. 강 양쪽은 모두 무성한 숲과 깎아지른 듯한 벼랑인데, 간혹 향기로운 풀과 긴 모래톱이 눈에 띄었다. 물길을 거슬러서 장군탄(將軍灘)으로 올라가니 남쪽 기슭의 맑게 갠 봉우리가 가장 수려하였다. 이를 부용봉(芙蓉峯)이라고 이름 지었다(권 공산이 명명한 것이다). 그 위의 망저탄(望諸灘)은 산이 깊고 물길이 먼데, 나루터에는 사람이 없고 물새들만 공중을 빙빙 날다가 내려앉았다. 배를 돌려 내려와서 노자암(鸕鶿巖)에 이르러 객들이 각자 흩어져 돌아가면서 서로 손을 잡고 이별하였다.
뒤에 공산(公山)이 충주(忠州)로 부임한 다음 뒤미처 웅연범주도를 만들고는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였다. 지난 10월에 현서가 임단(臨湍)에서 객사하였다. 지금 그 이름이 종이에 적혀 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없다. 소탈한 성격에 유람을 좋아하였는데, 이렇게 죽은 것이 애석하여 실로 슬픔이 북받친다.
금상 15년(1674) 2월 상순에 허목 미수는 기록한다. (기존 번역 전재)
熊淵泛舟圖記 壬子
十三年四月。權公山與權著作權措大兩人。訪老人於石鹿碞居。寂中得良晤數日。敍心開暢。仍相從觀於熊淵。鄭克家踵至。金玄瑞亦與之相期。前夕已至矣。適雨新晴。洲渚霽色。可喜。主人公爲之設酒食爲禮。甚懽。明日。出淵上觀石文神書。書怪怪奇奇。或豎或衡或合或散。變動可駭。蓋氣化成之鬼神之跡也。仍泛舟前江。挾江皆茂林峭岸。往往有芳草。長洲遡流。上將軍灘。南岸晴峯最秀。曰芙蓉峯。權公山命名。 其上望諸山深水遠。渡口無人。水鳥翔集。廻船下流。至鸕鶿碞。客各散歸。相與摻手爲別。後公山出忠州。追作熊淵泛舟圖。屬老人記之。
前十月。玄瑞客死臨湍。今其名在紙。其人已亡。惜其疏散好遊。良爲於悒。十五年仲春上浣。許穆眉叟。記。
개안마루에서 내려다보이는 웅연 주변 그리운 지명들이 나온다. 석문(石文), 장군탄(將軍灘), 망저탄(望諸灘), 노자암. 저 산봉우리 중 하나는 권대재(공산)가 이름 붙인 부용봉(芙蓉峰)이겠지.
그런데 이때 그려진 웅연범주도(熊淵泛舟圖)는 어디에 있을까? 아쉽게도 그 행방은 묘연하다. 어서 나와라. 보고 싶다.
아마도 이 그림을 보았을 남원의 학자 방두천(房斗天)은 미수 선생 시에서 차운(次韻: 운을 빌려 옴)하여 시 한 수를 지었다(熊淵泛舟圖。敬次眉叟先生韻呈權參判 瑍). 그의 문집 희암집(希菴集)에 전한다. 이를 보아 웅연범주도는 멋진 그림이었을 것이다.
仙舟自在在中流。
신선이 탄 배 유유자적 강 가운데 있는데
芳草生洲白鳥浮。
향그런 풀 물가에 흰 새는 두둥실
回首澄淵留活水。
고개 돌려 바라보니 맑은 소엔 물길 머물고
躍魚今古見源頭。
뛰어오른 물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始源을 바라보네
그런데 위 미수 선생 글을 읽으면 아래와 같은 대목이 나온다.
‘主人公爲之設酒食爲禮(주인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예를 갖추었기에 매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주인이라니…?
웅연가 지금의 삼곶리에 주인처럼 붙박이로 살고 있었던 이가 있었다.
이름은 이진무(李晉茂, 1608~1677), 본관은 전주, 자는 무경(茂卿), 호는 취우(醉愚)이다. 미수의 둘째 아들의 장인이니 미수와는 사돈 관계였으며 미수의 종형 허후(許厚)의 제자였다. 평생토록 연천의 웅연 가에서 낚시질하고 두 마리 학을 기르며 처사(處士)로 살았다고 한다. 이 사돈 덕에 미수는 자주 웅연에 나가 즐기며 고기도 낚았다.
안개 낀 강 낚싯배를 탄 이야기
내가 연천(漣川)에서 일없이 지내고 있을 때 웅연주인(熊淵主人)이 나를 강가로 초대하였다. 그곳에 이르러 보니 주인이 조각배를 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 주변은 온통 무성한 숲과 바위 벼랑이었고, 녹색 빛깔을 띤 강물은 물감을 풀어 놓은 것만 같았다. 배를 끌고 여울로 거슬러 올라가자 산은 깊고 모래는 희며 물은 세차게 콸콸 흐르고 있었다. 물가에 사람은 없고 흰 새만 물고기를 엿보고 있었는데, 배가 점점 가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았다.
이에 주인과 객이 서로 즐거워하며 낚싯대를 드리우고서 즐기기도 하고, 노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기도 하고,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기도 하였다. 나루에 이르러서 소나기를 만났는데, 천지가 캄캄해지고 물결이 거세게 일어 마치 교룡이 출몰할 것만 같았다. 간간이 무지개가 보이다가 이윽고 비가 개니 낙조가 산을 머금어 산 그림자가 은은하고, 물가에는 연무가 자욱한데 멀리 포구에서 어부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이 나에게,
“참으로 즐겁습니다. 나를 위해 이를 기록해 주지 않겠습니까?”
하므로, 내가 “그러지요” 하고 답하였다. 마침내 그 일을 적어 안개 낀 강에 배를 띄우고 낚시하며 즐긴 일에 대한 기문으로 삼는다.
정미년(1667, 현종8) 7월에 미수는 기록한다. (기존 번역 전재)
煙江釣舟記
余無事在漣上。熊淵主人邀我於江干。至則主人乘葉子相待。江岸皆茂林巖崖。江水綠淨如染。挐舟上灘。山深沙白。水急水聲礚礚渚涯無人。有白鳥窺魚。舟行漸近。而不飛去也。於是主客相樂。或投竿而戲。或鼓枻而謳。或擧觴相屬。渡口逢急雨。天地黲黤。波浪爭回。若蛟螭出沒。虹霓間發。俄而雨霽。落照銜山。山影隱隱。煙渚迷茫。遠聞浦漵漁歌互答。主人曰。樂哉。盍爲我識之。余曰。諾。遂書其事。以爲煙江釣舟記勝。強圉協洽孟秋。眉叟。記。
강 이름으로 불린 남자가 있었으니
다른 이야기이지만, 여기에서 잠시 짚고 가야 할 것이 있다. 어떤 이들은 연강(漣江)이란 말이 겸재의 연강임술첩에서 시작된 것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한다. 그러나 미수기언에는 이미 연강(漣江)이 기록되었으니 오래전부터 쓴 지명이다.
을사년(1665, 현종 6) 선생 71세 3월에 연강(漣江)에 배를 띄웠다.
(乙巳。先生七十一歲。 三月。泛舟漣江)。그때 지은 시 한 편.
산 밑 봄강 깊어 물 흐르지 않는 듯 山下春江深不流
녹색 부들 바람에 물결 일어 꽃은 뜨고 綠蘋風動浪花浮
풀은 푸르고 모래는 흰 물가의 저녁 草靑沙白汀洲晩
낚시 걷고 배를 돌려 나루로 돌아오네 捲釣移舟上渡頭
심지어 후세의 문집 향산집(響山集)에서는 강 이름을 빌려 미수 허목을 연강(漣江)으로 부르고 있다. 요즈음 연속극에서 예를 들어 가회동 사는 어느 분을 칭할 때 ‘가회동에서…’ 이렇게 부르는 식(式)이다.
‘연강께서 남긴 법도 있어 스승의 뜻이었으며(漣江遺法承師旨)’ 이렇게 표현하였다.
이제 옛 글 여행에서 돌아와 개안마루에서 다시 웅연을 내려다본다. 겸재의 그림 속에는 웅연에 도착한 배들이 웅연나루에 활기를 돋우고 있고 이쪽 삼곶리 쪽으로는 제법 큰 나룻배가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오른쪽 배는 좌측으로 내려가고 있어 발란스가 맞춰져 있다. 방금 도착한 선유(船遊, 仙遊) 배들은 우람한 바위 아래 정박했는데 큰 주선(主船) 주위로 시중들던 배들이 여럿 보인다. 웅연계람(熊淵繫纜)이라는 제목처럼 삿대는 내려지고 선단은 서 있다.
그림의 우측은 상류 삭녕 방향이고 좌측은 하류 군남댐 방향이다. 하류 쪽 삼곶리 방향 언덕은 대략 지금 필자가 서 있는 개안마루쯤으로 보면 될 것이다. 지금은 선단이 서 있는 바위 넘어 집들이나 반대편 삼곶리 쪽 집들은 없다. 그냥 아무것도 없다. 웅연은 침묵의 강일 뿐이다. 어쩌면 자연으로 돌아간 평안(平安)한 모습이기도 하다. 이제 겸재를 따라 간 임진강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달밤 임진강 뱃놀이’ 함께 하실 분~
임진강 가에서 태어난 월북작가 박세영은 임진강을 노래하였다.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담담히 부른 이 노래를 듣는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뭇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강 건너 갈밭에선 갈새만 슬피 울고
메마른 들판에선 풀뿌리를 캐건만
협동 벌 이삭바다 물결 우에 춤추니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임진강 흐름을 가르지는 못하리라
20년쯤 전 남쪽 백두대간을 걷고 버켓 리스트(bucket list)에 넣은 항목이 북쪽 백두대간 길 걷기였다. 이제 연강임술첩을 마무리하며 하나 더 추가한다.
“달밤 삭녕에서 웅연까지 배타고 내려오기.”
혹시 이 글을 읽으신 분 중 함께 하고 싶으신 분 있으시면 함께 하시지요!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