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가을과 겨울 울진 여행은 강릉의 가을 바다 여행과는 달리 무언가 낯섦이 있다. 그러나 울진의 겨울 대게를 아신다면 여행길은 한결 가벼워진다. 겨울 울진에 가면 자주 듣는 이야기가 “가장 많이 잡기는 울진인데, 옆 고을 산물로 세상에 유명세를 타는 것이 아쉽다”는 말이다. 겸재 그림 길을 찾아가며 젯밥(祭ㅅ밥)에 마음 두고 가는 불성실한 길이다. 기왕 먹는 이야기부터 꺼냈으니 죽변항에 가면 대게도 그렇고 괜찮은 생선을 괜찮은 값에 살 수 있다. 예전에는 동해 바다만 가면 모두가 다 만족스러웠는데 이제는 강릉 이북부터는 그리 만만하지가 않다.
전부터 울진 가면 들리던 성류굴(聖留窟)이지만 겸재의 그림을 찾아가는 성류굴은 또 다른 맛이다. 아마도 이 그림은 겸재가 청하현감 시절에(1733~1735) 그린 것으로 여겨지는데 왕피천(王避川) 옆 선유산(仙遊山)에 있는 석회암 동굴, 성류굴 주변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보면 거대한 수직의 바위기둥이 치솟아 올랐고 그 앞 낮은 산등성에 빼꼼히 두 개의 동굴 출입구가 보인다. 이 출입구는 지금도 그림 속 모습과 동일하다. 이곳으로 이르는 길은 우측 등성이 너머로 이어지는데 울진 읍내 방향에서 연결됨을 짐작할 수 있다. 주변의 산들은 원근에 따라 그다지 높지 않게 이 수직의 우람한 바위를 호위하고 있다. 앞을 흐르는 냇물은 넉넉한 수량으로 좌측 산골짜기로 이어진다.
사진은 사진이고, 그림은 그림이다
과연 성류굴과 이 굴을 품고 있는 산은 그림처럼 저렇게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것일까? 저 정도 수직 바위산이라면 어떤 클라이머(climber)라도 오르기는 힘들 것이다. 긴 설명은 필요치 않으니 이번 가을 필자가 찍은 사진을 보자. 물에 면하는 쪽 바위산은 상당히 가파르지만, 이윽고 평범한 둥근 산이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물 건너편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산은 더더욱 둥글게 이어진, 그냥 그런 산이다. 만일 저 산을 있는 대로 그렸다면 참 심심한 그림이 되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겸재의 그림을 대하면서 느끼는 것은 “그림은 그림으로 보자”는 것이다.
이 그림 앞을 흐르는 물은 왕피천(王避川)이다. 지도에서 보듯이 옆 물길 매화천과 합류해 넉넉한 수량으로 성류굴 주변을 명승으로 만들고, 이어서 불영사를 끼고 흘러오는 불영계곡(佛影溪谷) 수(水)와 합쳐 망양정 앞 바다로 흘러간다. 왕피천은 장천(長川)이라고도 하는데 이름처럼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삼국이 형성될 즈음 우리나라 각 지역에는 작은 규모의 지역 국가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삼척 지역에는 실직국(悉直國)이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국력이 약하여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한창 성장하는 사로국(斯盧國, 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때가 102년(신라 파사이사금 23년)이었다. 그러나 짐작건대 신라의 억압이 있었는지 104년(파사이사금 25년) 이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신라는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하였다. 아마도 실직국 왕은 설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왕피천이란 이름은 이곳으로 숨어들어 온 슬픈 실직국 왕을 애도하는 백성들이 붙인 이름은 아닌지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옛 이 지역 사람들의 마음에는 실직국의 향수가 있어 삼척 성북동에는 경순왕의 손자 김위옹의 묘로 전해지는 실직군왕릉(悉直郡王陵)도 전해지고 있다.
산과 굴에 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을 보자. 불우조(佛宇條)에,
성류사(聖留寺). 백련산에 있다. 고을과의 거리는 남쪽으로 17리이니 곧 성류굴(聖留窟)이며 옛날 이름은 탱천굴(撑天窟)이다.(聖留寺。在白蓮山。距縣南十七里。卽聖留窟,古名撑天窟)
즉 성류굴이 있는 산은 백련산인데 선유산이라고 불렀다. 굴의 이름은 성류굴, 탱천굴(撑天窟)인데 선유굴로도 불렀다. 지금은 흔적을 알 수 없지만 굴 앞에는 성류사가 있었다. 굴은 2억 5000만 년 전에 형성되어 천연기념물 155호로 지정되었는데 성류굴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굴 앞의 사찰에 있던 불상을 이 굴속에 피난시켰는데, 여기서 ‘성불이 유한 굴’이라고 성류굴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라는 설명이 따른다. 임진란 이전에 발행된 동국여지승람이나 뒤에 읽게 될 고려 때 이곡의 글에도 성류굴로 기록되어 있으니 빠르면 후기 신라 늦어도 고려 때부터는 성류굴이라 불린 유서 깊은 굴이다.
매월당 김시습은 세조 14년 (1468년) 선사현(仙槎縣: 울진) 주천대(酒泉臺)에 우거하며 석류굴에 와서 유(留)한 날 시 한 수를 남겼다. 매월당집에 전하기를,
울진 성류굴에서 묵다
성류굴 앞 봄물은 이끼긴 바위에 출렁이고
바위 뒤 산 꽃은 물에 비춰 반짝인다
새삼스레 또 하나 맑고도 맑은 기운 있으니
깊은 밤 깃든 학이 놀래키며 날아오르네
宿蔚珍聖留窟
窟前春水漾苔磯。巖後山花映落暉。更有一般淸絶味。夜深巢鶴警人飛。
선유산 선유굴에 와서 자며 매월당도 학(鶴)이 된 날인가 보다.
성류굴에 대해 가장 적극적인 글을 남긴 사람은 고려 때 목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으로, 그는 금강산부터 동해안을 따라 경주까지 유람하면서 성류굴에 들러 성류사의 승려와 횃불을 들고 성류굴을 탐승하였다. 글로 볼 때 아마도 8광장까지는 다녀온 것으로 보인다. 이곡의 동유기(東遊記)가 흥미롭다.
21일에 아침 일찍 울진을 출발하였다. 현에서 남쪽으로 10리쯤 가니 성류사(聖留寺)가 나왔는데, 그 절은 석벽의 단애 아래 장천(長川) 가에 위치하였다. 단애의 석벽이 1000척의 높이로 서 있고 그 석벽에 작은 동굴이 뚫려 있었는데, 그 동굴을 성류굴(聖留窟)이라고 불렀다. 그 동굴은 깊이도 측량할 수 없었지만 으슥하고 어두워서 촛불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절의 승려로 하여금 횃불을 들고서 길을 인도하게 하고는, 또 출입에 익숙한 고을 사람으로 하여금 앞뒤에서 돕게 하였다.
동굴의 입구가 워낙 좁아서 무릎으로 4, 5보(步)쯤 기어서 들어가니 조금 넓어지기에 일어나서 걸어갔다. 다시 몇 보를 걷자 이번에는 3장(丈)쯤 되는 단애가 나타났으므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더니 점점 평탄해지는 가운데 공간이 높다랗고 널찍해졌다. 여기서 수십 보를 걸어가자 몇 묘(畝)쯤 되는 평지가 나타났으며, 좌우에 있는 돌의 모양이 매우 특이하였다.
다시 10여 보를 걸어가자 동굴이 또 나왔다. 그런데 들어왔던 동굴의 입구보다 훨씬 비좁아서 아예 배를 땅에 대고 납작 엎드려서 기어갔는데, 그 아래가 진흙탕이었으므로 돗자리를 깔아서 젖는 것을 방지하였다. 7, 8보쯤 앞으로 나아가자 조금 앞이 트이고 널찍해진 가운데, 좌우에 있는 돌의 형태가 더욱 괴이해서 어떤 것은 당번(幢幡) 같기도 하고 어떤 것은 부도(浮圖) 같기도 하였다. 또 10여 보를 가니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돌이 더욱 기괴해지고 모양이 더욱 다양해졌는데, 당번과 부도처럼 생긴 것들만 하더라도 이전보다 더욱 길고 넓고 높고 컸다. 여기에서 다시 앞으로 4, 5보를 가니 불상과 같은 것도 있고 고승과 같은 것도 있었다. 또 못이 있었는데 그 물이 매우 맑고 넓이도 수 묘쯤 되었다. 그 못 속에 두 개의 바위가 있었는데, 하나는 수레바퀴와 비슷하고 하나는 물병과 비슷하였으며, 그 위와 옆에 드리운 번개(幡蓋)도 모두 오색이 찬란하였다. 처음에는 석종유(石鐘乳)가 응결된 것이라서 그다지 딱딱하게 굳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고는 지팡이로 두들겨 보았더니 각각 소리가 나면서 길고 짧은 크기에 따라 청탁(淸濁)의 음향을 발하는 것이 마치 편경(編磬)을 치는 것과도 같았다.
이 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한 경치가 펼쳐진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지만, 내 생각에는 속세의 인간이 함부로 장난삼아 구경할 성격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기에 서둘러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 동굴이 많이 뚫려 있었는데, 사람이 한번 잘못 들어가면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동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느냐고 그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동굴 안을 끝까지 탐험한 사람은 없다. 하지만 평해군(平海郡)의 해변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거리는 대개 여기에서 20여 리쯤 된다”라고 하였다.
앞서 동굴 입구에서 옷에 훈김이 배고 더럽혀질까 걱정이 되어 동복(僮僕)의 의건(衣巾)을 빌려 입고 들어왔는데, 일단 동굴 밖으로 나와서 의복을 갈아입고는 세수하고 양치질을 하고 나니, 마치 화서(華胥)를 여행하는 꿈을 꾸다가 퍼뜩 잠에서 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물(造物)의 묘한 솜씨는 헤아릴 수 없는 점이 많다고 내가 예전부터 생각해 왔는데, 이번에 국도(國島)와 이 동굴을 통해서 더욱 확인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치는 자연스럽게 변화해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인가, 아니면 처음부터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인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라면, 그 변화의 기틀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오묘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라면, 천세토록 만세토록 귀신이 공력을 쏟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가 있겠는가.
(二十一日。早發蔚珍。縣南十里有聖留寺。寺在石崖下長川上。崖石壁立千尺。壁有小竇。謂之聖留窟。窟深不可測。又幽暗。非燭不可入。使寺僧執炬導之。又使州人之慣出入者先後之。竇口狹。膝行四五步。稍闊起行。又數步則有斷崖可三丈。梯而下之。漸平易高闊。行數十步。有平地可數畒。左右石狀殊異。又行十許步有竇。比竇口益隘。蒲伏而行。其下泥水。鋪席以防霑濕。行七八步稍開闊。左右石益殊異。或若幢幡。或若浮圖。又行十數步。其石益寄恠。其狀益多不可識。其若幢幡浮圖者益長廣高大。又行四五步。有若佛像者。有高僧者。又有池水淸甚。闊可數畒。中有二石。一似車轂。一似淨缾。其上及旁所垂幡盖。皆五色燦爛。始意石乳所凝。未甚堅硬。以杖叩之各有聲。隨其長短而有淸濁若編磬者。人言若沿池而入則益奇恠。余以爲此非世俗所可䙝玩者。趣以出。其兩旁多穴。人有誤入則不可出。問其人窟深幾何。對以無人窮其原者。或云可達平海郡海濱。盖距此二十餘里也。初慮其熏且汙。借僮僕衣巾以入。旣出。易服洗盥。若夢遊華胥。蘧然而覺者。甞試思之。造物之妙。多不可測。余於國島及是窟益見之。其自然而成耶。抑故爲之耶。以爲自然則何其機變之巧如是之極耶。以爲故爲之則雖鬼工神力窮千萬世。而亦何以至此極耶). (기존 번역 전재)
이곡 선생도 성류굴에 탐승을 했으니 우리도 들어가 보아야겠다.
성류굴은 환선굴과는 달리 입출구가 비좁다.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드나들 수가 없다. 입출구 앞 바위 면에는 누군가가 쓴 각자(刻字)들이 있다. 성류굴은 고대 각자의 보고이다. 입출구 좌측 중앙부에는 서기 663년으로 추정되는 후기 신라 각자가 있다. 아마도 굴(窟)의 신에게 제사 드리는 내용이 아닐까 추측된다.
癸亥年三月
八日암[嚴 아래 土 쓴 글자]主付智
大奈麻未△疋?
此亰△△斤?大△大?
△△五十?△△
△?人大息食
刀人△△
입출구 중앙에는 조선 후기 울진 현령을 지낸 이희호(李熙虎) 일행의 각자도 있고, 우리를 궁금하게 하는 각자도 있다. ‘鄭O’로 보이는 각자인데 혹시 뒤 자(字)가 敾(선)이면 좋겠다. 특수 촬영하면 확인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 아래로는 ‘李OO’ 라는 각자가 이어지는데 李秉淵(이병연)은 아닌 것 같은데 이 각자도 확인이 필요하다.
굴로 들어가기 전 성류굴이라는 이름이 궁금해진다. 성류(聖留)? 어떤 성인이 머물렀단 말인가? 흔히들 임진란 때 성류사의 부처님과 나한들을 피신시켜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고려 때부터도 성류굴이라고 불렀으니 그럴 리는 없다. 삼국유사 탑상(塔像) 조에 그 해답이 있다.
오대산 보질도태자(寶叱徒太子)의 전기에 보면 신라 정신왕(신문왕)의 태자 보질도와 동생 효명(孝明)이 불도를 닦는 이야기가 있다. 보질도 태자는 울진대국 장천굴에 들어가 수도를 한다(入蔚珍大國 掌天窟 修道). 그 후 오대산 신성굴로 옮겨 갔지만 성인으로 불리기에는 충분하였다. 그 후 장천굴은 성류굴로도 불리고 신라 화랑의 수도처로, 승려들의 수행처로 이름을 드높인 것 같다.
종유석에 새겨진 글자들
이제 굴 구경에 나선다. 온갖 종유석이 가득하다. 2년 전(2019년) ‘목간과 문자(木簡과 文字)’라는 학술지에 ‘울진 성류굴 제8광장 신라 각석문(新羅 刻石文) 발견 보고’라는 보고문이 올라왔다. 성류굴 8광장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 주로 신라 시대에 써 놓은 각자를 조사하고 일부는 해제를 단 보고서였다. 가볍게 여길 수 없는 큰 발견인 셈이다. 차차 조사되고 연구되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각자는 진흥왕이 성류굴을 방문하고 남긴 것으로 보이는 각자였다.
庚辰六月日 柵作O夫飽 女二交右伸 眞興王擧 世益者五十人
경진년(560년, 진흥왕 21년) 6월 일 잔교를 만들고, 뱃사공을 배불리 먹였다. 여자 둘이 교대로 보좌하며 펼쳤다. 진흥왕이 다녀가셨다. 보좌한 이가 50인이었다.
梵廉行 夫匁郞行 云山行
범렴 옴. 부운랑 옴. 운산 옴
이렇듯 승려와 화랑도 다녀갔다.
앞으로 성류굴을 찾는 또 하나의 재미는 메모지를 들고 각자를 확인하는 숨은 글자 찾기가 될 것 같다. 모처럼 울진에 가게 되면 둘러보시기를 권하는 두 곳만 추천하려 한다. 첫째는 봉평 신라비 전시관이다. 옛 비석에 대한 재미를 들이게 될 것이다. 또 하나는 불영계곡길을 넘어 불영사다. 마음도 쉬어 가는 절이다. 향후 성류굴에서 귀중한 기록들이 가득 나오기를 기대하며. (다음 회에 계속)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