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오늘 울진(蔚珍) 월송정(越松亭)을 끝으로 그동안 찾아 왔던 관동팔경 길과 겸재의 관동명승첩 길은 끝을 맺는다. 관동팔경은 고성의 청간정(淸澗亭),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 월송정 대신 흡곡의 시중대/侍中臺를 넣는 경우도 있음)을 일러 왔다. 북녘땅이 된 삼일포와 총석정을 제외하고는 겸재의 그림 따라 관동의 바닷길을 내려온 것이다.
또 이미 김화, 철원을 지나며 언급했듯이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은 겸재(1676~1759년)가 관동 지역 정자연, 수태사 동구, 총석정, 삼일호, 해산정, 천불암, 청간정, 시중대, 죽서루, 망양정, 월송정 이렇게 명승 11곳을 그린 화첩으로, 정자연에 쓰여 있는 화제(畵題)로 볼 때 최명길의 증손 최창억(崔昌億: 1679~1748년)에게 그려 준 화첩임을 알 수 있다. 그 화제의 내용은 “亭子淵 戊午秋爲寓庵崔永叔寫(정자연 무오추위우암최영숙사)”, 즉 “무오년(1738년, 영조 14년) 가을 우암 최영숙을 위해 그리다”로 되어 있다.
강원도 울진이 경상북도 울진 된 사연
망양정이 그랬듯이 월송정도 한결같이 옛 글과 그림에는 울진 월송정이 아니고 평해(平海) 월송정이다. 그리고 경상북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동팔경이다. 관동(關東)은 대관령을 이르는 명칭으로 요즈음 말로 하면 영동(嶺東)인데 예전 개념으로는 강원도 동쪽을 이르는 말이다. 경상북도 울진군의 남쪽이 왜 관동이란 말인지? 조선의 옛 지도와 지리지(地理誌)에는 강원도의 평해(平海)로 잘 있던 곳이 지난 호 망양정 때 설명했듯이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울진에 포함되더니 1963년 1월에는 울진이 통째로 경상북도로 이관됨에 따라 두 번이나 소속을 갈게 되었다. 땅이야 무슨 말이 있겠냐마는, 월송정과 망양정 관련 옛 자료를 찾으러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여러 옛 지도에서 ‘강원도 평해’로 찾으면서 옛길을 찾아다니는 필자에게는 뭔가 짠 하는 느낌이 든다.
각설하고 영동고속도로 강릉에서 길은 갈라져 고속도로는 삼척으로 이어지는데, 삼척 어디메쯤 오면 고속도로도 끝나고 예전 동해안 길 다니던 7번 국도가 월송정을 향한다. 이제는 국도가 준고속도로가 되어 바닷가 길을 다니던 운치는 없지만 목적지까지 빨리 데려다 주니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바다가 그리우면 환상의 해변 길도 잘 이어져 있으니 그날의 기분에 맞추면 된다.
서울, 경기로부터가 아니고 남쪽에서 올라와도 7번 국도는 먹거리와 경치가 참 아름다운 길이다. 마음의 여유를 잠시 낼 수 있다면 겸재를 기화로 다녀 볼 만한 길이다. 해파랑길을 걷는 이들에게 더 없이 좋은 쉼터며 볼거리를 제공하는 곳이다.
월송정 안내판에는 월송정 유래가 간략히 적혀 있다.
월송정은 관동팔경의 하나로 조선 시대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이 연산군 때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안축의 취운정기(1331년)에 고려 충선왕 4년(1312년) 이미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훨씬 이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월송정은 원래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약 450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오래되어 없어진 것을 1980년 현 위치에 지었다. 월송(越松, 月松)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곡의 동유기(東遊記, 1349년)에 처음으로 나오는데 ‘소나무 만 그루 가운데에 월송정이 있는데 사선(四仙)이 유람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들리지 않고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외 신라 시대 네 명의 화랑이 이곳에서 노닐며 쉬었다거나, 어떤 사람이 중국 월나라에서 소나무를 가져와 심었다거나, 밝은 달이 떠올라 소나무 그림자가 비추었기 때문에 지어졌다는 설이 전해온다. 특히 조선 성종 임금 때 전국 활터에 있는 정자 중 경치가 가장 뛰어난 곳으로 뽑혔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며 그동안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제 이 안내판의 지식을 바탕으로 겸재의 그림을 비롯한 조선 시대 월송정 그림들을 살펴보자. 우선 필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6점의 월송정도를 살펴 보았다. 겸재의 월송정 2점, 단원, 허필(許佖), 정충엽(鄭忠燁), 강세황(姜世晃)의 그림들이다. 우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바라본 시선(視線)이다. 겸재의 관동명승첩 속 월송정 1이나 또 다른 그림 월송정 2는 같은 초벌 밑그림으로 그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소 높은 곳에서 소나무숲 너머로 바라본 월송정의 모습이다.
겸재의 월송정 1은, 앞 월송정 안내판에서 보듯, 원래의 월송정이 현 월송정보다 450m쯤 서남쪽에 있었다 하니 그곳 평지에 있던 월송정보다 다소 내륙 쪽 한국마이스터 원자력고등학교 앞 언덕쯤에서 바라본 시선일 것이다. 실제로는 그보다 눈높이를 높여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월송정 앞으로는 넓은 백사장이 펼쳐지고 그 너머 좌측으로는 바다가 펼쳐진다. 이 바다는 예부터 큰 파도가 치기에 ‘고래 같은 파도가 친다’고 경파해(鯨波海)라 했다.
천지간 큰 것 중에 바다가 제일 되니, 그 둘레가 가없고 또 그 바깥도 없다네. 그래서 바다를 한번 보면 다른 물은 물도 아니니 사해(四海)가 이다지도 크니, 내 눈도 커졌네. 내 한번 시험삼아 단구(丹丘: 신선 사는 곳)까지 가서, 삼도(三島: 삼신산)를 내려다 보고 십주(十洲)를 희롱하려네
鯨波海. 天地之鉅海爲最, 其環無際亦無外. 由來觀海難爲水, 眼高四海如許大. 我欲試往仍丹丘, 睥睨三島戲十洲.
라 했듯이 겸재도 어마어마하게 큰 파도를 그려 놓았다. 겸재의 그림은 마음으로 보아야 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풍경 속 사람 그려넣은 재미
앞 소나무 숲은 지금의 월송정이 서 있는 소나무 숲 언덕일 것이다. 겸재의 소나무는 여기에서도 나란히 나란히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지금 월송정에 서 있는 소나무와는 다른 모습이다. 좌측 우뚝한 바위산은 굴미봉일 것 같은데 지도를 보면 2.9m라고 쓰여 있는데 저렇게 우뚝한 바위봉으로 그려놓다니… 코믹하기도 하다. 아계 이산해의 월송정기(越松亭記)에는 굴산(堀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월송정 뒤쪽으로는 작은 개울이 흐른다. 이제는 개간하여 그 흔적이 없는데 백암온천이 있는 백암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들어가는 남대천의 지류이다.
요즈음의 우리가 풍경 사진을 찍을 때 원경 속에 인물을 슬쩍 집어넣으면 사진의 심심함이 덜어지듯이 겸재는 여기에서도 가물가물 인물을 살려 놓았다. 나그네 양반은 나귀에 앉고 사동은 나귀를 끌고 간다. 그림 보는 재미가 있다.
이제 이해를 위해 현재의 월송정 주변 지도를 올린다. 지도 속 1은 현재의 월송정 위치, 2는 옛 월송정 위치, 3은 평해 황씨 시조제단 북쪽에 위치한 굴미봉이다.
두 번째 그림도 겸재의 월송정이다. 지난해 서울옥션 경매로 나온 작품인데 관동명승첩 속 월송정보다 시선이 훨씬 앞쪽으로 이동해 있다. 소나무 언덕은 역시나 나란히 나란히, 굴미봉은 더욱 우뚝하고 오르는 길도 뚜렷하다. 예의 사람도 그려 넣어 살아 있는 그림이 되게 하였다. 월송정으로 보이는 누각(樓閣)은 정면 3간(間), 측면 2간(間)으로, 누대(樓臺) 위에 의젓하고 성벽은 견고하다. 누각 아래로는 바다 방향에서 비스듬히 좌측(동북쪽)으로 방향을 틀고 앉은 출입문이 선명하다. 뒤쪽으로는 이 작은 성(城)과 관련되어 있을 기와 두 채가 보인다. 정자(亭子)라더니 무슨 성벽과 누각이란 말인가?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그림 속에는 심상치 않은 글이 보인다. 무슨 화제를 쓴 것일까?
沙外鯨濤柳外潭 모래밭 너머로는 큰 파도, 버드나무 밖은 연못
美人歌曲挽歸驂 미인의 노래 소리 돌아가는 말 발길 잡네
槎詩 사천(이병연)의 시
越松亭 謙齋 월송정 겸재
이미 여러 번 살펴보았듯이 겸재가 청하 현감을 하던 2년여(1733~1735년) 사이 겸재와 사천은 관동 여행 길에 올랐다. 이때는 사천이 삼척부사로 재임하던 때이므로 둘은 시 쓰고 그림 그리며 함께 했던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두타산 용추폭포에서 만났던 겸재와 사천의 나란히 쓴 이름자도 그렇고, 대부분 일실되고 조금 남아 있는 사천시초(槎川詩抄) 속 시들에 관동팔경의 여러 곳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 둘은 함께 여행했을 개연성이 크다.
이 월송정 그림에 겸재가 굳이 사천의 시라고 밝히고 제화시로 쓴 것을 보면 아마도 둘이 월송정 유람을 한 후 겸재는 그림 초본을 그리고 사천은 시를 썼을 것 같다. 청하(淸河)로 돌아온 후 겸재는 그림을 그리고 사천이 썼던 시구를 그림에 써넣어 사천에게 보냈으리라. 이 그림 속에는 같은 시간대를 이렇게 함께 산 사람의 체취가 느껴진다. 아쉽게도 이 시는 사천시초(槎川詩抄)에도 남아 있지 않다. 겉에 보이는 그림은 같지만 관동명승첩에 있는 월송정은 이때 그린 초본 그림을 베이스로 해서 뒤에 다시 그린 그림일 것이니 이 두 그림을 보는 필자의 마음은 사뭇 다르다.
단원의 월송정도 겸재의 월송정 1과 같은 위치에서 월송정을 바라본다. 성벽도 보이고 뒤로는 세 채의 기와도 보인다. 아마도 이 성과 관련된 건물일 것이다. 소나무는 머리만 조금 보이게 하고 모래사장과 바다를 넓게 그렸다. 좌측 끝으로는 지금의 구산해수욕장과 구산항 방향도 모두 시선에 들어온다. 상당히 사실적이다. 임금의 명을 받고 그리는 그림이다 보니 사실에 충실했을 것이다.
이번 그림은 선문대박물관 소장본 연객 허필(烟客 許佖)의 관동팔경도병 중 한 폭을 보자. 허필은 겸재의 세검정도를 이야기할 때 백사실 부분에서 소개한 화가 겸 문필가다. 집안이 소북(小北)인 관계로 인조반정과 함께 무너진 북인 집안이었으므로 벼슬길은 곁에도 오르지 못하고 남산골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글, 그림 모두 한가락 했는데 빛을 보지 못 했다. 표암 강세황(豹菴 姜世晃)과 가까웠는데 그를 통해 허필의 모습을 언뜻 볼 수 있다. 겸재의 월송정 두 번째 그림과 같은 시각(視角)에서 사실적으로 그린 느낌을 준다. 사천의 시에서 만났던 버들이 보여 반갑다.
다음은 중인 화가 정충엽의 월송정이다. 겸재의 관동명승첩 속 월송정과 같은 시각이다. 소나무가 많은데 겸재의 나란히 나란히 소나무를 보는 것 같다. 월송정 뒤쪽으로 민가도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아계에 의하면 이 마을 이름은 화오촌(花塢村)이다. 아버지 이지번은 중종조 때 평해로 유배를 왔는데 이곳에서 머지않은 황보촌에서 적거생활을 하였다. 그도 55세 되던 해 벼슬길에서 물러나 이곳에 다녀간 때도 있었기에 월송정과 주변 마을을 잘 알고 있었다.
끝으로 강세황의 월송정이다. 국립박물관 소장 풍악장유첩(楓岳壯遊帖) 속 그림이라 하는데 다른 그림들과는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다른 그림들은 서북 방향에서 동남 방향으로 월송정을 바라본 그림들임에 비해 표암은 겸재의 첫 그림보다 더 남쪽으로 내려와 거의 월송정 뒤에서 바라보고 그림을 그렸다. 어쩌면 월송정보다 주변 경관에 더 관심을 둔 듯하다. 월송정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무성한 소나무는 그리지 않고 월송정 앞 모래사장과 산을 우뚝하게 그렸다. 이 그림으로 알게 되는 사실은 월송정 앞 모래가 쌓여 사구(砂丘)를 이루고 그 위로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계는 월송정기에서 좌측 모래언덕을 상수정(上水亭), 우측 모래언덕을 하수정(下水亭)이라 했다. 바다는 그 너머로 펼쳐지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다.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양반 화가라서 그런지 그림이 심심하구나.
왜 바닷가 성을 쌓고 정자라 했을까
이제 다시 앞의 의문으로 돌아가자.
왜 바닷가에다가 성을 쌓고 문루(門樓)를 만들고 그것을 정자라 하는지? 과연 정자가 맞는지? 이런 것들이 궁금하다. 옛 지리지들을 찾아가 본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의 평해군 편에는 “월송정(越松亭)은 군(郡)의 동쪽에 있다”고 했으니 평해읍치 동쪽에 월송정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앞에 월송정 안내문에는 “월송정은 관동팔경의 하나로 조선 시대 강원도 관찰사 박원종이 연산군 때 창건하였다고 전한다”라 했다. 이 무슨 말인가? 세종 때 기록에 있는 월송정을 연산군 때 창건했다니…?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 부분에 이런 기록이 있다. “古無宇觀,察使朴元宗始建.” 옮기면 이런 뜻이다. “예전에는 누각이 없었는데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비로소 지었다”. 월송정에 누각이 없었는데 누각을 올렸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오해한 듯하다.
또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월송정(越松亭)은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푸른 소나무가 만 그루이고, 흰 모래는 눈 같다. 소나무 사이에는 개미도 다니지 못하며, 새들도 집을 짓지 못한다. 민간에서 전하여 오는 말이 “신라 때 신선 술랑(述郞) 등이 여기서 놀고 쉬었다(越松亭. 在郡東七里. 蒼松萬株, 白沙如雪. 松間螻蟻不行, 禽鳥不棲. 諺傳新羅仙人述郞等遊憩于此)” 한다. 예나 지금이나 소나무가 빽빽하여 개미도, 새들도 감히 범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앞에 월송정 유래를 적은 글에 여러 유래가 소개되었는데 이곳에 갈 때마다 필자는 소나무 숲 너머 정자(越松亭)가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또 관방편에는, “월송포영(越松浦營)은 고을 동쪽 7리에 있는데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이 있다(關防 越松浦營. 在郡東七里. 水軍萬戶一人)”라고 하였다.
또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월송정(越松亭)은 월송진(越松鎭)에 있는데 푸른 솔이 만 그루나 있으며 모래가 10리나 깔렸다”라고 했고, 연려실기술에는 “월송포영(越松浦營)은 군의 동쪽 7리에 있는데 만호가 있다”라 하였다.
윗글들을 종합하면 알 수 있는 사실이, 월송정은 적어도 세종 이전부터 있어 왔는데 연산군 때 박원종이 누각을 올렸다는 것이다. 위치는 평해군 읍치 동쪽 7리로 국가 방어 시설인 월송진(또는 월성포영) 내에 있고 소나무 만 그루, 모래는 10리나 깔려 있다.
이제 겸재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이해가 된다. 바닷가 월송진에 성을 쌓고 그 문루를 세워 월송정이라 했기에 다른 정자와 달리 성벽의 문루로 그려졌던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한적한 바닷가에 성을 쌓은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을 잠시 살펴보자.
태조 5년 (1396년) 11월 5일 자 기록이다. “왜구가 평해성(平海城)을 포위하였다(倭圍平海城)”.
며칠 뒤 11월 13일 자 기록을 보면, “경상도 도절제사 최운해(崔雲海)가 왜구를 영해(寧海)에서 참살하니, 왜구가 다시 배를 타고 강원도로 향하였다(慶尙道都節制使崔雲海, 擊斬倭寇于寧海, 倭還騎船, 向江原道)”.
세종 31년(1449년) 9월 19일자 기록을 보면, “강원도 평해군(平海郡)으로부터 함길도 경흥부(慶興府)까지 약 2천여 리이온데, 육지엔 둔병(屯兵)을 두고 바다엔 전함(戰艦)을 두어 방어진이 서로 바라보게 하였사오나(自江原道 平海郡至咸吉道 慶興府, 約二千餘里, 陸置屯兵, 海設戰艦, 列戍相望)” 이렇게 대비한 기록도 있다.
이렇듯 왜구가 불시에 들이닥치는 약탈이 남해, 서해는 물론 동해에도 심심치 않아 큰 피해를 입었다. 왜구는 일본 해적이 아닌 북규수(北九州) 지방의 마쓰우라(松浦)당으로 대표되는 정규군으로 내란과 흉년으로 궁핍해지자 조선과 명나라 바닷가로 해적질을 다녔다. 우리는 고려 고종 이래 조선 초까지 그 피해가 막심하였는데 불시에 이곳저곳으로 들이닥치니 조정은 이를 막지 못하고 섬과 해안에 사는 백성들을 그 땅에서 떼어내 내륙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시행한 때도 있었다.
월송진(월송포영)도 고려말 왜구의 노략질에 대비해 쌓은 방어 시설인 것이다. 1326년(충숙왕 13) 존무사(存撫使) 박숙(朴淑)이 처음으로 지었고 앞서 살폈듯이 조선조 박원종이 누각을 올렸다.
그런데 옛 지도를 보면 의문점이 남는다. 1700년대 중반에 그려진 지도(광여도, 여지도, 해동지도 등)에는 월송진 밖에 월송정이 별도로 그려져 있고, 1800년대 지도(지승, 1872년 지방지도 등)에는 월송진 성루(城樓)를 월송정으로 표기했는데 성루 이외에 월송정이 별도로 있었는지 궁금하구나.
이제 월송정에 오른다. 소나무 우거진 언덕에 새로 지은 누각이다. 남쪽 기슭에는 이 지역 출신 재일교포들이 월송정 복건(復建)을 위해 출연한 찬조금 내역을 적은 비가 서 있다. 그 금액을 보면 참 격세지감이 든다. 몇만 원, 몇십만 원이 거액이던 시절의 흔적이다. 이때 지은 월송정이 너무 옛 모습과 달라 1980년에 새로 지었는데 새로 지은 현재의 월송정 편액은 최규하 대통령의 단아한 해서체 글씨다. 그분의 성품이 글씨에 그대로 담겼다. 누각에 오르면 백사장 너머로 끝없는 바다가 보인다. 어쩌면 이처럼 옛글 그대로일까. 여러 시문(時文)이 편액되어 있다. 한두 편이라도 읽고 가자.
고려조 안축(安軸)의 시(詩)가 걸려 있는데 번역이 맛갈지다.(사진 참조)
事去人非水自東, 千年遺踵在亭松. 女蘿情合膠難解, 弟竹心親粟可舂. 有底仙郞同煮鶴? 莫令樵斧學屠龍. 二毛重到曾遊地, 却羨蒼蒼昔日容
우리에게는 낯선 고려 때 이행이라는 이의 시 편액도 걸려 있다.
越松亭 騎牛子 李行
滄溟白月半浮松 叩角歸來興轉濃 吟罷亭中仍醉倒 丹丘仙侶夢相逢
右高麗藝文館大提學騎牛子李先生詩也 先生以平海黃氏外孫謫居白巖山下 自號白巖居士 每月夜騎牛遊越松亭 此詩卽其時所作也 玆幷金節齋白巖居士贊刻而揭之.
넓은 바다 위로 흰 달은 소나무 위 반쯤 떴고
소뿔 당겨 돌아오니 흥은 더욱 깊구나
시 그치고 정자에서 취하여 벌러덩
신선 세계 신선님들 꿈속에서 뵙는구나
사진 오른쪽은 고려 예문관 대제학 기우자 이 선생의 시이다. 선생은 평해 황씨의 외손으로 백암산 아래에 귀양 와서 살고 있었는데 스스로 이르기를 백암거사라고 하였다. 달 밝은 밤이면 소를 타고 월송정에서 노닐었는데 이 시도 그때 지은 것이다. 이에 아울러 절재 김공(김종서)의 백암거사 찬도 새겨서 걸어둔다.
그랬었구나. 소 타고 다니던 이행이란 분이 계셨구나. 이곳 명문가 평해 황씨의 외손이라서 평해에서는 기리는 인물인가 보구나. 곁에는 김종서의 백암거사 찬도 걸려 있다. 그밖에도 걸려 있는 편액들, 동국여지승람에 소개된 시문들, 평해읍지에 읊어진 시문들이 많은데 모두 줄인다. 이제는 끝없는 모래언덕으로 남은 월송정 옛터를 마음에 담아두고 기왕 온 김에 백암온천 들러 구주령(九珠嶺)을 넘으면 옥녀당(玉女堂)의 옥녀가 기다리고 계신다. 곁 서낭당에는 남근석이 우뚝하다. 이곳은 영양 수비면(首比面)인데 우리나라 오지 중 하나일 것이다. 맑은 공기와 물로 몸 한 번 살려 볼거나.
구주령 고갯길에
한 오백년 기다렸네
바람 서리 내린 날
눈 덮여 길 끊긴 날
별밤 별 세며
흔 달 바라보며
平海의 마른 생선
등짐지고 넘던 선질꾼도
首比의 묵나물 바리바리 메고 가던 산꾼도
어느날은 그 남정네
그 門 살짝 열었을까
아씨는 수줍어서 문고리 잠갔을까
상기도 잠긴 그 門 꽃은 피었을까
玉女堂을 지나며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