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1호 천수림(사진비평)⁄ 2023.01.30 13:44:46
우리는 여전히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카메라는 태생적으로 ‘거짓’을 품고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와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이미 19세기 중반 가짜 심령사진부터 할리우드 특수효과, 인공지능, 딥페이크 기술, 할리우드 배우들이 사후에 제작된 영화에 출연하는 것까지. 우리는 정체성에 대한 신뢰도뿐만 아니라 식별 능력까지 의심해야 하는 시대를 건너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 나’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인물초상사진은 어떤가.
한국 사회의 특정 인물군의 유형을 보여주는 초상 작업을 진행해온 사진작가 오형근은 ‘오형근:왼쪽 얼굴’(아트선재센터)전에서 정체성의 흔들림과 내면의 불안을 포착했다. 헝가리 사진작가 플로라 보르시는 자신의 반려동물과 함께 찍은 셀카와 본인 신체와 동물 신체의 특징을 결합한 사진자화상 ‘애니마이드(Animeyed)’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드러낸다.
모호하고 불안한 경계인, ‘오형근: 왼쪽 얼굴’
아트선재센터에서 1월 29일까지 열린 오형근의 전시 ‘오형근: 왼쪽 얼굴’은 ‘골리앗(빌리 몹라이드)’ 시에서 시작됐다. “사람들이 말하는 구름과 소성단을 난 구분 못해요. 하지만 당신이 여기 없다는 것만은 알겠어요. 왜냐하면 감정이 느껴지지 않거든요. 당신은 떠났어요. 그래도 한가지…. 한가지만은 확실히 알아요. 난 무겁고 당신은 아니에요.”
제목으로 사용한 ‘왼쪽 얼굴(left face)’은 작가가 좋아하는 이 시에서 착안했다. 아줌마와 소녀, 군인 등 유형별 인물 사진을 통해 동시대를 탐구해왔던 그가 선보인 이번 전시는 그동안 보여 왔던 초상사진과는 달랐다.
20여 년간 다양한 인물 군상을 작업해왔던 그에게 우리나라는 일종의 유형의 천국이었다. 한국사회의 ‘아줌마’(‘아줌마’전, 아트선재센터, 1999)를 소환했던 당시 그의 사진은 유형이 명백했다. 당시 그는 인물을 만나면 남편의 직업까지 맞출 정도로 명백함이 드러난다고 회상했다. “인물 사진을 주로 찍다 보니 한눈에 사람을 파악하는 노하우도 생긴 것 같다”고. 하지만 이번 ‘왼쪽 얼굴’전엔 전형적 유형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특징이 나타났다.
한국 사회에 등장한 이런 모호한 얼굴은 ‘불안초상(Portraying Anxiety)’ 연작의 새로운 피사체가 됐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규정하기 힘든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등장했다. 2006년경부터 약 4년 동안 작가의 작업실이 위치한 이태원 일대에서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만난 젊은이 200여 명의 사진을 찍었다.
전시 제목으로 사용된 ‘왼쪽(left) 얼굴’의 왼쪽(left)은 다른 방향으로써 왼쪽(left)이기도 하지만, 남겨진 흔적으로서 왼쪽(left)도 의미했다. 이렇게 완성한 ‘불안 초상’은 예명과 아이디로 표기됐을 뿐 본명은 등장하지 않았다. 드라마 ‘파친코’의 배우 김민하도 만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다른 인물들처럼 20대의 모호하고 무표정한 표정을 담고 있었다.
“‘나는 태생적으로 불안을 보는 데 익숙하다’고 나의 작업노트 첫 문장에 이렇게 씌어있다.” 작가는 이들에게도 ‘불안’을 읽었다. 펼쳐놓고 보니 신기하게도 이들 젊은 세대의 초상엔 삶의 궤적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이런 특징을 두고 ‘원심력적 얼굴’이라고 표현했다.
작가는 “과거에는 ‘구심적’ 얼굴이 많았다면 요즘은 ‘원심적’ 얼굴이 많아져 가늠이 잘 안 된다. 고도화된 사회일수록 규정화되길 원한다”며 “그렇지만 이 부유하는 주체들에는 한국인의 미묘한 불안의 정서가 느껴진다. 대체 우리 사회에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더 탐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속 인물들은 무표정한 눈빛으로 특정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직업도 계층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작가는 이 분류할 수 없는 새로운 인간, 경계인을 ‘왼쪽 얼굴’이라 명명했는데 이 조어엔 우리 시대의 집단 무의식이 반영됐다.
이 경계인들은 우리 시대 불안의 징후를 탑재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 즉 ‘사회적 보고서’라 할 수 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와 소셜 미디어를 자연스럽게 접하고 자유자재로 사용한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이 세대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 익숙하며 가짜 정체성, 환상, 재현된 이미지에 익숙하다. ‘층위가 없는, 납작한, 플랫한 얼굴’은 마치 진화한 미래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낯설고 기묘하다. 초상사진의 배경색은 우유처럼 부드럽게 느껴지는 파스텔톤 색채를 선택했는데, 이것은 조형적으로도 ’플랫‘한 이미지를 더 부각시켰다.
1층 프로젝트스페이스에서는 1999년 오형근의 ‘아줌마’ 연작의 흑백사진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아트선재파일:오형근’ 전시는 아트선재가 처음 시도하는 형식이었다. 1999년 열렸던 오형근의 ‘아줌마’ 전시를 재소환했다. 발표 당시 한국 사회의 중년 여성에 위치와 의미를 환기시킨 전시로, 과거의 작품과 신작을 나란히 보여줌으로써 오형근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조망할 수 있었다.
오형근은 아줌마 등 한국 사회의 징후적 계층과 대상에 대한 인류학적 탐구, 여성에 대한 연구 시리즈인, ‘소녀연기’, ‘화장소녀’ 등과 함께 ‘광주 이야기’, ‘중간인’ 등 규율과 폭력에 대한 탐구까지 한국 사회의 징후와 초상을 꾸준히 기록해왔다.
동물과 인간의 결합, 플로라 보르시 ‘애니마이드(Animeyed)’
오형근의 ‘왼쪽 얼굴’이 우리시대 새로운 인간의 유형을 추적했다면, 헝가리 태생의 사진작가 플로라 보르시는 본인 신체와 동물 신체의 특징을 결합한 사진자화상 ‘애니마이드’ 연작을 통해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신(新)자아상’을 출현시켰다.
한국-헝가리 수교 33주년을 기념해 국내 최초로 헝가리 출신의 작가 플로라 보르시의 특별기획전 ‘애니마이드’가 사비나미술관에서 2월 26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강아지, 꽃, 나비, 새, 곤충, 물고기 등 여러 생명체와 초현실적 캐릭터 아바타를 결합한 자화상 사진 연작을 선보인다.
‘애니마이드’ 연작은 다양한 자아정체성(멀티 페르소나), 본래 캐릭터와 부캐(아바타) 사이의 균형, 현실과 비현실의 존재론적 성찰,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라는 종 차별주의를 해체한다. 작가는 매번 촬영할 때마다 다양한 여성 캐릭터로 특수 분장한 뒤 위장한 자신의 모습을 직접 카메라에 담는 셀프 포트레이트(Self-Portrait)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전시 제목 ‘애니마이드’는 동물을 뜻하는 ‘애니멀(animal)’과 눈을 뜻하는 ‘아이(eye)’의 합성어로, 작가가 지은 것이다. 그는 “애니마이드에 대한 아이디어는 내 반려견인 데조와 셀카를 찍었을 때 떠올랐다. 우리는 서로 눈을 나란히 두었고, 그 모습은 마치 우리가 하나가 된 것처럼 보였다. (중략) 이렇게 동물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각자의 특성이 잘 드러나도록 연출하여 이 생명체들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특별함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작가는 셀프 포트레이트 작업을 위해 기획, 감독, 배우, 시나리오, 편집, 전문 스태프 등 작업과정에 필요한 모든 역할을 직접 맡아서 진행할 뿐 아니라, 특수 분장술과 포토샵 디지털 페인팅 기법도 개발했다.
작가는 특수 분장을 통해 동물로 변신한 뒤 세트 조명, 특수 배경 설정 등 정교한 스튜디오 연출로 촬영한 사진을 포토샵의 팔레트 기능을 활용해 옆모습을 한 동물의 눈과 정면을 바라보는 자신의 한쪽 눈을 일치시킨다. 동물과 작가의 모습이 담긴 두 개의 이미지는 포토샵을 이용한 디지털 회화로 정교하게 합성하는 과정을 통해 동물과 인간이 하나의 화면에서 눈맞춤하는 기이하고 매혹적인 사진으로 완성된다.
보르시는 열한 살 생일에 웹디자이너였던 친척에게 포토샵 프로그램을 선물 받은 뒤 현실과 가상 세계를 정교하게 합성하는 디지털 기술을 연마했다. 특수 분장술과 초현실적 연출, 디지털 회화기법을 결합한 셀프 포트레이트는 작가의 아이디어를 구현시키는 데 최적의 도구였다.
보르시는 자신의 정체성을 일관되고, 견고하며 고착된 하나의 신체로 제한하지 않는다. 사이버 공간에서 캐릭터로 사용하고 있는 아바타를 활용한 다양한 변신 기술에도 능숙하다.
오형근의 인물들이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불안하고 모호한 초상이라면, 보르시의 초상은 감정에 무게가 실리고, 신화적인 ‘변태’를 통해 매혹적인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작가소개>
오형근(1963~)은 거리에서 사회적 풍경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작가로 시작해, 한국 사회의 특정 인물 군의 유형을 보여주는 초상 작업을 해오고 있다. ‘아줌마’(아트선재센터, 1999), ‘소녀연기(少女演技)’(일민 미술관, 2003), ‘소녀들의 화장법’(국제 갤러리, 2008), ‘중간인’(아트선재센터, 2012) 등의 전시를 통해, 한국 사회의 특정 인물군이 느끼는 정체성의 흔들림을 포착하고, 그들 내면의 불안을 집단의 초상으로 드러내는 독자적인 작업 세계를 구축해 오고 있다. 현재 계원예술대학교, 사진예술학과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플로라 보르시(1993~)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으로 부다페스트 모호히-너지 예술디자인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2019년 헝가리국립박물관(헝가리, 부다페스트), 2014년 뉴미디어사진박물관(미국, 디트로이트) 외에 스웨덴, 중국, 터키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을 가졌다. 기획전으로는 2021년 피렌체 비엔날레(이탈리아, 피렌체), 2019년 스톨른 하트(영국, 런던 사치갤러리), 2017년 브뤼셀 사진 페스티벌(벨기에, 브뤼셀), 2015년 엑스포저 어워즈 컬렉션(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등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다.
2014년 어도비 포토샵 프로그램 표지 작가에 선정됐고, 2016년 아메리칸 아트 어워드 1위를 수상했으며, 2019년 어도비 크리에이티브 클라우드 CI를 제작했다. 2020년 미국 포브스가 뽑은 30세 미만 아티스트 30인, 2021년 전 세계 여성 사진작가를 대상으로 한 ‘핫셀블라드 히로인’에 선정됐고, 2021년 제 13회 피렌체 비엔날레 오픈 콜 국제대회 1위를 수상하는 등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