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7호 천수림(사진비평)⁄ 2023.05.03 10:05:40
‘위장과 은폐’된 이미지는 때때로 진실에 다가가는 우회로가 되기도 한다. 성별, 국적, 계급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파라 알 카시미와, 가족에 대한 서사를 통해 후기식민지의 정체성을 추적하는 래리 아치암퐁은 이 우회로를 따라간다. 이미지가 구성되고 이해되는 방식, 가독성과 원형에 대한 인식에 대해 고찰하게 만드는 두 작가를 7월 9일까지 열리는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Soft and weak like water)에서 만날 수 있다.
래리 아치암퐁의 붉은 입술
2013년 래리 아치암퐁은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클라우드페이스’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 공연에서 퍼포머들은 아치암퐁이 선보인 사진 속 얼굴(Blackface)처럼 동그란 검은 구를 머리에 쓰고 붉은 입술이 새겨진 채 전시장을 걸었다. 피부색 때문에 외계인 취급을 받는 경험을 묘사한 ‘블랙 페이스’는 아치암퐁을 현대미술계에 압인시킨 이미지이기도 하다. 아치암퐁은 영국계 가나인 작가로, 영화, 스틸, 사진, 시청각 아카이브, 라이브 퍼포먼스, 오브제, 사운드를 활용한 작업을 진행해 왔다.
블랙 페이스는 1980년대와 1990년대 런던 동부 지역에서 자라면서 인종차별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어린 시절을 호출한다. 아치암퐁은 대부분 어머니가 찍은 가족사진에 검은 머리를 씌우고 과장된 붉은 입술을 강조했다. 검은 원으로 강조된 얼굴은 그들의 피부색을 가림과 동시에 붉은 입술로 인해 오히려 더 강조된다.
붉은 입술로 덮인 검은색 원은 ‘로버트슨의 마멀레이드병’에 그려진 캐릭터인 ‘골리워그’로, 아치암퐁이 어렸을 때 아침 식사나 다른 가족 식사 시간에 본 것이다. 인종차별의 상징처럼 인식된 로버트슨의 마멀레이드 병은 영국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졌을까? 물론 이 도상은 2001년에 사라지지만 잔존하는 이미지는 여전히 ‘클라우드’처럼 세계를 서성이고 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에서도 선보이는 아치암퐁의 배회하는 이미지들은 런던을 거쳐 광주에 도착했다. 가족에 대한 서사를 통해 후기식민지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아치암퐁에게 블랙 페이스가 어머니의 기억을 통해 ‘인종차별’에 대한 메시지를 던진다면 비디오 작품 ‘성유물함2(Reliquary2)’(2020)는 팬데믹 기간 동안 자식들과 떨어져 지낸 기간 동안 대화를 나누며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한다.
‘유물2’를 위해 쓴 사색적 대본에는 아치암퐁이 자식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이 담겨 있다. 유물2에서 보이는 빈 도심은 그에게 낯선 풍경은 아니다. 도시의 텅 빈 모습과 유령처럼 텅 빈 도시를 돌아다니는 노동자들의 역할은 그에게 익숙한 모습이다. 아치암퐁은 어릴 적 큰 사무실이나 스튜디오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어머니를 따라 일을 도와드리곤 했다. 이런 어릴 적 개인의 기억과 유산은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대중문화와 탈식민지적 입장 사이의 교차점, 현대 사회의 고착화된 사회 정치적 모순을 드러내는 주요한 자원으로 작용한다.
아치암퐁은 ‘더 라인’의 의뢰를 받아 오디오 작품 ‘산코타임과 내가 듣는 것’(2020)이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그리니치 페닌슐라에서 로열 도크까지 런던 케이블카를 타고 왕복 20분 동안 템즈 강을 가로지르며 대영제국의 흔적을 오버랩시킨다. 런던 박물관 사운드 컬렉션, 런던과 아크라, 그리니치의 세인트 메리 막달레나 학교 초등학생들과의 워크숍에서 녹음한 오디오 등 사운드스케이프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산코 타임’은 작가가 개발한 개념으로, ‘남겨진 것을 되찾기 위해 돌아간다’는 뜻의 가나 트위어 산코파에서 유래했다.
아치암퐁의 식민주의 유산에 대한 산코 타임은 앞선 다른 작업인 가족사진의 아카이브와 교차하면서 더욱 강렬한 내러티브를 구축한다. 현재 영국인구 중 흑인은 3%를 차지한다고 한다. 이들이 에이즈로 사망할 확률은 4배나 높다고 한다. 그는 이 사항을 인종차별의 징후로 읽는다. 산코타임의 산책자 아치암퐁은 여전히 역사 속에서 잔존하며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사람들의 ‘음성’을 대신하고 있다.
파라 알 카시미의 특별한 날들
광주비엔날레 본 전시장에 특별한 편지가 도착했다. 작가이자 음악가인 파라 알 카시미의 장소 특정적인 사진 기반 설치 작품인 ‘특별한 날들을 위한 편지(Letters for Occasions)’(2023)엔 아랍의 한 가정집에 초대된 듯 이국적인 일상 사진들이 펼쳐진다. 마치 집안의 벽지에 액자를 걸어놓은 듯한 공간연출로 인해 잠시 이곳이 전시장임을 잊게 만든다. 이 연출 사진들은 카시미의 가족앨범 아카이브와 작가 주변의 공간을 촬영한 사진들로 이뤄졌다.
핑크빛 벽지에 아이보리색 커튼이 있는 이미지 위에 풀밭을 연상시키는 융단 소파와 그 위에 서 있는 어린 양의 사진, 벽면에 콜라주된 이미지들은 아랍 문화와 양식, 취향, 실내 공간을 통해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에 관한 소속감과 애정을 강하게 드러난다.
특별한 날들을 위한 편지는 2021년 초 작가가 아랍에미리트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 격리 중일 때 진행한 작업이다. 그녀는 서구로의 이주 기록을 담은 오래된 가족 앨범을 참조해 자신이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의 실내 공간과 주변을 촬영했다. 이 설치 작품은 카시미의 외가가 레바논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야기와, 그녀의 아버지 출신이자 작가가 자랐고 현재도 거주하고 있는 아랍에미리트에서 촬영한 이미지가 결합돼 있다.
작가는 특히 어린 시절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꽃무늬 식탁보와 옷, 벽지, 실내장식, 등을 통해 아랍의 일상에 다가갈 수 있는 코드를 슬며시 드러낸다. 평범한 일상의 이미지가 큰 벽지로 옮겨지면서 마치 거대한 거석처럼 우리 앞에 등장한다. 이 일상적인 이미지 사이사이에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듯한 혹은 온 힘을 다해 노래를 하는 듯, 치료를 받기 위해 최대한 벌린 구강은 깊은 동굴 속을 연상시킨다. 툭 놓인 누군가의 여권을 통해 이 공간이 고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이렇듯 아주 사적이지만 이질적으로 섞인 문화의 혼종성은 다른 문화권으로의 이주와 디아스포라(본토를 떠나 타국에 살면서도 고유의 정체성과 문화를 잃지 않는 민족)를 연상케 한다. 이런 독특한 연출방식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르네상스 회화 등 다양한 출처에서 관습을 차용한 것이다. 유럽과 중동의 시각 문화에 모두 능통한 카시미는 이미지를 배열하고 편집하는데 겹치고 얹히는 개입을 통해 국가 정체성, 소비주의, 후기식민지, 종교적 기원해 관해 시각적으로 풍성하도록 만든다. 이런 위장과 은폐는 카시미의 주 무기이기도 하다.
카시미는 2020년 봉쇄 기간 동안 미국 북동부에 있는 이 집에서 보내면서 외가의 사진 앨범을 보면서 개인적인 일화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후 1950년대 레바논에서 이민 온 가족과 미국에서의 삶의 윤곽을 조사했다. 작가는 사진, 엽서, 메뉴판, 번역서 표지 등을 스캔해 재인쇄한 후 사물 및 재료 조각과 함께 콜라주했다. 사소해 보이는 일상적인 사물에 특히 주의를 기울이면서 가족의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들려준다.
특히 카시미의 할머니가 다른 레바논 여성들과 함께 요리사로 일했던 호텔의 이름을 딴 스프링필드의 킴볼 호텔에서는 손으로 쓴 엽서 위에 호텔 저녁 메뉴가 겹쳐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딸기와 새우가 식탁보 위에 흩어져 있다. 이는 당시 할머니가 점심 뷔페를 준비하면서 두 가지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과 당시 호텔 투숙객들에게 인기 있었던 새우 칵테일이나 딸기 샐러드 등 일부 요리가 등장한다.
작가는 이렇듯 지속적으로 아랍에미리트인의 전통과 민속과 변화하는 삶에 주목해 왔다. ‘도착(Arrival)’(The Third Line)에서는 아랍에미리트 전역의 민속을 소재로 한 호러 영화를 선보였다. 카시미의 첫 장편 영화인 공포 코미디 영화 ‘움 알 나르’는 불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가상의 리얼리티 TV쇼에 출연한 움 알 나르를 통해 포르투갈과 영국 해군의 점령 이후 라스알카이마 지역의 변화되는 모습에 대해 이야기한다.
젊은이들의 변화, 전통적인 영성과 의학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는 점, 역사상실, 새로운 것을 찾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불의 어머니는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괴물이나 유령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위험으로 나타나는 집단적 무의식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카시미는 꾸준히 다문화적이며 점점 더 초세계화되고 있는 아랍에미리트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작가소개>
래리 아치암퐁은 1984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테이트, 베니스 및 싱가포르 비엔날레, 서머셋 하우스, 아트 온 더 언더그라운드 등 영국 및 전 세계 주요 기관에서 커미션, 레지던시, 전시를 진행했다. 아치암퐁은 현재 이니바(국제 시각 예술 연구소)의 이사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2019년 폴 햄린 예술가상을 수상했고, 2020년엔 스탠리 피커 펠로우십을 수상했다. 최근 프로젝트는 리버풀비엔날레(2021) 신작, 런던교통공사의 웨스트민스터 지하철역에 영구설치한 조각작품(2022) 등이 있다.
파라 알 카시미는 사진, 비디오, 퍼포먼스 작업을 하고 있다. 예일 예술대학에서 석사 학위, 런던의 델피나 재단, 메인주의 스코위건 회화 및 조각 학교의 레지던시에 참여했다. 뉴욕 NADA 아르타디아 상, 아론 시스킨드 개인 사진작가 펠로우십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아랍에미리트 구겐하임 아부다비, 런던 테이트 모던, 시카고 현대미술관, 케임브리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암스테르담 하우 마르세유 사진 미술관, 브런즈윅 보우도인 대학 미술관, 뉴욕 NYU 그레이 아트 갤러리 등의 컬렉션에 소장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