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프터 양(After Yang, 코고나다 감독)’에서 함께 살던 안드로이드 ‘양’이 어느 날 작동을 멈추자 제이크 가족은 수리할 방법을 모색한다. 이리저리 수소문하던 중에 양에게서 특별한 메모리 뱅크를 발견하며 양의 기억을 따라간다. 양은 “제게도 차(tea)가 그냥 지식이 아니면 좋겠어요. 진짜 기억이 있었으면 해요. 장소와 시간에 관해서요”라고 말한다. 기계인간이 그토록 원했던 것은 인간처럼 ‘기억’을 갖는 것이었다.
백정기는 2011년부터 시작한 사진프로젝트 ‘이즈 오브(Is of)’를 통해 물질과 기억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김보경이 아르코미술관 주제기획전 ‘기억·공간’에서 오래된 아르코미술관과 주변의 기억을 콜라주한 웰페이퍼 작업은 잠시나마 사라진 기억을 벽화처럼 ‘물질’로 고착시켰다. 윤향로는 그리스 로마 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건물에 새겨 넣는 고전적 그라피티의 기법인 ‘태깅’에서 출발한 작업 ‘태깅-K’를 통해 공간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아라리오갤러리, 백정기 개인전 ‘올인원(All in One)’
“어두운 숲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안녕 거기 있어. 안녕 거기 있어.’ 이건 마냥 무섭기보다는 조금 이상한 느낌이지. 앵무새는 이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 - 장소통역사 ‘안녕 거기 있어’ 중에서
아리리오에서 7월 1일까지 열리는 백정기 개인전 ‘올인원’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미스터리한 소설 낭독을 따라 슬며시 스며들게 된다. 전시장을 가득 채운 거대한 동상은 전태일, 손기정, 이승복, 정재수, 책 읽는 자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과 주인의 목숨을 구하고 죽은 개로 유명한 ‘오수의 견’으로 백정기의 ‘능동적인 조각’ 시리즈다.
이 사운드 설치작품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진행 중인 ‘메모리얼 안테나’의 연장선상에 있다. 실제 동상을 3D 스캐닝해 외형은 같지만 한쪽 엉덩이가 깨져 있거나, 팔이 다쳐서 상했거나, 낙엽이 쌓인 채 방치된 점을 반영해 제작했다.
작가는 ‘동상이 정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에서 이 작업을 시작했다. 원래 인물의 ‘본질’은 사라지고,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통해 변화, 변질되는 이미지가 동상이라는 조각으로 물질화된 점에 주목했다. 작가는 직접 만든 라디오 시스템을 통해 외형의 의미나 상징 대신 물질성이 강조된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매일 각각의 동상이 들려주는 소리는 ‘라디오’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지만 곧 바로 휘발된다. 텍스트로 남겨지지 않고 낭독과 첼로 연주로 듣기만 할 수 있는 라디오 소설(아티스트그룹 장소통역사, 백정기 작가와 협업)은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게 만든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1989년 영국의 한 탐험가가 섬에 머무르게 됐는데(지금은 무인도가 된) 어느 날 숲속에서 낯선 말을 들었다. 영어도 아닌 이 말들은 마치 똑같은 간격으로 마치 녹음기를 켜 놓은 것처럼 반복됐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앞도 잘 보이지 않은 날씨에 똑같은 간격으로 마치 녹음기를 켜놓은 것처럼 들려오는 것이다. 파도가 잠잠해질 때 겨우 배를 타고 섬을 떠났는데 그 후 소리를 내는 무언가가 등장하는 꿈에 시달리다 그 소리의 주인을 찾아 섬으로 되돌아왔다.
소리를 찾아 헤매었지만 끝내 들리지 않자 섬을 떠나기로 한다. 그 순간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서 가보니 앵무새가 사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섬에 살았던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남아 있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결국 부족은 사라지고 앵무새만 남아 부족의 언어로 계속 말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는 동상의 몸에서 파도처럼 밀려온다. 우리의 집단기억은 대체 어디에서 시작되고 누구에게 닿는 것일까.
1층에 설치된 ‘촛불 발전기와 부화기’는 촛불의 작은 열을 이용해 전기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10개의 촛불 발전기와 1개의 달걀 부화기를 통해 ‘생성, 소멸, 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반면 3층에 설치된 자연풍경을 담은 신작사진 ‘이즈 오브’ 프로젝트는 영원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드러낸다. 2011년부터 시작한 이 작업은 사진 속 풍경에서 찾은 단풍잎, 찻잎 등 자연물로부터 추출된 색소를 이용해 프린트를 했다. 2017년부터 채집된 풍경을 좀 더 오래, 시간을 지속시킬 수 없을까 연구했다.
이번에 발표한 신작은 투명 레진을 이용해 사진 전체를 앞뒤로 감싸는 함침법을 적용했다. 사진 속 자연풍경은 마치 손에 만져질 것처럼 견고하되, 아련한 색채로 박제됐다. 작가는 ‘때때로 생명은 지복이라기보다는 공포로서 경험되고, 잠재적인 것의 충만함이라기보다는 철저히 의미 없는 공백으로도 경험된다’(제인 베냇의 ‘생동하는 물질’-현실문화)는 제인 베냇의 사상에 동의한다.
베넷이 생명을 비주체적인 것이라 정의하고 니체의 말을 빌려 생명을 ‘영원히 변화하는 힘들의 바다’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 세계는 고정돼 있지도, 안정돼 있지도 않다. 작가는 ‘사진’이 여전히 이 물질성에서 탈출해 ‘영원’을 꿈꾸는 욕망을 툭 건드린다.
아르코미술관, 김보경 ‘양손의 호흡’과 윤향로 ‘태깅-K’
아르코미술관에서 7월 23일까지 열리는 주제기획전 ‘기억·공간’은 개인과 사회의 집단적 기억을 미술관과 주변 ‘공간’을 매개로 풀어놓는다. 아르코미술관이 위치한 장소는 옛 경성제국대에 이어 서울대 문리대가 있던 곳으로, 1960년 4.19혁명이 시작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서울대가 관악으로 이전한 후 조성된 마로니에 공원 안에 위치한 아르코미술관은 김수근 건축가의 설계로 1979년 미술관이 완공됐다.
한국 최초로 동시대 미술을 위한 공공 전시장으로 신축된 미술회관(아르코미술관의 전신)은 1960~80년대 민주화 운동과 1990년대 이후 청년문화와 소비문화가 주도한 사회 변화 등을 함께 겪었다. 개인의 경험과 역사적 기록 속에 저장됐던 기억은 전시라는 형태로 미술관이라는 공공의 공간 안으로 소환된다. 지난 한 세기에 걸쳐 변화한 미술관 주변에 대한 기억을 파노라마와 손뜨개질로 설치한 김보경의 ‘양손의 호흡’은 지난 시절의 아카이브 사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양손의 호흡’은 전시장 1층 입구와 2층 출구 쪽 통로의 벽을 활용한 월페이퍼 작업과 손뜨개 니팅 설치로 이뤄졌다. 거대한 벽화처럼 펼쳐지는 웰페이퍼 안에는 대학로 풍류마을 예술제를 구경하는 시민들, 농악연주하는 모습, 마로니에 시낭송회 등 어쩌면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긴 테이블보 혹은 긴 드레스처럼 짠 니트는 누군가 입었을 법한 혹은 입을지도 모르는 옷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아르코미술관을 중심으로 마로니에 공원, 대학로, 동숭동, 낙산을 탐색한다. 이 기억은 물길을 따라 바다를 넘어 확장되기도 한다. 아르코미술관 앞에서 진행된 크고 작은 행사와 마치 그 시간을 축하하듯 과장되게 채집된 난꽃과 식물 사이사이로 이미지들이 혼합, 중첩, 변형된다.
작가는 이미지를 합성하고 재조합하다가 중간에 작업을 멈추고 대바늘 뜨개질을 한 후, 다시 이미지 작업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했다.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 사라지고 새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소실되고 남는 흔적을 따라가는 방식은 ‘뜨개질’이라는 수행과 함께 구체적인 ‘물질’로 남는다.
김보경의 작업과 마주한 윤향로의 ‘태깅-K’는 거대한 그라피티를 연상케 한다. 그리스 로마 시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건물에 새겨 넣는 고전적 그라피티의 기법인 ‘태깅(tagging)’에서 출발했다. 그래피티는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인 ‘graffito’이고, 그리스어로는‘sgraffitio’이다. 오늘날 태깅은 그라피티보다는 소셜 미디어에서 이미지에 위치와 장소, 사람 등을 불러와 본연의 의미에 중첩, 또는 그 의미를 확장하는 행위를 말한다.
윤향로는 아르코미술관 관련 텍스트가 그라피티처럼 스프레이 페인팅 기법으로 화면에 새겼다. 마치 개인의 흔적이 사라지고 거대한 흐름만 보이지만 아르코와 인사미술공간에서 영향을 받은 개인의 기록이다. 미술관 역사와 시대성을 함의한 공적인 텍스트를 활용하는 한편 아르코미술관이라는 장소에 내재한 개인적 기억을 새김으로써 장소의 이야기는 나와 너, 공동의 기억으로 기록된다.
기억은 소리처럼 파동을 통해 유영하거나, 태깅을 통해 어느 장소에 머무른다. 인간은 잡을 수 없는 이 기억을 저장하기 위해 ‘메모리 뱅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안드로이드 로봇 ‘양’이 그토록 원했던 ‘기억’은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다.
<작가 소개>
백정기는 2004년 국민대학교에서 입체 미술을 전공한 후 2008년 영국 글라스고미술학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2006년부터 2023년까지 대안공간 루프, OCI 미술관 등에서 12회의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2004년부터 현재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송은아트스페이스, 리움미술관, 백남준 아트센터, 포스코미술관, 대구미술관 등 국공립미술관의 기획전에 다수 참여했으며,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 영국, 이탈리아, 미국, 베네수엘라, 이스라엘, 중국, 싱가포르, 홍콩 등 국제적인 무대에서 활동했다. 2012년 송은미술대상, 2019년 김세중 청년조각상, 2023년 홍콩아트센터 IFVA 미디어아트 금상을 수상했고,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등에 소장돼 있다.
김보경은 현대 도시에서 체득할 수 없는 역사의 영역을 발견하고 이해하기 위해 공간적 매개체인 건축물과 관계 맺는 역사와 현상, 감각에 주목한다. 이미지 리서치를 기반으로 현재의 도시 풍경에서 떠오르는 물음에 대한 단서를 찾아가면서 이를 프린트, 텍스타일, 설치 등 다양한 형태의 작업으로 풀어낸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개인전 ‘하이픈’(프로젝트 스페이스 다섯수레, 2022)을 열었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낯설고 낯선’(인천도시역사관, 2022), ‘교착 상태: 아카이브적 여정’(YPC SPACE, 2022), ‘더블 컬리 루프’(팩토리2, 2020) 등이 있으며, 2020년 독일 베를린의 글로가우에어 레지던시에 참가했다.
윤향로는 회화의 매체와 역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무빙 이미지, 프린트, 설치, 텍스타일 등 다양한 매체를 아우르며 현대 이미지의 소비 방식과 세계관을 탐구한다. 최근에는 회화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다양한 작품의 이미지를 다루며 작업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서양화과 학사, 한국예술종합학교 평면조형전공 전문사를 졸업했다. ‘태깅’(Hall1/실린더, 2022), ‘리퀴드 리스케일’(Liquid Rescale, 두산갤러리 뉴욕, 2017), ‘블래스티드(랜드)스케이프’(인사미술공간, 2014) 등의 개인전을 열었고, ‘누구의 이야기’(부산현대미술관, 2022), ‘움직이는 달, 다가서는 땅’(제주비엔날레, 2022), 12회 광주비엔날레 ‘상상된 경계들’(광주비엔날레재단, 2018), ‘젊은모색 2014’(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14) 등의 단체전에 참가했다.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를 비롯해 두산레지던시 뉴욕,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등에 참여했으며, SeMA 신진 작가 지원 프로그램, 아르코 미디어 프로젝트 등에 선정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