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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림의 현대사진산책+] 정체성을 재탈환하는 ‘사진’이라는 무기

아트선재센터,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Spectrosynthesis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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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천수림(사진비평)⁄ 2026.04.01 11:06:36

아트선재센터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대규모 퀴어 미술 기관 전시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3월 20일~6월 28일)을 진행 중이다.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은 LGBTQ+ 커뮤니티 지원을 목적으로 2014년 설립된 홍콩의 선프라이드재단(이하 재단)과 아트선재센터가 협력해 선보이는 전시다. 그간 타이베이현대미술관(2017), 방콕아트앤컬처센터(2019), 타이쿤(2022, 홍콩)에서 열린 ‘스펙트로신테시스’ 전시 시리즈를 잇는 네 번째 에디션이다.

퀴어성 둘러싼 다양한 관점의 교차 및 연결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 설치 전경. 사진=남서원, 이미지 제공=아트선재센터. ⓒ 2026. Art Sonje Center all rights reserved

‘스펙트로신테시스’는 빛이 무지개색으로 분해되는 현상이자 다양성을 상징하는 ‘스펙트럼(spectrum)’과, 서로 다른 요소들이 합성되는 과정을 뜻하는 ‘신테시스(synthesis)’를 결합한 단어다.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은 이에 맞춰 퀴어성을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와 관점이 교차하고 연결되는 장을 마련한다.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LGBTQ+ 미술의 지형도를 그려보는 이번 전시는 작가들의 과거 작업부터 신작 커미션까지 포괄하며, 각 작가가 퀴어성을 탐구해 온 고유한 방식과 실천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는 김선정 예술감독, 미디어문화역사연구자이자 홍콩중문대학교 교수인 이용우가 기획했다. 스펙트로신테시스 서울은 한국의 주요 정치, 사회, 기술적 변화와 그 긴장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온 퀴어성을 살핀다.

참여작가 중 양승욱, 재훈, 유키 키하라는 사진이라는 매체를 단순한 ‘기록’ 이상의 정체성 구축과 재현의 도구로 사용한다. 양승욱과 재훈은 한국 사회 내 성 소수자의 일상과 신체를 포착함으로써, 이들이 유령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분명히 살아가고 있음을 사진으로 증명한다. 유키 키하라는 19세기 식민주의자들이 원주민을 대상화해 찍었던 ‘에로틱한 인류학적 사진’의 구도를 의도적으로 차용한다. 차연서는 재훈의 드래그 퍼포먼스와 결합된 사진작업을 통해, 고정된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난 존재를 알린다.

양승욱이 재조직한 가족의 새로운 이름, ‘이웃,사촌’

양승욱, '이웃,사촌'. 혼합 매체, 가변 크기. 2025. 이미지 제공=양승욱

아트선재센터 지하 전시장을 들어서면 마치 누군가의 옥탑방을 들어가듯,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방안은 온통 스냅 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 가족, 친구, 연인 등 한 개인의 역사를 드러내듯 다양한 관계의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

양승욱은 한 개인이 이루는 다양한 관계를 사진을 통해 재구성했다. 작가는 혈연 가족, 오랜 연인, 반려동물, 협업자, 예술 커뮤니티, 친구 등 자신의 주변 인물을 사회적, 법적 범주를 빗겨난 방식으로 재조직한다. 다양한 크기의 인물 사진, 콜라주, 커튼 천, 시트지, 저가 액자, 사진 굿즈 등을 활용한 설치는, 전통적인 가족사진 형식과 사진 매체의 관습을 교란시킨다.

작가에게 이들은 때론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며 저마다의 거리감으로 관계를 지속해 온 존재다. 그는 이들이 형성하는 유동적 관계망을 ‘원가족/대안가족’ 같은 이분법 대신 ‘이웃사촌’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댄싱머신’과 ‘이 영상은 수어 통역 영상이 아닙니다.’는 농인 퀴어 당사자인 우지양과의 협업으로 제작된 영상 작업으로 ‘듣는 방식’에 관한 고정관념을 전복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던 감각의 세계를 드러낸다.

댄싱머신은 소리가 아닌 스피커의 진동으로 음악과 춤을 즐기고, 게이 클럽 문화를 경험하는 우지양의 이야기를 통해 청인(聽)의 감각 체계로는 알기 어려운 농인 성소수자의 일상을 포착한다. 이 영상은 수어 통역 영상이 아닙니다.는 미술관에서 작품 해설을 위한 보조적 정보로 취급되는 ‘수어’를 독립적인 시각 언어로 제시한다. 작가는 성별 이분법이나 규범적 표현 같은 수어를 둘러싼 문제들을 언급하며, 농인 퀴어 커뮤니티의 소통 방식과 언어를 사유한다.

작가는 가족의 결속력과 의무감 대신, ‘이웃’이라는 적당한 거리감과 ‘사촌’이라는 정서적 친밀감이 공존하는 상태를 지향한다. 이는 개인의 자율성을 지키면서도 고립되지 않는 현대적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이웃사촌은 가족의 부재를 채우는 대안이라기보다,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확장하고 재정의하는 새로운 사회적 문법에 가깝다. 이는 혈연이나 법적 결합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충분히 서로의 안전망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실천적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재훈, 트랜스적인 정원…유키 키하라의 제3의 성 정체성

재훈, '그림자 정원사'. 혼합 매체 설치, 가변 크기. 2026. 사진=남서원, 이미지 제공=아트선재센터

‘그림자 정원사’은 세 장의 사진과 한 편의 글, 음악, 그리고 선프라이드재단 소장 작품인 데릭 저먼의 ‘풍경(Landscape)’을 유기적으로 구성한 설치작품이다. 정원에서 채집한 모래와 물감을 섞어 제작한 저먼의 회화는, 가꾸는 행위와 만드는 행위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졌음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정원’은 실제 식물이 자라는 장소이자, 존재와 정체성이 이동하고 변형되는 은유적 공간이다. 이 ‘트랜스적인 정원’에서는 죽음이 삶으로, 남성이 여성으로, 사람이 짐승으로 변신한다. 재훈은 흑백 셀프 포트레이트 사진을 선보인다. 나무를 박차고 나오는 공격적인 이미지와 나무와 한몸이 된 것처럼 보이는 인체는 멀리서 보면 한 마일 짐승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훈은 신체와 환경, 주체와 배경 사이의 관계를 질문한다.

차연서, '아빠'. 싱글 채널 비디오, 4분 30초. 2025. 이미지 제공=차연서

재훈의 셀프 포트레이트 사진작업을 이어 극장으로 들어가면 차연서의 영상작업을 만난다. 이 둘은 동료작가이면서 차연서는 재훈의 사진 작업 과정을 영상으로 추적해간다. 영상 작업 ‘아빠’는 영화 ‘올란도(Orlando)’(1992)의 사운드트랙을 계기로 시작된 작업이다.

숲으로 들어가 펼쳐지는 정원은 여성적이고 비밀스러운 장소로 설정된다. 영상 속의 인물은 동료작가인 재훈이다. 남양주 정원에서 셀프 포트레이트 작업을 진행한 모습을 담았는데 숲으로 들어가서 여성의 옷으로 바꿔 입는 모습과 촬영을 끝낸 후 숲을 떠나는 순차적 구성으로 진행된다. 작가는 인물의 행동을 추적한다. 남성에서 여성 다시 남성으로 변모하는 모습은 ‘옷’이라는 언표로 드러나지만 성별과 행위는 정원의 식물들만 기억할 것이다. 정원은 변신의 기억 보관소로서 잠시 머물다 간 그를 저장한다.

유키 키하라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 사진=천수림

재훈이 셀프포트레이트를 통해 트랜스적인 존재를 드러낸다면 유키 키하라는 사모아의 제3의 성 정체성인 ‘파 아파피네(Fa’afafine)’로 자신을 규정한다. 사모아어로 ‘Fa’a’는 ‘~의 방식(in the manner of)’을, ‘fafine’은 여성을 의미한다. 즉, 여성처럼 또는 ‘여성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으로 태어났으나 여성의 성 역할을 수행하고, 여성의 젠더 표현을 따르는 이들을 지칭한다. 사모아 공동체에서 파아파피네는 비정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고대부터 존재해 온 사모아 문화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존중받았다.

그는 자신의 신체를 통해 19~20세기 초 남태평양을 촬영한 유럽 스튜디오 사진의 시각적 관습을 차용한다. 유키는 마네의 ‘올랭피아’(1863)를 참조한 삼면화를 풍자한 방식으로 열대 식물을 배경으로 소파에 기대어 누운 채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키하라는 폴 고갱의 작품 속에 박제된 수동적이고 이국적인 폴리네시아 여성상에 도전하며, 파아파피네의 시선으로 사모아의 주체적인 역사와 정체성을 재구성한다.

‘나의 사모아인 소녀’는 식민지 사진 속 성적으로 대상화된 ‘이국적’ 여성 이미지를 재연한다. ‘울루갈리 사모아: 사모아인 커플’에서는 전통 혼례 초상 형식을 차용해 작가가 남성과 여성 인물을 동시에 연기함으로써, 고착된 인종적·문화적·젠더 서사를 전복시킨다. 사진은 퍼포먼스의 순간을 포착한다. 퀴어 정체성은 종종 보여주기와 연기하기를 통해 실현되는데, 사진은 이러한 일시적인 수행을 시각적 서사를 수행하는 무기다.

<작가 및 재단 소개>

양승욱(b.1983, 한국)은 기억, 사적 아카이브, 일상적 사물의 감정적 잔향을 기반으로 사진과 설치를 결합한 다양한 실천과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그의 작업은 장난감, 오브제, 이미지 등을 반복적으로 순환·증여·교환하는 과정을 통해 사물이 지닌 ‘감정의 시간성’과 ‘관계의 흔적’을 탐구한다.

재훈(b.1999, 한국)은 오랜 시간 동안 셀프 포트레이트 방식으로 작업해 왔다. 그는 자신이 놓인 문화적 환경 속으로 몸을 들여보내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관계를 몸짓 언어로 기록한다. 그는 남겨진 이미지를 다시 바라보는 과정에서 신체와 환경, 주체와 배경 사이의 관계를 질문한다.

차연서(b.1997. 한국)는 드로잉, 글, 퍼포먼스, 게임, 온라인 전시 등 다양한 형식을 넘나들며 작업해왔다. 그의 작업은 시체, 벌레, 나무, 들, 짐승 등의 존재 상태들을 하나의 질서로 고정하지 않고, 서로 겹치고 이동하는 상태로 다룬다. 작가는 가위눌림 속에서 만나는 (비)존재들과의 친구맺기와 상호 돌봄의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살아있는 것, 길들여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들며, 다양한 시간과 상태가 겹쳐 머무는 공간을 제시한다.

유키 키하라(b.1975, 사모아)는 일본과 사모아계 혈통으로, 사모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다학제적 작가이다. 그는 시각 예술, 퍼포먼스, 큐레이토리얼 실천을 통해 정체성 정치와 탈식민주의 담론, 생태적 문제 등을 탐구하며 지배적이고 단일한 역사 서사에 도전해 왔다. 특히 식민지 시대 사진가들이 태평양 지역 사람들을 어떻게 표상했는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젠더와 성적 고정관념, 인종적·문화적 정체성, 역사적 권력 관계를 주요하게 다룬다. 2022년 제59회 베니스비엔날레 뉴질랜드관 대표 작가로 참여했다.

선프라이드재단(Sunpride Foundation, est. 2014)은 LGBTQ+ 커뮤니티의 창조적 역사를 포용하고 확산하기 위해 2014년에 설립됐다. 재단은 LGBTQ+ 커뮤니티와 그 연대자들을 위해 보다 강하고 건강하며 공정한 세상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사회 전반과 소통하는 예술을 전시하고 보존함으로써, 젊은 예술가 세대가 행동에 나서고 LGBTQ+ 경험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영감을 주고자 한다. 타이페이현대미술관(MOCA Taipei, 2017), 방콕아트앤컬처센터(Bangkok Art and Culture Centre, 2019~2020), 타이쿤(Tai Kwun, 2022~2023, 홍콩)에서 ‘스펙트로신테시스’ 전시를 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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