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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5단체 ‘성희롱 처벌 완화’ 요구

“처벌 엄격하고 남성에게 불리”…성희롱 확산 우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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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4호 박성훈⁄ 2008.04.28 16:40:59

여권신장 운동이 시작된 지 한 세기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여권(女權)은 눈에 띄게 신장돼 왔다. 각종 여성인권단체들의 피땀어린 투쟁과 노력은 전통적 유교 사고방식으로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박힌 남존여비 사상을 제거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참여정부 들어 새로 생긴 여성가족부는 여성 인권보장의 상징이 됐다. 더 이상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식의 성차별적 발언은 사회적으로 용인이 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남녀평등의 시대이다. 하지만 성희롱을 당하는 여성의 숫자는 좀처럼 줄어드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노동부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2007년 노동부에 접수 처리된 성희롱 사건은 모두 76건으로, 그 전년의 59건에 비해 17건(28.8%)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울러 성희롱 관련 상담건수도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 동안 정부 차원에서도 성희롱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여성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다.

■ 성희롱, 공공기관이 대기업보다 많아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성희롱 추태는 일반 기업이 아닌 공공기관에서 더욱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여성가족부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공공기관 여성 근무자 10명 중 2명은 성희롱 피해경험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전체 응답자 2025명 중 21.1%에 해당하는 427명이 지난 한 해 동안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성희롱의 유형도 다양하다. 여성에게 직접 혹은 가까이 둔 상태에서 음담패설이나 외설적인 농담을 하는 행태(16.2%)가 가장 비일비재하다. 또한, 회식자리 등에서 술 따르기를 강요하는 행위(15.1%), 외모에 대해 성적인 비유를 하거나 점수를 매기는 등의 평가를 하는 행위(13.4%)까지 여러가지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외설적인 사진이나 그림을 노골적으로 보여줘 시각적인 불쾌감을 주는 경우(2.3%), 입맞춤이나 포옹, 뒤에서 껴안는 등 직접적인 육체접촉을 시도해 성적 불쾌감을 주는 사례도(2.6%) 발견되고 있다. ■ 재계 ‘성희롱 처벌규정 완화’ 요구 그런데 우려스러운 것은, 시장친화주의를 표방한 현 정부에 들어와 성희롱이 증가국면을 맞을 수도 있는 변수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정부에서 각종 규제로 움츠려 있던 재계가 이명박 정부에서 먼저 시장편을 들겠다고 나서자 “직장 내 성희롱 처벌을 완화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나선 것이다. 아울러, 육아휴직 중 해고에 대한 벌칙을 가볍게 해달라는 등의 건의 사항을 정부에 대놓고 요구했다. 이 건의사항들을 내놓은 기관은 국내 대기업의 이권을 대변하는 전국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 등의 경제5단체이다. 이 같은 건의사항은 경제5단체가 지식경제부에 제시한 경제규제개혁 과제 267건 안에 포함돼 있는 내용들이다. 성희롱 관련 규제가 경제규제로 해석된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재계에서는 성희롱에 대한 처벌 규정이 너무 엄격한데다, 성희롱의 기준이 너무 주관적이고 피해자의 감정과 진술에 의존하기 때문에 남성이 훨씬 불리하다고 하소연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의 한 관계자는 “현행법으로는 직장 여성 성희롱으로 인해 법적 처벌을 받게 될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받게 되는데, 외국에는 이런 사례가 없다”며 벌칙이 과도하기 때문에 완화 요청을 한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남성위주의 대기업 직장 분위기 속에서 여성 대상 성희롱이 얼마나 개선될지는 의문이다. 관계자는 “대기업 사원 중에는 남성이 많아지는 추세”라고 전하기도 했다. 성희롱 규제완화 등 여성직원 인권 관련조항이 포함된 경제규제개혁 과제가 지식경제부에 받아들여질 경우, 성적 불쾌감을 느끼고도 감내하며 회사생활을 이어갈 여성의 수는 지금에 비해 늘어날 게 뻔하다. 또한, 육아휴직 중 해고에 대한 벌칙을 완화하고 직장 보육시설 설치 의무화를 완화하는 조항을 둔 것은 사회적 약자일 수 있는 여성들에 대한 배려와 모성 보호를 외면하는 처사로 비칠 수도 있다. ■ 비정규직 여성 ‘이중고’ 대기업에서 여성에 대한 성희롱의 기준이 완화된다면, 열악한 근무환경을 감내하고 있는 비정규직 직장여성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들은 직장 내 성희롱이나 임신·출산 등으로 인한 성차별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여성민우회 고용평등상담실이 발표한 ‘2007년 여성 노동상담 경향’ 자료에 의하면, 2007년에 상담실로 접수된 여성 노동상담 총 323건 중에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의 상담이 27% (88건)였는데, 성희롱에 대한 상담이 가장 큰 비율(26.1%)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전국 8개 지역에서 운영하는 ‘평등의 전화 2007 상담사례집’에서도 비정규직 근로자가 부당 해고와 같은 근로조건에 대해 상담하는 비율은 78.4%(912건 중 715건)로 정규직 근로자(58.3%, 1154건 중 673건)보다 훨씬 더 높게 나타났다. 근로조건 상담 다음으로는, 모성보호 상담(6.9%, 63건)과 성희롱(5.7%, 52건), 성차별(3.7%, 34건) 상담 순이었다.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의 경우 성차별 상담에서 절반 이상이 임신·출산 때문에 당한 해고 문제를 상담해, 네 명 가운데 한 명꼴인 정규직에 비하면 두 배 가까이 많았다. 특히,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정규직 근로자들과 다르게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등의 복리후생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에, 비정규직 여성들은 이 같은 모성보호 제도에 대해 애초부터 기대를 갖고 있지 않다. 이는 모성보호제도에 대해 비정규직이 문의하는 경우가 정규직 여성 근로자들(13.7%, 158건)보다 절반 이상 낮다(6.9%, 63건)는 사실이 반증한다. ■ 유통업계, 성희롱 문제 심각 백화점이나 할인마트와 같이 많은 사람들을 접해야 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성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더욱 극심한 성희롱 사각지대에 서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의하면, ‘유통업에 종사하는 여성 비정규직의 차별 및 노동권 침해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여성 피고용자들의 22.9%가 ‘재계약을 위해 성희롱을 참는다’고 밝혔다고 한다. 또한, 정규직과 기간제, 파트타임을 통틀어 여성 근로자의 19.1%가 고객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응답했으며, 10% 이상이 직장 상사 및 동료들에게 성희롱을 당했다고 전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다수의 여성들이 성적 수치심을 느끼고도 직장생활을 이어 가기 위해 표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희롱을 당했다고 응답한 여성의 약 20%만이 불쾌함을 드러내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을 뿐, 나머지는 소극적인 대처를 하고 있다. 불쾌하지만 혼자 참는다고 응답한 성희롱 경험 여성이 전체의 50%였다. 직장 내 성희롱은 법적 구제절차가 마련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피해사실을 밝힌 성희롱 피해자가 직장을 떠나게 되는 상황은 여전하다. 피해자가 부당해고 뿐 아니라, 소속기관과 동료와 상사 등으로부터 철저한 고립과 외면을 각오하지 않으면 이에 대한 문제제기를 쉽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의 성희롱 문제가 심각한 이유에 대해 고용평등상담실의 선미록 활동가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사업장에서 성희롱으로 문제제기를 했다가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해고당하기 십상”이라며 “많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가슴앓이만 하며 묻어 두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 “각종 차별 없애려는 사회적 노력 필요” 비정규직 여성 근로자들 사이에 이 같은 행태가 자주 발생하는 이유는 우선 비정규직 관계법 시행 이후 3개월, 6개월짜리 단기계약 여성 근로자가 늘어난 점이 꼽힌다. 실제로 “문제제기를 하면 재계약 시점에 불이익을 받을 것 같다”, “(조건을 받아들이기) 싫으면 그만두라는 말을 들었다” 등의 상담 사례가 빈번하다. 한국여성노동자회의 김신혜정 활동가는 “재계약 불안 때문에 당사자들이 아예 문제제기 자체를 피해 상담기관으로서도 대응이 어렵다”고 말했다. 상담소에서는 노동부에 의뢰해 불시에 익명의 설문조사를 시행하는 방식으로 어려움을 파악하고 있다. 비정규직도 출산휴가 등을 받을 수 있게끔 대체인력 장려금을 정부에서 지원하지만 현실성은 약하다. 김신혜정 활동가는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대체인력 구하기만 번거롭다’면서 그냥 잘라버리고 만다”며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법적 보호장치도 무용지물”이라고 말했다. 성차별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도 절실하다. 국가인권위원회가 한나라당 안명옥 의원에게 제출한 ‘연도별 성차별 관련 진정사건 접수현황’ 자료를 보면, 성차별 진정접수 건수는 2003년 67건에서 지난해 205건으로 4년 사이에 3.3배나 증가했다. 올해에도 6월 말 현재 127건으로 증가세는 이어지고 있다. 2003년 이후 접수된 성차별 사유로는 성희롱이 전체 648건 중에서 245건(37.8%)을 차지해 가장 많았다. 학교에 입학하는데 있어서 남학생을 여학생보다 유리하게 채점하는 성차별 사례가 182건(28.1%)으로 2위에 올랐다. 또 여승무원을 채용할 때 키를 제한하는 등의 용모 및 신체조건 차별 역시 79건(12.2%)이나 됐다. 한나라당 안명옥 의원은 “성차별을 포함해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각종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범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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