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명 식 (金 明 植) 現 동아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회화전공 교수 개인전(1984~2008) 서울 : 선화랑, 청작화랑, 백송화랑, 인데코화랑, 디자이너 ZOO 갤러리 외/ 부산 : 김재선갤러리, 롯데화랑, 피카소화랑 외 / 대구 : 두산아트센터, 중앙화랑/ 광주 : 아그배화랑/ 울산 : 현대아트홀/ 대전 : 반도화랑, 대전화랑 시드니 : 빅토리아화랑/ 마드리드 : 넵튜노화랑 밴쿠버 : 코반화랑/ 뉴저지 : 갤러리 엑스포제 마이애미 : 디아스포라 바이브화랑 도쿄 : 아트살롱, 이노우에, 센트랄 갤러리 상하이 : 란리화랑 뉴욕 : 로스코스카 갤러리, 레이버나드 갤러리, 리즈갤러리, 로드갤러리, PS 35 갤러리 심사위원 2003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2004 단원미술대전 운영위원 2005 신진작가발언전 운영위원 2006 무등미술대전 운영위원 2007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작품추천위원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어린 시절에 이미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세속적인 가치를 따지기 이전의 맑고 순수한 동심에 의해 포착되고 맑은 영혼에 의해 걸러진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한 인간의 형성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로 평생을 두고 작용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때로는 달콤한 추억으로 남기도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씁쓸한 회한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스려 다듬어진 것이기에 지나치게 감상적이어서 사람을 다치게 하지도 않으며, 이미 걸러져 순화된 것이기에 아득하고 그리울 따름이다.
작가 김명식의 작업에 대한 의욕과 열의는 익히 알려진 바이다. 작가의 작업은 그간 의욕에 찬 수 차례의 개인전을 통한 인상적인 변화와 변모를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관류하고 있는 것은 바로 어린 시절에 형성되고 연륜을 더함에 따라 그 내용을 풍부히 해 온 독특한 정서와 정감임이 여실하다.
작가는 근 10여 년에 이르는 기간을 <고데기>라는 일련의 제목을 지닌 작업으로 매진하였다. <고데기>는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오늘의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의 옛 이름이다.
<고데기>로 대표되는 작가의 작품 세계는 천진한 기억과 애틋한 감상이 교차하며 이루어내는 낭만적인 서정이었다. 순수한 동심과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이들을 애써 기억의 저편에서 건져 올려 형상화한 작가의 화면은 익숙한 사물들과 명징한 색채로 그가 지향하는 인간중심의 자연주의적 서정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데기>를 이어 나타나게 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운 환경에 동화되어 변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이미 오래 전부터 지니고 있던 특유의 감성을 바탕으로 분방하고 다양한 개성들이 넘쳐나는 국제도시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던 특유의 감성과 작업에 대한 원칙적인 이해, 그리고 자신의 눈과 손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쉽사리 현대미술의 유혹에 경도되어 본연의 보폭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오히려 자극과 동력으로 수용하여 자기화한 것이 바로
이에 이르면 그의 화면은 단순한 서정의 풍경이나 색채 나열의 조형 작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색과 형상 모두 일정한 의미를 지닌 읽어내는 대상으로 변환되게 된다. 그것은 형상과 색채를 통해 은유되는 화합의 메시지이며, 이질적인 것의 공존을 통해 추구되는 조화의 가치이다. 이는 이질적인 것에 대한 인정과 이해를 통해 발현되는 관용의 시각이며, 다양성의 긍정을 통해 획득된 건강한 인류 보편적 가치이다.
이에 이르면 작가의 작업은 이미 구상, 혹은 비구상의 경계가 무의미해진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서정적 접근이 승화되어 일종의 인간중심의 서정주의로 변환되게 된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그저 미국 동쪽 언저리의 이국적인 풍경이나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양태가 아니라, 그 공간 속에 내재된 인본주의적 가치의 포착과 발현이라 할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대상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과 감성적인 소화 과정을 거쳐 발굴되고 표현된 것이라 할 것이다. 비록 형상을 차용하고 색채를 도입하여 객관적인 사물의 양태를 구분하지만, 작가의 작업은 구상의 객관성과는 이미 일정한 거리를 지닌 형이상학적 가치를 지닌 또 다른 조형이라 함이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일견 거친 듯 분방한 화면은 일정한 패턴을 지니고 있다. 정형화된 건축물들과 그것이 지니고 있는 표정들은 정연한 질서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표현된 사물의 형상들과 그것이 자리하는 공간의 관계는 마치 동양회화의 여백처럼 상호 작용하며 일정한 운율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것은 인간중심의 서정적 감수성을 드러내는 부드럽고 안온하며 조화로운 화합의 멜로디이다. 그것은 마치 작고 투명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해맑은 동심의 동요처럼, 혹은 욕심 없이 담백한 에세이의 맑음처럼 은근하고 잔잔하게 보는 이의 가슴에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비록 작가가 관심을 보이는 주제가 더 없이 크고 심각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독특한 서정성과 감수성은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작용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결국, 작가는 다분히 개별적이고 토착적인 개인의 일상과 기억을 통해 형성된 작업관을 바탕으로 현대미술의 용광로라는 뉴욕의 중심에서 오히려 그것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 가치를 발견하고 확인한 셈이다. 자신에 대한 긍정과 타자에 대한 용인을 전제로 한 이러한 작가의 입장은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해묵은 논제에 일정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조형들이 난무하는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작가가 드러내는 맑고 투명하며 섬세한 감수성은 어쩌면 오히려 절절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것의 근원은 작가의 어린 시절에 이미 작가의 내면에 축적되고 배태되어 성숙된 것이기에 쉽사리 그 근본은 고갈되거나 망실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