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를 당한 학생이 킬러에게 반 친구들을 살해해줄 것을 의뢰한다.” “환각상태에 빠진 아이는 부모를 흉기로 찌르고 어머니는 자기 자식을 살해한다.” 원한에 얽힌 이야기나 살인. 보복 등 끔찍하고 엽기적인 내용을 담은 괴담집이 최근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다. 문구업자들이 이 같은 공포적인 내용이 담긴 불온서적을 무분별하게 유통시켜 어린이들의 주머닛돈을 노리면서 동심이 멍들어 가고 있다. 괴담집들은 동대문과 영등포 일대의 문구 도매상으로 넘겨져 전국의 학교 문구점에서 유통된다. 올해 10종 이상의 괴담집을 찍어낸 한 문구 제작업자는 “주위에서 떠도는 이야기나 인터넷 카페·블로그 등에 올라온 내용들을 직원들이 수집해 편집한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주위에서 괴담이 사회문제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0년대 초반에 벌어졌던 ‘홍콩할매귀신’ 소동이 대표적인 경우다. 당시 홍콩에서 온 할머니 귀신이 어린이들을 납치하여 해친다는 소문이 서울 강남 지역에 돌았다. 각 초등학교에서는 등교를 꺼리는 학생들에게 괴소문에 동요되지 말도록 긴급 지도에 나서야 했다. 80년대 초반부터 주기적으로 유행해 온 ‘빨간 마스크’ 괴담도 마찬가지다. 입이 찢어진 처녀가 빨간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며 “내가 예쁘냐”는 질문을 던져 아니라고 대답하는 학생들의 입을 찢어버린다는 소문이었다. 78년 일본 기후현에서 시작된 이 소문은 79년 일본 전역으로 확산된 뒤 83년께 한국에 상륙한 것으로 알려졌다. 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초반 아동 납치·살인사건이 일어나는 등 사회가 불안해질 때마다 다시 유행하기도 했다. ■ 괴담집 유독 불티나게 팔려 요즘 초등학교 인근 문방구에서는 눈에 잘 띄는 곳에 괴담집을 시리즈별로 진열해 놓고 판매하고 있다.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손바닥 만한 크기의 500원짜리 책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유머 이야기가 담긴 책과 추리소설 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유독 귀신 이야기 등을 담은 괴담집이 잘 팔린다. 이 같은 괴담집은 올해뿐 아니라, 매년 여름 초등학교 근처 문구점에서 불티나게 팔려 왔다고 한다. 현재는 여름철이 지나갔기 때문에, 새로운 물품 공급은 뜸하지만, 여전히 괴담집을 찾는 초등학생들이 많다고 문구점 측은 말한다. 한 초등학교 앞 문구점 주인은 “현재 도매상에 주문을 해도 이미 여름철이 지나 새 물건이 없어 들여올 수가 없다”며 “철이 지났는데도 괴담집을 찾는 학생들이 꽤 많다”고 말했다. 이 주인은 이어 “최근 괴담집에 대한 언론보도가 잦아지면서 호기심에 구해보는 학생들이 더 늘었다”고 전한다. 문구점에서 만난 한 중학교 1학년 학생은 “괴담집은 초등학생 시절인 작년까지도 많이 사서 읽었다”며 “요즘에는 초등학교 괴담집이 불티나게 팔린다는 기사를 보고 또 읽게 됐다”고 말했다. ■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괴담집을 읽는 초등학생들은 잔인한 스토리에 공포심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점차 이에 무감각해지는 모습이다. 서울시내의 한 초등학교에서 만난 4학년 허모 군은 “처음에는 잔인한 내용에 무섭고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전했다. 같은 학급의 이모 양은 “처음에 봤을 때는 재미있었는데, 계속 보면서 무서워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또, 김모 군은 “주로 남자친구들이 이 책을 많이 사 본다”면서 “여러 명이 돌려보기도 한다”고 전했다. 내용에 대한 느낌을 묻자 “그다지 잔인하거나 공포스럽다고 느껴지진 않는다”고 말했다. 거리에서 만난 초등학교 3학년 김모 군은 “마스크를 두르고 사람을 미행해 흉기로 찔러 괴롭히는 것이 재미있었다”고 구체적인 내용을 들기도 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괴담집을 보고 있던 초등학교 2학년 한모 군은 “처음에는 엽기적인 이야기라 보기 싫었는데 자꾸 내용이 생각나서 보게 됐다”며 “책이 작아서 갖고 다니기가 편하고 수업시간에도 몰래 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잔인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접할 경우, 아이들이 공격적인 성향을 지니기 쉽고 모방범죄 우려까지 있다고 지적한다. 충북대 손정우 교수(소아정신과)는 “아이들에게는 이런 여러 가지 상상 속의 이야기들이 실제로도 가능한 것처럼 착각하기 쉽다”고 우려했다. ■ 교육당국 뒤늦은 대책…“권고만으론 역부족” 초등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괴담집에 대해, 교육당국이 대책 마련에 나서기도 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9월 초에 각 시·도 교육청에 공문을 보내 괴담집의 유통을 근절하기 위해 가정통신문 배포 및 교육 활동을 펴도록 했다. 교과부는 ‘데스노트’ ‘신(神) 전설의 고향 악마의 자식’등 모두 18권을 유통금지 목록으로 지정했다. 대구의 각 초등학교는 학생들에게 괴담집을 구입하지 말도록 알리고, 학교 인근 문구점에도 유통금지 목록을 배포하고 판매 자제를 요청했다. 춘천교육청에서는 아이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괴담집 근절에 관한 홍보활동을 펼친 후 10월 중에 단속을 펼칠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괴담집 유통은 현행법상 법적 처벌 대상이 되지 않아, 이 같은 대책이 일시적인 효과에 머물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괴담집은 개인사업자들이 펴낸 인쇄물로, 서적이 아닌 문구류나 학용품 등으로 분류돼 현행법상 심의나 단속의 근거가 없다. 지난 7월 교과부와 문화체육관광부 등 관련 기관들이 합동 대책회의를 열기도 했지만, 단속 규정이 없어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초등학교의 한 담임교사는 “단순히 보지 말라는 말로 학생들의 호기심을 잠재우기는 역부족”이라며 “괴담집 등 불온서적의 유통을 근절할 수 있는 종합적인 법규 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심의 단속 근거 없어 계도에 치중 서적이 아닌 문구류로 판매되다 보니, 문구업자가 기획·제작한 후 인쇄소에서 찍어낸 괴담집을 심의하고 단속할 근거는 전혀 없다. 정식 출판물이 아니어서 청소년보호법 등의 적용도 받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 유지향 씨는 “아이들에게 ‘좋은 책’ 목록을 제시하고 그 책들을 읽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괴담집을 멀리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괴담을 연구한 일본 학자들은 70년대 후반에 자녀를 학원에 보낼 수 없었던 학부모들이 의도적으로 유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적 불안을 부추겨 여유 있는 집안의 자녀들까지 학원에 다니지 못하게 만들자는 의도가 투영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홍콩할매귀신’ 괴담도 유괴나 인신매매 등 강력범죄가 자주 일어나자 학부모들이 자녀를 일찍 귀가시키기 위해 소문의 확산을 부추겼다는 분석도 있다. 초등학생이 유독 괴담에 민감한 이유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이 연령대의 아이들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기 시작하는 정신발달 단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소아정신과 전문의인 서천석 행복한아이연구소장은 “부모·친구와의 갈등이 싹트는 이 시기의 아이들은 그 감정을 해소하고 싶어한다”며 “억눌린 불편한 감정 때문에 상상력과 호기심이 더 자극된다”고 설명했다. 서 소장은 “예민한 아동의 경우 잔혹한 괴담을 접한 뒤 불면증이나 대인기피증에 시달릴 수 있다”며 “부모가 자녀에게 괴담집이 비현실적이란 점을 이해시키는 등 적극적인 지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학교괴담 대부분 일본에서 유래 학교에서 전래되고 있는 ‘학교괴담’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된 것들이라고 한다. 화장실 귀신은 재래식 화장실의 변기 밑에서 손을 내밀어 엉덩이를 쓰다듬는다는 물의 요괴 ‘갓파(河童)’에서 비롯된 것이고, 학교 부지가 원래 공동묘지였다는 소문도 마을 중앙에 공동묘지를 뒀던 일본의 전통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다. 김종대 중앙대 민속학 교수는 “한국의 학교괴담은 대부분 신식 학교 체제가 도입된 일제시대에 수입돼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결합하는 토착화 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도 귀신을 불러내는 주술인 ‘분신사바’가 고등학생 사이에 크게 유행하고, ‘학교괴담’이라는 제목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초등학생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얻는 등 괴담문화의 수입은 계속되고 있다. 일부 심리학자는 학교괴담의 특수한 기능에 주목하기도 한다. 학교괴담을 통해 학교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인 학생들이 불안감과 공포를 공유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주장이다. 성적이 주는 압박감은 2등에게 죽음을 당한 1등이 ‘통통귀신’이 되어 2등을 쫓아다닌다는 이야기로, 부모에 대한 반항심은 귀신으로 변한 엄마 이야기로 변환된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괴담집과 인터넷·대중매체·게임 등을 통해 훨씬 잔인하고 엽기적으로 각색된다는 점이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괴담을 만들어내고 유통시키는 어른들의 상혼에 아이들의 상상력과 정서가 멍들고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