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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쌀이 제주도쌀보다 많아?

서울의 마지막 곡창지대, 강서구 논농사 지역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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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88호 박성훈⁄ 2008.10.14 14:07:13

알이 꽉차 여문 벼가 고개를 숙인 황금벌판. 논 여기저기서 작업하고 있는 콤바인. 짐을 가득 실은 트레일러를 끌고 다니는 트랙터. 얼굴을 검게 그을린 농부들. 한가로운 시골 농촌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대의 산업화 도시인 서울시 어느 한 곳의 풍경이다. 물론, 서울 도심지역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서울 외곽지역의 김포공항 인근 풍경이다. 서울의 유일한 논농사 곡창인 이 지역의 주 농산물은 쌀이다. 사람들은 대개 서울시에서 쌀이 난다고 하면 의구심을 갖는다. 시 소속 공무원들조차도 서울 쌀에 대해 물어보면 “서울에 쌀이 나느냐”고 반문할 정도다. 서울시내에서 쌀을 생산하는 농지의 전체 면적은 총 482ha. 주로 강서구 가양동과 마곡동·공항동·방화동·개화동·발산동 등지에 모여 있다. 농가 수만도 2934가구에 1만666명의 서울시민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서울시는 집계하고 있다. 이 지역이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에는 김포평야의 끝자락이었다. 그러다 1939년에 공항동 지역에 김포비행장이 들어서고, 이후 김포국제공항으로 사용되면서 개발이 묶여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넓은 평야 위로 굉음을 내며 날아오르는 비행기의 모습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 황금벌판-아파트, 대조적인 모습 시기가 바야흐로 추수철인 만큼 강서구 일대의 농가들도 가을걷이에 한창 일손을 부리고 있다. 지하철 5호선 방화역 근처에는 수많은 빌딩과 상업단지가 조성돼 있어 여느 서울지역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건물 사이 골목으로 들어가 몇 블럭을 지나니, 바로 논둑길 따라 바둑판 모양을 이루고 있는 평야가 눈에 띄었다. 10층을 넘는 고층 아파트와 업무지구에 들어선 건물들이 한여름 뙤약볕을 견뎌낸 벼가 자라는 황금벌판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곳에서 콤바인으로 가을걷이를 하던 농민 전우신 씨(60)는 작업에 집중하느라 주변에 누가 와 있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을 정도였다. 농사가 잘돼 좋겠다는 기자의 덕담에 미소 지으며 “올해는 대풍(大豊)”이라는 짧은 말만 남기고 다시 일에 열중했다. “다른 논까지 작업을 마치려면 반나절은 더 걸릴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윽고 벼 건조장에 다녀온 농민 한진수 씨(53)가 트랙터를 타고 등장했다. 알고 보니, 전 씨가 작업을 하는 논은 한 씨 소유였다. 농번기에 서로 일을 돕는 ‘품앗이’ 풍습이 남아 일손을 돕고 있었다. 한 씨는 “콤바인 같은 기계식 농기구는 농민 한 사람이 구입할 수 없이 공동 구매해 함께 사용한다”고 전했다. ■ 농촌과 같은 모습, 고령화 문제도 화훼단지와 함께 논농사 지역에 해당되는 5호선 개화산역 주변에서도 풍요로운 농촌의 가을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지붕이 낮은 단층 주택의 주변 텃밭에는 가지·고추·파 등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호미와 소쿠리를 들고 일년 내내 공들여 키운 채소를 따고 있는 노부부의 모습에서 정겨움이 느껴진다. 개화동에 위치한 강서물류창고의 벼 건조기 주변에는 탈곡을 마치고 건조를 기다리는 벼들이 수많은 포대에 담겨 있다. 간헐적으로 갓 훑은 벼를 가득 실은 트랙터나 트럭이 오간다. 건조기 옆에는 다른 트랙터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농부 몇 명이 있었다. 서울시 농업지도자 서부지구 회장을 지내고 있는 류예환 씨(55)와 서삼진 씨(65), 박용범 씨(53), 오세광 씨(48) 등이다. 얼굴을 까맣게 그을린 이들은 서울시민이면서도 영락없는 농민이었다. 이들은 농촌 현실과 자신들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름살이 그리 깊지 않은 류 씨는 올해 55세임에도 마을에서 막내 축에 속한다고 한다. 오 씨 정도 나이라면 팔팔한 젊은이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농촌 고령화의 현실은 서울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교통이 발달하고 서울 중심부와 접근성이 좋아 다른 일에 종사하는 젊은 층의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 이들은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할 정도로 부지런하다. 하지만, 일찍 일어난다고 작업을 빨리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류 씨는 “아침에는 이삭이 새벽 이슬을 머금었기 때문에 건조하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했다. 오 씨는 “아침부터 부지런 떨어 봐야 벼 베고 말리는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같은 시간에 끝난다”고 한마디 거든다. 그래서 아침 9시는 돼야 벼 베기 작업에 들어간다. ■ 추청·고품·향찰벼 등 친환경농법으로 재배 강서지역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벼의 품종은 주로 중부지방에서 널리 재배되는 추청벼와 고품벼·향찰벼 등이다. 중부에서는 흔한 품종인 추청벼는 쌀의 외관과 밥맛이 좋으나 병충해와 도복(비바람에 쓰러짐)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잎은 녹색으로 너비가 약간 좁다는 게 특징이다. 줄기는 약간 가늘고, 포기당 이삭수가 많은 편이다. 쌀알은 은 단원형(길쭉한 타원형)이며, 백미의 투명도가 높고, 외관 품위가 우수하다는 특징이 있다. 고품벼는 낱알이 약간 작은 단원립이며, 쌀의 외관 품위는 일반 벼보다 나은 편이다. 향찰벼는 벼의 끝이 검은 것이 특징인데 밥을 지을 때 누룽지 냄새와 같은 구수한 향이 난다. 대부분의 소비자가 유기농산물을 선호하는 만큼, 이곳에서 재배되는 쌀도 친환경농법을 지향한다. 류 회장은 “땅을 보호하고 건강한 상품을 제공하기 위해 여기서는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유기질비료를 사용한다”고 말했다. 피가 많이 자라는 여름에는 제초제를 쓰지 않고서는 일일이 김을 매줘야 하지만, 넓은 평야에 모두 손이 가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서울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추천한 우렁이 농법을 이용해 잡초문제를 해결한다. 우렁이 농법은 모내기를 한 후 무논에 우렁이를 방사해 우렁이가 잡초를 먹어 없애도록 하는 방법이다. 시의 지원으로 매년 네 번씩 하던 항공 방제도 두 번으로 줄였다고 한다. ■ ‘경복궁쌀’ 브랜드 홍보 필요 이렇게 생산되는 쌀의 양은 2000여 톤 정도이다. 2006년에는 서울시내 전역에서 백미 2,399톤을 생산해 제주도(2,352톤)의 쌀 생산량을 앞지르기도 했다. 2007년에는 이 지역에서 2114t의 쌀이 생산됐다. 이 정도면 전체 서울시민이 하루 끼니를 때울 정도의 양에 불과하지만, 서울에서 생산되는 쌀의 질만큼은 다른 지역 쌀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류 씨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올해는 별다른 풍수해 없이 적당히 비가 와서 작년보다 작황이 좋다”며 “작년보다 수확량이 많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이 쌀 가운데 35%는 서울시 브랜드인 ‘경복궁쌀’로 판매된다. 가격은 중상 정도에서 형성된다. 지역농협인 강서농협에서 10kg 1포에 2만4000원, 20kg 1포에 4만4000원 정도의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나머지는 정부수매를 하거나 지역 정미소에 위탁판매를 하고, 또는 본인이 직접 소비하거나 직거래 등으로 소화한다. 작년에는 경복궁쌀을 홍보하기 위해 서울시 농업기술센터가 청계광장에서 ‘한가위 맞이 우리쌀 이야기’행사를 열어, 떡메치기·벼타작 등과 함께 경복궁쌀 전시회를 하는 등 홍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서삼진 씨는 “서울 쌀에 대해 생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는 대대로 농사를 지어 온 사람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쌀이 난다는 사실이 전혀 생소하지 않다”고 말했다. 류 씨는 “경복궁쌀이 더 많이 알려지려면 이 같은 홍보행사가 더 활발히 이루어져야겠다”고 말했다.

■ 마지막 경작 마곡지구, 농민들 “아쉽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서울에서 이런 전원적인 풍경을 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서울시가 마곡동과 가양동 일대를 ‘미래형 지식산업단지’로 조성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이곳에 IT·BT·NT 등 첨단산업단지를 조성해 서울시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강서구는 마곡지구에 속해 대규모 택지개발이 예정된 가양1동·발산1동·방화1동 등의 일부 지역은 올 하반기부터 토지보상에 들어갈 예정이어서 올 농사가 마지막일 가능성이 높다. 내년 1월에는 토지보상이 이루어질 예정이라는 게 시의 입장이다. 이에 현지 농민들은 서울의 마지막 곡창지대가 사라지는데 대해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다. 토지 용도변경이 계획된 지역에 거주하는 시민들은 대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경우가 많아 일터가 사라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임대농사를 짓는 오세광 씨는 “이 지역이 산업단지로 꾸려지면 다른 지역으로 옮겨 농사를 계속 지을 작정”이라며 “서울의 유일한 농경지가 점차 사라져 가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임대농업인 유광환 씨도 “아직까지 별다른 계획은 없다”면서 “어느 지역에서 농사를 계속 지을지 정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지어 온 한진수 씨는 “서울에서 농촌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는데 사라져 가는 모습이 서글프다”고 아쉬움을 전했다. 류예환 씨는 “강서구의 논에서 불어오는 깨끗하고 시원한 바람은 도심을 정화해주는 역할도 한다”며 “도시 속 청정지대”라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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