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 나는 과거 미국에 자주 다녔다.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갑자기 기내 방송에서 의사를 찾았다. 나는 소아심장 전공이므로 나서지 않고 있었다. ‘ 마 이 큰 비행기에 의사가 두서너 명은 있겠지…’라는 생각이 들며 미국의 의사 친구들이 들려주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한 의사가 뉴욕에서 우연히 마주친 심장마비 환자를 응급조치를 통해 살려 놓았더니 이 환자가 오히려 “의사가 내 가슴을 누르며 심장 마사지를 하는 과정에서 생긴 갈비뼈 손상을 배상하라”고 고소를 하였다는 말이었다. 이밖에도 응급처치를 해 줬다가 고소를 당한 경우들이 미국에는 많으니 미국에서는 응급 환자가 생겨도 섣불리 나서지 말라는 것이 이들의 말이었다.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고, ‘목숨 구해 주니까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우리 속담의 내용이 딱 맞는 경우였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승무원이 와서는 “교수님, 환자가 있는데 좀 봐 주시죠” 하는 것이었다. 그때 안 일이지만 내가 자주 그 항공사를 이용해 의사로 등록돼 있었던 것이었다. 어떤 환자냐고 물으니 50대 미국인인데 가슴이 아프다며 괴로워하여 진통제를 주었으나 소용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환자는 1등석 의자에 가슴을 구부린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증세로 보아 관상동맥이상으로 보였다. 나는 여행할 때 니트로글리세린 태블릿을 작은 용기에 넣고 다녀서 이를 환자의 혀 밑에 넣어 주자 잠시 후 통증이 멈췄다. 운 좋게, 아니 다행히도 내가 아는 심장질환으로 도움을 줄 수 있어 나나 환자가 운이 좋은 경우였다. 비행기는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지나고 있었고, 자칫했으면 비행기가 회항해야 할지도 모르는 위기를 잘 넘긴 상태여서 승무원뿐 아니라 탑승객들도 아주 좋아했다. “정말 명의”라는 칭찬도 듣고 덕분에 나도 환자 옆 1등석을 차지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지만, 뉴욕에 도착하기까지 6시간 동안은 계속 마음을 졸여야 했다. 비행기에서 관제탑을 통해 병원과 통화가 가능했고, 공항에 도착한 헬리콥터의 미국 의사에게 환자를 인계했다. 나는 그때 맨해튼의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에 묵었는데, 그 환자가 며칠 뒤 찾아와 “정말 명의를 만나 내가 살 수 있었다”며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호텔을 체크아웃 할 때 알았지만 호텔비까지 이미 그가 낸 상태였다. 반대로 아주 엉뚱한 경우도 있었는데 역시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중국인이 갑자기 의식이 혼미해졌다면서 도움 요청이 왔다. 이코노미 석의 중국인 단체 여행객 중에 아주 뚱뚱한 중년 여성이었는데 숨을 가쁘게 쉬면서 옆으로 기울어진 채 누워 있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중국인 가이드로부터는 거의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옆에 앉아서 환자를 가만히 보니 눈을 자주 깜빡거리고 있었다. 여행 가이드에게 “자리가 좁아 힘들면 넓은 자리로 옮겨 주면 좋겠냐”고 그 여자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환자는 의미 있게 고개를 끄떡였다. 비즈니스 석으로 옮긴 뒤 한 10여 분이 지났을까. 코고는 소리가 났다. 꾀병 연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응급 약’ 절대 안 주는 한국 약국들 이처럼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병원이 아닌 곳에서 환자를 돌봐야 하는 경우가 가끔 생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응급처치를 해주려 해도 정부의 잘못된 시책으로 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나는 한국에서 친척 집, 길가 등지에서 급히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만나 약국에 달려가 응급 치료가 가능한 약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약사는 “처방이 없어서 안 된다”고 거절당한 경험이 두세 번 있다. 내가 의사라고 신분을 밝혀도 정식으로 발행된 처방전이 있어야 한다며 요지부동이었다. 미국에선 의사 자격번호만 있어도 이런 약은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전화로도 당장 구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이런 제도를 왜 마련하지 않는지…. 이러고도 응급환자에 대한 치료가 늦어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병원만 질타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