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제목은 기억이 안 나는데, 미국 영화 중 사람들이 말을 할 때 속생각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말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있었다. 나이 어린 애인과 함께 식당에 간 남자에게 식당 웨이터가 주문을 받으면서 묻는다. “딸인가 보죠?” 남자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웨이터는 “당신이 여자보다 너무 늙고 못생겨서 하는 말입니다”라며 여자를 보면서 “한 번 안아보고 싶네요”라고 말한다. 집을 보러 온 사람에게 여자 주인이 문을 열어주고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면서 “왜 하필 이런 때 왔어요? 저 지금 자위행위 중이었거든요. 끝내고 내려올 테니 기다려요”라고 한다. 이 영화와는 달리 병원을 찾는 많은 환자들은 의사에게 할 말을 조금밖에 못한다. “큰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말하고 듣기가 다 두려운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상하게 의사가 고압적이고 환자들은 위축된다. 나도 환자를 볼 때 그런 점을 느낀 적이 있다. 어떤 환자는 “의사 선생님 앞에서는 할 말을 자꾸 잊어버린다”며 말할 내용을 적어 가지고 온 경우도 봤다. 그 시절 그런 일은 나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도 병원에서 후배에게 진료나 치료를 받을 때가 있는데 선배인 나도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으니 일반인 입장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볼 수밖에 없는 의료보험체계가 의사들의 이런 태도에 한 몫 거드는 것도 사실이다. 병원에서는 간호사가 환자에게 설명을 해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환자들은 만족을 못하고 다시 의사를 찾는다. 문제는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에 있다. 주치의가 입원하기 전에 수술을 할 것이라고 했는데, 입원하고 나니까 전공의가 들어와서는 수술은 안 할 것이라고 한다. 또 암 진단을 받고 공포에 떠는 환자에게 어떤 의사는 화학 요법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다른 의사는 화학 요법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환자는 누구를 믿으라는 말인가? 의사인 나도 후배 의사들에게 진료-치료를 받을 때면 ‘이 의사는 고압적이군’이라고 느낄 때가 있는데 일반인 입장에서는 퉁명한 의사가 얼마나 불편할까 중환으로 입원한 환자의 보호자가 상태에 대해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어렵게 묻는데도 퉁명스럽게 한 마디 내뱉고는 사라지는 의사도 있다. 병원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이지만 언젠가 심장질환으로 중환자실에 2개월 이상 입원했다가 숨진 환자의 보호자가 담당 의사에게 소리치던 일이 생각난다.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야? 그렇게 잘나서 두 달이나 치료하고도 왜 사망했는지도 모르고 고생만 시키다가 사람을 죽여? 그런데도 말 한 마디 제대로 안 하고 죽을 만해서 죽었다고?”라고 따지는 것이었다. 그동안의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설명도 잘 안 해주고 물어보면 퉁명스럽고, 급한 순간에는 담당 의사를 보기가 어렵고…. 많은 고소 사건이나 병원에서의 소란에는 의사들의 처신과 관계된 것도 적지 않다. 환자나 보호자들이 앞의 영화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면, 질문에 대답을 잘 안 하거나 불친절한 의사들에게 도대체 어떤 말들을 쏟아낼까? 의사들이 새겨볼 만한 가상의 현실이다. 줄기세포 치료가 당장 가능하다고? ‘환상 속의 의학’에 속는 사람들
사람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할까? 아마 셀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수치스런 일이나 나쁜 일들을 잊어가면서 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은 거짓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거짓말을 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문제는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남을 비방하거나 사직까지 하게 만드는 거짓말들이다. 요즈음 국회의 인사 청문회를 보면 “기억이 안 난다” “잘 모르겠다” “모르고 한 일이다” “관행이라고 생각한다”며 거짓을 거짓말로 막는 추태가 줄을 잇는다. 교수들의 문제도 많이 드러난다. 결과도 없는 논문을 만들어 세계 유명 저널에 실어 국가를 망신시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가짜 박사학위, 가짜 대학 졸업장, 가짜 인증서 등도 판을 치고 있다. 다른 사람이 발표한 이론을 짜깁기 해 논문을 만들고 심지어는 허위 논문을 만들어주는 장사치까지 있다고 한다. 거짓과 상상은 다르다. 현대 과학이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을 일부 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일이 앞으로 언젠가는 현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공상과학 영화에서는 인간이 만든 로봇이 인간을 몰아내고 지구를 점령하며, 얼굴을 완전히 바꿔치기 하는 수술 등이 등장한다. 로봇 수술이 보편화되고 있고 줄기세포를 이용한 치료 연구가 이뤄지면서 마치 이제 곧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으리란 근거없는 희망도 싹트고 있다. “하지 마비 환자도 줄기세포 치료법으로 완치시킬 수 있다”는 무책임한 발표로 하지 장애인들이 기금을 모으는 일까지 있었다. 줄기세포 연구가 미래 의학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현재로선 모르는 게 너무 많고, 섣부른 줄기세포 치료는 돌이킬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들 쉽게 가상현실을 창작하는 것 같다. 아무리 뛰어난 방법이라도 부작용이 있으면 못 쓰게 마련인데, 이제 막 시작한 줄기세포 치료를 마구 하는 장사치들이 있으니… 줄기세포로 피부를 젊어지게 한다는 과장 광고를 한 뒤 의료 규제가 허술한 중국까지 건너가 주사를 맞게 하는 것 같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는 시도는 없어져야 한다. 현실화되기까지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너무나 많은 치료법을 마치 현실이 된 것처럼 미리 발표해 환자들을 기대시키고 곧이어 실망시키는 행동들이다. 미국 텍사스의 세계적인 심장병원 겸 아동병원에서 일어난 해프닝이 있다. 소아심장 분야 중 전기 심장학 분야에서 세계적 대가로 인정받으면서 세계 각지에서 의사들이 그에게 배우기 위해 몰려들었던 달인(?) 의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이 그동안 발표한 논문과 가능하다고 자랑했던 치료법 등이 모두 자신의 상상일 뿐, 실현될 수 없는 것을 허위로 발표했다는 것이 들통나고야 말았다. 급기야 의사 면허도 박탈됐다. 사실인지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그는 그 사건 뒤에도 자신이 발표한 논문은 모두 현실에서 가능하다고 끝까지 우겼다고 한다. 상상을 하다보면 그것이 현실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 의사는 정말 가상현실을 체험했던 것일까? 우리는 의학에 대해 너무 가상현실 같은 기대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