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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준희 교수의 메디컬 40년 에세이]전재산 줄테니 3년만 더 살게 해 달라며 울던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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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62호 박현준⁄ 2012.02.20 11:55:57

대부분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알았을 때라고 한다. 예전에 한 기자가 쓴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라는 다큐멘터리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면회가 왔다”고 간수가 호출해 문을 나서면 얼마 안 가서 왼쪽과 오른쪽 두 갈래 길로 갈라진다고 한다. 갈라지는 길의 중앙에 한 나무가 서 있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면회소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가면 사형장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일단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아는지라 간수가 왼쪽으로 밀어 붙이면 그 나무를 붙잡고 늘어져서 나무의 가운데가 손자국으로 닳아 있을 정도라고 했다. 예상은 했지만 임박한 죽음을 잠시나마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행동인지 모른다. 병원에 오랜 기간 근무하면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장면을 수없이 봐왔다. 자신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한 사람, 오랜 기간 몸부림치다 생을 마감하는 사람 등…. 오래 전 한 의사가 불치의 암 진단을 받았는데 그 분은 암이라고 설명을 해도 믿지를 않았다. 따라서 항암제를 머리맡에 놓아 둬도 임박한 죽음을 믿지 않았던 일도 있었다. 사람은 ‘나만은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수없는 생과 사의 갈림길을 보면서 욕심없이, 화내지 말고 살자고 결심했는데, 어느덧 또 욕심-화를 내니… 어느 누구나 반드시 맞이하는 죽음…. 언제가 됐던 우리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들 있지만 대부분이 자신은 아니라고 믿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욕망, 욕심, 갈등 등이 사회를 지배하는 지도 모른다. 또한 황혼기를 훌쩍 넘어선 사람들도 권력과 돈에 눈이 멀어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 육체를 교도소에서 보내는 이야기도 우리 주위에서 그다지 드문 일은 아니다. 모 재벌의 회장. 어린 시절 나의 초등학교 동창의 형으로 동네도 같았다. 중년이 돼서는 대기업의 회장으로 취임해 나와는 거의 마주하기 힘든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그가 50대 초반에 뇌종양(암)으로 모 대학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은 뒤 내게 연락을 했다. 우리 병원의 암센터로 옮겨서 치료를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비교적 상태가 심했으므로 입원을 해 투약을 받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항암제 치료는 매우 힘든 과정이다. 어떤 환자는 “폭탄을 맞는 기분” “땅 속으로 꺼지는 기분”이라고 하는가 하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고 표현하기까지도 한다. 입원한 지 1개월쯤 지났을 때 회장이 나를 보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이미 체중은 반으로 줄어 있었고 처음 보면 누군지 못 알아볼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오랜만에 나의 이름을 불렀다. “준희야. 내가 너한테 부탁이 있다. 세계 어느 곳이라도 좋으니 내 병을 좀 낫게 해줄 곳이 없겠냐? 여기 의사들은 모두 고개를 젓는 것 같은데 단 0.1%라도, 아니 실험 대상으로라도 치료 받을 곳이 없냐? 너는 내게 진심으로 모든 것을 말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처절함이 묻어 있었다. 대답이 없는 나를 쳐다보면서 “내 모든 재산 다 줄 테니까 산이나 강가에서 한 3년 만이라도 살게 해 줄 수는 없겠니?”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네 (중략) 탐욕도 벗어버려, 성냄도 벗어버려 하늘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중략)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강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어느 신사가 쓴 글귀가 생각난다. 나는 방을 나서면서 이제부터는 지금의 나를 행복하다고 여기고 욕심, 성냄 등을 버리고 착하게 살자고 다짐을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나는 사소한 일로 격하게 화를 내고 있는 나 자신을 봤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가 보다. 뭐든 살리고 싶은 마음은 60살이 넘어야 비로소 생기나?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에 거주할 때 한 200평 정도 되는 정원을 만들어 본 일이 있다. 사실 처음에는 정원사에게 맡겼지만 정원사가 심은 나무들이 토양과 기후에 부적합한 나무들이어서 볼품도 없었고, 잘 자라지 못했다. 그 때부터 나무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은 자료가 풍부했다. 미국의 기후대를 나눠서 그 기후에 맞는 나무들, 빠르게 자라는 나무 등 많은 정보를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한 쪽에는 과일 나무, 또 한 쪽에는 선인장, 다육식물 그리고 각종 팜 나무를 심었다. 혼자서 나무를 심다보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됐고, 허리를 다쳐서 며칠간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런데 새로 심은 나무들도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했다. 나무 밑을 파보니 침수되고 있는 상태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식물이 잘 자랄 수 없는 토양이었다. 다시 토양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결론은 마당에 있는 흙은 진흙과 돌가루가 섞여 물이 빠지지 않는 땅이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흙을 사서 그 위에 50cm 이상 깔았다. 그리고 중간에 땅을 1m 가량 파고 그 안에 작은 돌들을 깔아 안 빠지는 물이 모이도록 했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나무들을 심고 가꾸고 하는 동안 마치 아이를 키우는 듯한 심정이었다. 나무들이 안 좋은 토양 탓에 시들어가는 것을 보면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려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생명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소중하다’는 말도 뼈저리게 느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내가 ‘하나님, 저들을 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도 했다. 그 나무들 중 내 키 만한 선인장이 있는데 토양이 좋지 않다 보니 옆 가지가 떨어져 나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가지를 밀착시킨 뒤 수술을 했다. 줄기에 가지를 붙이고 밑에는 작은 못을 꼽고 버팀목을 댄 뒤 윗부분은 선인장 가시로 꿰맸다. “제발 살아나라”고 식물과 대화를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중병이 든 아이가 회복되듯 식물도 치료를 하니 회복되는 모습이 뚜렷이 보였고 이를 보는 나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나는 미국 생활을 접고 귀국할 때 정원을 쭉 돌아보며 잘 자라주길 기원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주위의 나무들을 볼 때마다 미국에 남기고 온 정원 속의 내 아이들 생각이 간절하다. 나이 60세가 넘어서야 나는 느꼈다. 풀 한 포기, 들꽃 하나도 얼마나 귀중한지를….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이 의술에 앞서 모든 생명이 중요함을 느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도…. -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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